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올렸던 군대이야기 다시 올립니다.
30년전 당시만 해도 소위 " 군바리"라고 군인들을 비하하던 분위기가 팽배해있던 시절이었죠.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는 이렇게 군인들을 조롱하고 혐오하고 비하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 입대하여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군인들이 왜 " 군바리"라고 멸시를 당해야만 했을까요?
그건 바로 하극상을 통한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군사혁명을 일으킨 전두환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가 군인에 대한 멸시문화를 만들어낸 장본인입니다.
철없던 시절 저도 이왕지사 군대갈 바에 미군부대에 가자고,
아주 단순한 동기에 카투사병에 지원해서 입대하게 됩니다.
1탄
남자라면 군대시절 이야기는 평생 안주거리로 삼지요.
저마다 일명 자신의 인생 중에서 그래도 큰 시절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전쟁을 겪은 선배 어르신분들의 이야기에 비하면 조족지혈이긴 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42년생이신데 아버지도 전쟁을 겪은 세대이긴 하지만 어릴적 기억뿐이시고
경상북도 출신이고 군대는 전라남도 광주시 상무대에서 복무하셨죠.
60년대에 복무하셨는데 그럭저럭 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미군 카투사병으로 갔다왔습니다.
당시에 촌동네에서 미군부대 간다니까 신기해 하던 친구놈들도 많았습니다.
고향은 경북 봉화입니다.
지원병이었고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제가 간 시절은 90년이라서
당시에는 카투사병 절반은 중앙선발이라고 해서 송파구 장지동 육군종합행정학교에서 필기시험을 처서 선발하고
절반은 논산선발이라고 해서 논산훈련소에서 차출을 했지요.
중앙선발은 1년에 상반기, 하반기 2차례 있었습니다.
상반기에 400명, 하반기에 400명 정도 총 800명 정도 뽑았고 이 인원을 1년 6차례 정도 입대시킨 걸로 기억이 납니다.
논산선발도 아마 같은 인원수로 차출 했을겁니다.
논산선발은 필요할 때마다 차출시킨 걸로 기억이 납니다.
카투사병 시험은 일명 "카시"라고도 했었습니다. 당시에 경쟁율은 엄청났었죠. 20대 1 였나? 30대 1 였나?
대한민국 역사상 출생율 최고의 세대가 바로 69년생~ 72년생입니다.
어렵지 않은 시험이긴 했지만 많은 응시인원이 떨어지는 시험이었고 재수하는 사람도 있긴 있었죠.
저는 얄팍하게도 영어나 배우자, 편한데니까 시험처서 갔다오자 해서 다녀왔죠.
당시 필기시험을 보던 육군종합행정학교는 위치가 바로 문정동 가든파이브 길건너편에 있었죠.
장지동이었고요
그 뒤에 성남대(남성대? ) 골프장이 있었죠. 지금은 위례동으로 변했고.....
당시에 기억나는건 가락동 시장이 있었고
가락동 건너편에 문정동 로데오 거리가 있었는데 조금은 볼품없는 거리였습니다.
의류브랜드 상설할인매장들이 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졌습니다.
90년대에는 서울 시내에는 상설브랜드할인매장들이 들어서서 일명 로데오거리 또는 패션문화의 거리라고 해서 몇군데 있었죠. 신정동, 신림동, 문정동, 건대 요렇게 기억이 나네요
7월달에 시험쳐서 합격하고 2학기에 휴학하고 10월에 논산으로 입영했습니다.
막내여서 그런지 누님 두분이랑 서울역에서 열차타고 논산역에 내려서 논산 시내에서 밥 먹고
훈련소 입영하기 전 시간이 남아서 누님들이랑 볼링 치고 머리 깍고 훈련소로 향했습니다.
2탄
논산에서 6주간 기초군사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시절엔 6주가 기본훈련이었죠.
행군은 딱 1번 했고 말이죠.
남들처럼 똑같이 교육받았습니다.
카투사란게 주특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시 추가로 카투사들은 2주간 연장해서 주특기교육을 받았습니다.
머 특별한것도 없었으니 멀 받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네요.
다만 교육연대는 달라졌습니다.
23연대였다가 28연대인가? 연대가 바뀌었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면 굳이 추가 교육은 받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기억이 나는 것은 논산은 각종 병과들이 입영을 하죠
논산훈련소에 경찰대 애들도 입영했는데 기초군사훈련 받으러 온거죠.
당시엔 전투경찰이란 제도가 있었는데 시위대 진압을 목적으로 말이죠.
논산에서 줄 세워서 전투경찰을 차출했습니다.
교육연대는 당연히 구분했겠지만 전경이랑 경찰대 애들이랑 같은 교육을 받은거죠.
또 기억 나는 것이 박격포로 빠진 애들입니다.
박격포 주특기 애들은 논산조교들도 특별하게 챙겨주더군요.
즉, 갈구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논산훈련소에서 8주간 구르고 뛰고 총 닦고, 야밤에 논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평택역으로 이동했습니다.
3탄
불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야밤에 논산역에서 열차타고 평택역에 도착했습니다.
훈련소에서 자대 배치 대기하면서 다들 느낄테지만
내가 모르는 어디로 내 자신이 어데로 팔려나가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 공포감은 말할수 없을것입니다,
카투사들이 이런말 하면 비웃는 분들이 많겠죠.
