작열하는 태양, 후끈한 날씨와 함께 돌아온 ‘그냥 간사’입니다. 오늘, 6월 25일은 61년 전 6·25전쟁이 일어난 날입니다....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준 수많은 참전국 중, 유일한 아프리카 국가에 에티오피아가 있다는 사실, 혹시 아시나요?
무척 고마운 나라이지만, 지금은 빈곤국으로 전락해버린 에티오피아를 지금 저와 함께 돌아보시죠!
<사진설명_함석 판자촌 앞에서 놀고 있는 에티오피아 아이들의 모습>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는 ‘코리아타운’이 있다?
수도 아디스아바바 동쪽의 예카 지역은 에티오피아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입니다. 함석으로 지붕을 얼기설기 엮어 지은 집들이 언덕배기에 닥지닥지 붙어있는 판자촌에는 3만여 명의 극빈층 주민들이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가고 있지요.
그런데 이곳에 ‘코리아타운’이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에티오피아의 ‘코리아타운’은 미국 LA처럼 한인들이 주로 모여 사는 지역이 아니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에티오피아의 노병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 사는 곳이랍니다.
<사진설명_마을 입구에 세워진 '한국마을'간판의 모습>
이 마을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에티오피아 군인들이 1950년대 중반 귀환하면서 형성된 참전용사촌으로, 에티오피아의 참전용사들이 한국 땅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후 귀국했을 때, 황제가 그들에게 하사한 땅이었다고 해요! 구릉지인 예카 지역은 한국 지형과 비슷해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의 파병 전 훈련소였다고도 하지요.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그 찬란한 이름
<사진설명:1950년대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모습. 출처_http://blog.naver.com/lishgirl2010/60126279936>
이들의 값진 희생이 불씨가 되어, 도움 받던 대한민국은 이제 당당히 다른 나라를 돕는 ‘원조 공여국’이 되었습니다.
에티오피아는 현재 가난과 질병으로 허덕이지만, 한국전쟁 당시만 해도 우리보다 훨씬 부자 나라였다고 해요.
한국전쟁 당시 참전한 에티오피아 군대의 이름은 ‘각뉴(Kagnew)’로, 당시 에티오피아의 황제였던 하일레 세라시에 황제가 친히 내린 이름이었어요. ‘각뉴’는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 ‘격파하다’라는 뜻이었지요.
<사진설명_한국 땅을 밟은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출처 http://blog.naver.com/sky_shower2/70107556249
전쟁 당시 한국에 온 에티오피아 황실근위대 6037명은 화천과 양구, 철원 등 강원도 중·동부의 산악지역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고, 123명이 숨지고 536명이 부상당했습니다. 단 한명의 포로도 없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길 정도로 용맹스럽고 강한 부대였다고 전해지구요.
이처럼 이름도 생소한 동방의 작은 나라를 위해 1만 4500km를 단숨에 달려와 대한민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에티오피아의 참전용사들,
그런데, 우리를 위해 몸 바쳐 싸운 에티오피아 노병들이 사는 이 마을은 왜 이렇게 가난할까요?
‘참전용사’ 훈장은 낙인이 되어…
<사진설명_한국전쟁 당시의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 출처_강원도민일보>
뙤약볕 아래 전선을 누볐던 에티오피아의 참전용사들. 지금은 예카지역의 코리아타운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전공을 세운 후 당당히 귀국, 황제에게 땅을 하사받을 정도로 칭찬받았던 그들은, 1974년 에티오피아가 공산화 되면서 공산권 동맹국인 북한을 상대로 전투를 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나는 등 17년간 수많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전쟁 영웅’이 한순간에 ‘배신자’가 된 것이죠.
참전용사라는 사실만으로도 죄인 취급을 받아 숨어 살다보니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졌고, 참전용사의 자식, 손자 손녀들은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되었죠.
다니던 직장에서도 쫓겨나고, 한 달 연금도 120비르(우리 돈 약 3,000원)로 어려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이들. 교육 없이는 가난을 벗어날 수 없어, 가난의 대물림은 지금까지도 계속되어오고 있습니다.
