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해병.
난 97X기이다. 대한민국해병대 97X기. 97X기이면 지금 상말이다. 한참 애들 갈굴 때지… 다시 말하자면 지금 군인이란 말이다. 근데 난 사회인이다. 군인이 아니다. 사회인이다.
사람들이 흔히 “의가사 제대”라고 말한다. 군복무 중에 다쳐서 군생활이 힘들다 판단되어 전역을 할 때 흔히 이 “의가사 제대”라는 말을 쓴다. 근데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의가사제대는 죽었을 때나 하는 말이고, 나같이 죽지는 않고 많이 다쳐서 전역한 사람들에게는 “의병전역”이라는 말을 쓴다.
난 의병전역을 했다. 어디서 근무했는지, 뭘하다 그랬는지는 밝히지 않겠다. 지금 그때 나와 관련된 한 선임이 미칠듯이 괴로워하기에… 아무튼 난 일병때 전역을 했다. 18기수나 차이나는 한 체질선임이 나에게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엄청 갈굼 당하고 맞았다. 자기 밑에 애들 다 놔두고 꼭 나였다. 근무를 설 때면 정말 죽고싶다는 생각을 뛰어넘어 그 선임을 죽여버리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쨌든 9백자 후반 치고는 드물게 파리도 많이 먹어봤고, 좀 많이 맞은 편이다. 그렇게 군생활 하다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몸이 많이 다쳤고, 지금은 사회인이 되었다. 현재 국가유공자 6급인데, 국가유공자분들은 알 것이다. 6급이 어떤지… 사회생활? 힘들다. 절대 원활할 수 없다.
나는 예비역이 아니다. 2국민역이다. 나도 아직 이것이 뭔지 잘은 모르지만, 예비군훈련은 커녕, 민방위 훈련조차 없다. 예비역 막내뻘 되시는 분들은 예비군 훈련이 너무 싫다고들 하신다. 몇몇 선임들은 육군 전투복 빌려입고 가신다고 한다. 하지만 난, 그런 곳에 가서 쳐 맞아도 좋으니 선임들 보고 당당히 필승을 때리고 싶다. 후회된다. 그때 그렇게 전역한 것이.
난 5초경례밖에 모른다. 필승 수고하십니다? 이런거 해본적도 없다. 지단? 모른다. 왕관같은거 머리에 걸쳐보지도 못했다. 다림질? 절대 알 수가 없다. 기습복 다리는게 그렇게 좆같다던데. 앨범작업? 앨범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나에게 남은거라곤, 위로휴가때 파왔던 명찰 몇 개와, 훈련나가서 찍은 이빨사진 서너장, 그리고 일병계급장이 달린 어설프게 전화카드를 오려붙인 팔각모와 일병 계급장이 달린 A급 전투복 한벌, 징밖는다고 선임이 바꿔치기 해간, 실수로 구두약으로 쎄무부분을 문질렀던 워커 한 켤레. 난 이게 다다.
사람들이 그런다. 니가 무슨 해병대냐고. 군생활 1년 해놓고 무슨 해병대냐고… 이때마다 가슴이 메어진다. 이럴바엔 해병대를 선택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연히 알게 된 7백자 선임이 나에게 그랬다. 넌 전우회 가도 받아주지도 않을걸?? 살면서 이날처럼 우울했던 날이 없었다. 근데 나도 그럴 것 같다. 나같은놈, 절대 자랑스러울 일 없겠지.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절름발이를 누가 받아줄까.
한 육군출신 형이 나에게 그런다. 너 어디가서 해병대 출신이라고 하지마라고. 그래. 내가 무슨 해병이냐. 내가 뭘 알겠냐. 내가 군생활에 대해 뭘 알겠냐고.
중도 하차해서 그런지 몰라도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해병의 긍지가 다른 예비역보다 더 세다.
최근들어 팔각모사나이를 마음속으로 외우는게 버릇이 되었고, 심심하면 선임들 기수를 중얼거려본다. 그러면서도 어디가면 해병이라고 섣불리 말하기 어렵다. 왜냐면 난 반쪽해병이니까. 두렵다. 겁난다. 비웃을까봐. 놀림거리가 될까봐. 세상에서 대통령 다음으로 높다는 해병병장 한번 해보지 못한 내가 과연 그들과 즐겁게 군시절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난 맨날 쳐맞던 기억밖에는 없는데…
칼같이 다린 휴가복을 입은 해병들을 봐도 난 멋지게 “몇기냐!”하며 물어볼 수 없다. 날 우습게 볼까봐. 그리고 그들이 만약 그런 행동을 했을 때,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 질까봐. 선임 눈 5초이상 쳐다보면 안된다고 배웠는데, 어느새 난 내 후임들 눈을 5초는 커녕 1초도 쳐다보지 못한다. 바보가 되어버렸다.
오늘 출근중에 내 옆을 스쳐지나가던, 얼굴이 유난히 새까만 한 해병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제발 다치지만 말라고. 좆같으면 선임 면상 한방 갈기고 영창 가. 탈영 해. 근데, 다치치만 말라고. 제발.
도중에 하차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해병 선임들과 후임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똑바로 하겠습니다.
필12345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