당시에는 철없는 시절이라 까짓껏 머가 두렵냐 이 정도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예측하기 조차 어려운 알수없는 공간과 시간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한국군에서 자대배치 받는 사람은 더더욱 그렇겠지요.
훈련소에서 훈련병 딱지를 떼고 이등병으로 자대배치 받는 그날은 평생 기억으로 잊혀지지 않을겁니다.
평택역에 도착하는 날은 카투사들은 한국군에서 미군으로 전속받는 날이기도 합니다.
미군지휘체계로 들어가는 날이죠.
이게 자대배치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또다른 교육과정이죠.
평택역에 오니 카투사교관들, 미군교관들, 카투사교육대장, 카투사교육대 퍼슷서전, 한국군인사과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투사교관의 인솔 하에 대오를 맞춰 버스를 타고 곧장 평택에 있는 미군기지로 향했죠.
미군기지 안에 있는 카투사교육대에 도착하니
정신차리라는 의미로 열심히 얼차려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굴렀는지 모릅니다.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이리 굴리고...
10월달에 입영을 해서 12월 말에 그 추운날에 바닥에 굴렀습니다.
얼굴에 흐르는 땀이랑 콧물이랑 눈물이랑 뒤범벅이 되어
열심히 굴렀습니다.
미군교관들은 그냥 카투사교관들이 하는대로 냅둡니다.
카투사교관들이 알아서 잘 하니까요... 말도 안 통하는데 미군교관들이 왜 있나 싶을 정도인데
카투사교관들은 한국군입니다. 카투사 출신 병사이고 말이죠.
암튼 자정이 넘어서 교육반, 숙소 등등 배정받고 잤습니다.
카투사교육대는 중대규모이고 교육대장은 미국 대위, 한국군인사과장은 한국군 대위입니다.
교육프로그램이 잘 만들어져있었고 반별로 미국인 민간인 선생님이 계셨고
실제 훈련병통제는 카투사교관과 미군교관이 했으며 미군 제식교육은 교관이 교육을 해주었습니다.
영어학습시간이 절반, 제식교육이 절반으로 기억이 되네요.
거기서 1달인가?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1달 정도 교육을 받고 영어시험을 치고 시험성적에 따라 자대배치를 받습니다.
한국군에서 8주간 교육, 미군에서 4주간 교육, 그리고 자대 배치...
카투사교육대는 30년전에는 평택에 있다가 몇년 뒤에 의정부로 이사를 갔다고 하지요.
그러다가 다시 평택으로 되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평택에 있다고 하는군요
당시 카투사 교관은 하사관이 없었습니다. 대부분 상병, 병장이고 미군교관은 하사, 중사도 있었으니
계급적으로 카투사교관은 미군교관의 지시를 받아야했죠.
그런데 미군교관들은 아시다시피 한국말 잘 모르고 하니 대부분 카투사교관에게 일을 맡깁니다.
카투사교관들은 서울, 지방 등등 각급 자대에서 있는 카투사들 상병 중에서 다시 차출해서 카투사교관으로 오게끔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최근에 카투사교관에 한국군 단기하사관 카투사교관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4탄
평택 카투사교육대 시절은 정말 군생활 중 제일 좋앗던거 같습니다.
카투사교관들에게 갈굼을 당하면서도 같은 동기들 간에 재밋게 지냈죠.
저 교관시키 우리 학교 후배인데 군생활 끝나고 한번 보자! 다들 이러면서 씩 웃고들 했죠
우리나라가 동네가 좁습니다. 이래저래 다 얽혀있죠
인맥사회라고들 하는데 괜한 말이 아니죠
평택 카투사 교육대 생활이 끝나가면서 슬금슬금 자대배치가 다가옵니다.
카투사는 용산 카투사 이남, 의정부 카투사 이북으로 나뉘게 되죠
우리 때에는 동기생들 중 50% 이상이 의정부 카투사 이북으로 갔고
50%는 용산 카투사 이남으로 갔었는데
이게 성적을 기준으로 나눈다고들 하지만 부모의 입김도 상당히 작용을 했었습니다.
성적이 낮은 놈들도 용산으로 잘들 빠져나갔지요.
신의 아들, 어둠의 자식들이 카투사에도 존재했었습니다.
저는 어둠의 자식에 속합니다.
의정부 이북 카투사는 일단 2사단, 웨스턴 코리도, 의정부 지역으로 빠집니다.
웨스턴 코리도에 미군부대가 많았죠.
503, 506보병대대는 공포였고요.
알보병 부대인데 신병이 손목에 칼을 그어 자살시도 하는 애들이 가끔 나오기도 했었습니다.
서울대 출신들도 알보병 부대로 빠지는 애들이 있었습니다.
휴전선에서 즉각 전쟁이 발발하면 503, 506 대대가 즉각 피해를 받는데
이것이 바로 미군의 전쟁자동개입으로 이어집니다.
인계철선이란 말이 이것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키가 큰 애들은 성적이 좋아도 JSA로 빠지기도 했고 서울대 경제학과 나온 놈도 JSA로 빠지기도 했습니다.
JSA는 빡세죠. 군기 살벌하고요. 거기는 카투사로 부르지 않고 한국군으로 불렀습니다.
용산으로 빠진 카투사들은 일명 카투리로~ 카투리 사냥을 나가자~ 흥얼거리기도 했습니다.
암튼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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