참전용사 3세 베자윗 이야기
<사진설명_에이즈에 감염된 사실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베자윗의 모습>
여기서 잠시, 예카 지역에 살고 있는 참전용사 가족의 이야기를 소개해드릴게요.
베자윗 피토(9·여)는 에이즈(AIDS) 환자입니다.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베자윗은, 남편과 헤어진 후 베자윗을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려고 매춘부로 나섰다가 에이즈에 감염된 엄마로부터 병을 옮겨 받은 불쌍한 아이입니다.
베자윗은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된 것도 모른 채 열심히 살고 있죠. 학교에서도 1등을 놓치지 않는 모범생이라고 해요.
에이즈는 완치가 불가능 한 대신, 약을 먹어 바이러스의 활동을 줄일 수가 있는데요. 하지만 참전용사 3세인 베자윗의 집은 지독한 생활고로 약 복용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진설명_(왼쪽)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참전용사였던 베자윗(왼쪽 맨 끝)의 집. (오른쪽)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흙과 나무로 얼기설기 지어져 물이 새는 베자윗 가족의 집>
베자윗에겐 어떤 삶의 행복도 허락되지 않은 것일까요?
그러던 어느 날,
굶주림과 절망으로 고통 받던 베자윗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이 보이게 된 사건이 있었으니...
국방일보와 굿네이버스가 공동으로 진행한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돕기 캠페인’을 통해 지원을 받게 된 거에요! 비가 오면 물이 들이치던 집에 방수포가 설치되고, 안질환으로 고통을 호소하던 베자윗에게 치료약도 지원되었답니다.
2010년 1월부터 올해 6월까지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돕기 캠페인’을 통해 베자윗과 같은 참전용사 가족과 후손들이 생필품, 의료지원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답니다! 굿네이버스 에티오피아 지부의 예카 지역개발사업장(Yeka CDP)을 통해 참전용사 자녀들을 지원하고 싶다는 문의도 끊이지 않았고요.
이번 캠페인을 통해 많은 분들이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에 대한 고마움과 안타까움을 느끼셨던 것 같아요. 정말 많은 후원문의가 있었지만, 그중에서 몇 가지 사연을 소개해드릴게요.
‘은혜’를 갚으려는 고마운 손길들
한국전쟁 당시 국군으로 참전했던 이원길 씨는 82세의 나이로 에티오피아 돕기에 참여하신 최고령 후원자이시랍니다.
“국방일보 기사를 보고 당시 같이 싸웠던 에티오피아 전우들이 생각났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언제까지 후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힘닿는 데 까지 후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시절을 기억하며 후원을 결심하신 이원길 씨의 사연, 전우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네요.
또 다른 국군 참전용사이신 김원도 씨(78세)는 본인도 보청기를 착용하실 정도로 몸이 불편하신 분이세요. 형편도 넉넉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위해 용감히 싸워준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의 2, 3세대들이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우셨다고 해요. 그래서 100만원의 기금을 선뜻 굿네이버스에 기부해주셨답니다.
에티오피아에 심겨진 희망의 씨앗, 하나 둘 싹을 틔우고
<사진설명_(왼쪽)모금된 기금으로 마련된 선물을 받기 위해 에티오피아 어린이들과 참전용사들이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 (오른쪽) 한 아동에게 배분된 물품들의 모습>
1년 6개월 동안 진행된 국방일보-굿네이버스의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를 도웁시다’ 캠페인을 통해 총 70명의 에티오피아 아동이 한국의 결연 후원자를 만났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해 6월 굿네이버스 에티오피아 예카(Yeka)지역에서는 이번 캠페인을 통해 모인 후원금으로 참전용사 2,3세대 아동들에게 필요한 생필품 키트(kit) 1차 배분이 있었어요!
[사진설명]
1. (왼쪽상단)물품을 받고 기뻐하는 참전용사 3세 나다나엘 훈드 군의 모습.
2. (오른쪽 상단)임시로 마련된 컴퓨터 교육 센터에서 활짝 웃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3. (왼쪽 하단) 예카 컴퓨터 교육 센터를 반기는 아이들과 지역주민들 한 컷!
4. (오른쪽 하단) 예카지역 화장실 건립 기금 전달식. 출처_국방일보>
국방일보를 통해 사연이 소개된 아동을 포함한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후손들에게 약 500만원 상당의 상R28;하의 세트 옷 세벌과 신발, 양말, 비누, 샴푸, 식료품 등이 제공되었지요. 에티오피아 현지 직원이 아이들의 옷과 신발 사이즈를 조사해 딱 맞는 새 옷을 받은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기뻐했어요.
또한 지난 해 12월에는 LIG넥스원(대표 이효구, www.lignex1.com> color=#00368f>www.lignex1.com)의 지원으로 에티오피아 예카(Yeka)지역에 ‘컴퓨터 교육 센터(Computer Training Center)’가 설립되었어요! 컴퓨터 10대와 무정전전원장치(UPS), 책걸상 등이 지원되어 약 1만 여명의 아동과 주민들에게 컴퓨터 교육을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
육군부사관학교의 1,000만원 후원으로 예카 지역 코리아타운에 공동 화장실을 지을 수 있게 되었어요. 대부분 집에 화장실이 없고 습기가 많은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해 영유아사망률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를 정도였던 이곳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화장실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이제는 우리가 은혜를 갚아야 할 때!
6·25전쟁 61주년을 맞아, 우리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도와준 그 은혜를 이제는 우리가 갚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들의 값진 희생이 불씨가 되어 한국은 오늘날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고,
1인당 GNP 2만 불,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개최국, 건설ㆍ자동차ㆍ조선ㆍ반도체 1위, 군사력 8위 등의 자랑스러운 성적표를 얻었지요.
또한 올림픽과 월드컵 개최 뿐 만 아니라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지위가 바뀐 첫 국가로 개발원조위원회(DAC)에 속하게 됐답니다.
한국을 위해 용감하게 싸웠던 에티오피아의 참전용사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가족과 후손을 위해 작은 나눔을 결심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사진설명_낡은 훈장과 함께 우리나라를 방문한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출처_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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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에디오피아 관련기사를 보다가....'별난이야기'님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1935년 이탈리아의 무력침탈에 셀라시에 황제는 국제사회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묵살 당했죠..
결국 이탈리아와전쟁에서 패하고 황실과 정부는 영국으로 망명해서 대전종전후 영국의 도움으로 다시 나라를 되찾았습니다.
황제는 자주적인 국권에서 나라의 힘이 발생 한다고 생각했고 개혁적인 정치로 에티오피아를 이끌었죠.
그때 한국전이 발발하자 황제는 주저없이 일반 군대가 아닌 황실근위대 일부를 한국전에 참전시키기로 하고
영국에서 교관을 초빙해 한국과 지형이 비슷한 곳에서 6개월동안 훈련한 후 21간 항해를 해서 부산항에 도착해서.
곧바로 춘천지구 전투에 참여....종전까지 단 한명의 포로도 없는...267번의 전투를 승리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이에 황제는 참전용사들에게 토지를 하사했고...1974년도에 공산화가 되서 황제는 폐위당하고
참정용사들은 참전했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박해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동안 잠깐씩 뉴스에..소개 될 정도로...에티오피아는 잊혀진 국가였습니다..
90년대 말부터 각종 언론을 통해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의 어려운 사정이 보도되고...각계각층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혔지만.....아직도 부족한거 같습니다..
후원 방법도 나왔으나... 자발적이니깐...소개는 안하겠고요..
한달에 만원이라도 후원하면 에티오피아 참전용사와 후손들에게 지원 할 수 있다고 합니다 ^^
담배를 줄여서라도 저는 후원할려고요 ^^~
그때는 우리보다 부유했던 국가에서 온 사람들인데 처지가 바뀌어 버렸으니
에디오피아 보면 항상 맘이 참 한국전 참전 용사였다고 박해받고 그 시련들을 본인 자손들이 겪게 해드렸으니 외국인 산업체 요원 뽑을때 좀 기회도 더주고 해서
그분들 그동안 겪게 해드린 상처 좀 보듬어 드렸으면 하네요
우체국에서도 에티오피아산 커피사탕팔았던적이 있어서 일부러 샀었네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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