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미워와츄리해님.
그나저나 닉이 참 어려워서 그냥은 못옮기고 CRTL + C 키를 이용해야만 하네요.
저는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나고 자랐고, 광주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했고 대학교까지
계속해서 이곳에서 자랐습니다.
전남 광주시가 광주광역시가 되고, 국민학교가 초등학교가 되었고
광주-대구간 고속도로도 이제 편도 2차로가 되었네요.
초등학교 5학년 가을소풍이 있던 날입니다.
대통령이 총 맞아 죽었답니다.
그 설레이던 소풍은 안가도 모두 교실에 앉아 있었고
울지 않으면 완전히 이상한 분위기가 되어서 억지로 눈을 안깜박거려서
눈물을 흘린 기억이 납니다. (이는 37년 뒤 누군가 패러디 하더군요.)
6학년이 된 1년 뒤 5월 어느날,
학교에 갔는데 교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지금 미공개영상이라며 언론에 나오는 영상들 충격적이시죠?
그런데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의 눈에 기억된 무서운 장면들은
아직까지도 등장하지 않고 있네요.
당시 부친께서는 아시아자동차 (지금의 기아자동차)에 다니셨고
우리집도 그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 동네가 광천동이라는 곳인데
지금은 버스터미널 등이 들어서서 완전히 딴 동네 되었지만
당시만해도 아주 변두리에 속했습니다.
우리집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한옥 (지금 생각하면 폐가 같음)이 있었고
그곳에서 학생들이 유인물을 찍어냈습니다.
아무리 난리통이어도 동네에서 놀던 우리는 그 유인물들을 막 주워 읽었고
지금도 생각나는 가장 아래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일성은 오판말라. 반공전선 이상없다."
이 기억은 제가 나중에 대학에 가서 5.18에 대해 이야기 할 때에도
꼭 등장합니다. 아무리 가져다 붙여도 북한의 소행은 아니죠.
그렇게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은 전남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87학번으로.
5월이 되자 학교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여학생들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고 모두 바지와 운동화.
학교내 보도블럭은 멀쩡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공부하는 학교 도서관 열람실 안으로 사복들의 사과탄이 던져졌고
학교 어디에도 3명 이상만 모여 있으면 사과탄이 날아왔습니다.
6월 항쟁.
이 때는 모두 거리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렇게 직선제가 쟁취되고
우리는 세상이 바뀌리라는 것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는 모두들 아시는 이야기이기에 생략......
당시 대학교는 교련이라는 군사교육을 받았고, 1주일씩 군부대에
입소해서 병영집체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는 나중에 군복무시
한번에 45일씩 복무기간을 단축시켜주는 당근으로 제공되었죠.
1학년 때에는 광주에 있는 향토사단에서 1주일을 보냈고,
2학년 때에는 28사단으로 병영집체훈련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사회적 이슈가 반전, 반핵, 양키 고 홈.
결국 우리는 연천까지 가서 칩체훈련 입소거부를 하고
기차를 돌려 다시 내려오게 됩니다.
이 일은 제가 바로 그해 현역으로 28사단에 배치되면서
신병대부터 갈굼을 당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경기도 연천 28사단에서 폭파 주특기로 복부하였습니다.
처음에 많이 맞았습니다.
왜 맞는지도 모르고 그냥 맞았습니다.
신병들은 원래 맞는줄 알았습니다.
손바닥을 펴라고 해서 폈는데 담배를 손바닥에 끄려고 하길래
손을 피했더니 그랬다고 맞은 것이 가장 억울했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 입니다.
지역에 대한 차별.
과연 군대에서 지역에 대한 차별을 받았는가 물어보면
단 1%도 그런 사실이 없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상병인가 병장인가 싶은 그 정도에 TV에서는
주부가요열창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고
한번은 광주-대구 지역 대결이 있었습니다.
내무반에서는 전라도 깽깽이들, 경상도 보리들 모두 모여서
지역 응원을 했고, 만약 우리가 지면 니네들은 전부 줄빳다야
외쳐댔지만 그것은 분명한 장난이었고 누구에게도 장난이었습니다.
그래서 말 할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 지역감정을 느껴보았느냐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그런건 전현 없었다 말 할 수 있습니다.
졸업 후 첫 직장생활은 경기도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여기서는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기분나쁜 경험이 있습니다.
관리자들이 아니라 생산직 사람들로부터요.
회식자리에서도 대놓고 전라도 출신이라는 표현을 하더군요.
그러나 저는 물론이고 나중에 동향인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어봐도
대구나 경상도 사람들을 막연하게 지역적인 이유로 싫어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도 대구나 경북라는 말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덥다." "달성공단" 이런 것들이지 어떤 나쁜 감정들은 없습니다.
몇일 전에 그 쪽에 갈 일이 있었는데 선거 플랑카드에 503 사진이
있는 것을 보고도 그냥 추억찾기 하듯 웃음이 나왔을 뿐입니다.
저는 전라도에서 태어났고 자랐고 지금도 생활하고 있습니다.
전라도에서 태어났지만 결혼하여 경남에서 거주하시는 큰아버지는
지금도 김대중은 빨갱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문제삼거나 틀린 말이라고 답하지도 않습니다.
모두의 생각은 자신의 근거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니까요.
선거때면 이쪽에서 몰표가 나온다는 말들을 많이들 하십니다.
적어도 저나 제 주변은 선거때 누구를 찍겠다는 말 안합니다.
지난번 노무현 대통령 당선되었을 때에도 18시에 출구조사가 발표될 때
노무현이 유력하다는 보도에 서로 환호하는 것을 보면서
"아, 저사람도 나처럼 노무현을 지지하고 있었구나."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번에는 이용섭 광주시장이 당선되었습니다. 물론 민주당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민주당 공천이 없었어도 당연히 당선되었을겁니다.
그렇게 유력한 분들이 민주당 표시를 달고 나온 것이지, 민주당이기에
무조건 찍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나가는 강아지한테 민주당 공천주면 당선되는 곳 아닙니다.
지나가는 강아지한테 공천주면 공천준 사람을 밀어낼 그런 분위기입니다.
권은희, 천정배 등 많은 분들이 알고계실 그런 사람들.
그들이 변절하면 가차없이 등을 돌리는 것이 이곳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이야기들을 서로 공유하지 않습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정치 이야기들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사전투표율이 전남, 광주가 가장 높다는 뉴스의 댓글에는
저렇게 높아도 어차피 몰표이므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 다수더군요.
여기 사람들 그런 것 없습니다.
오죽하면 지금 대학생인 우리 딸이 사전투표 전날 제게 물어오더군요.
아빠, 나 도저히 누구를 찍어야할지 모르겠어,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제가 누구를 찍으라고 말할 수도 없죠.
저 : 그냥 사람은 네가 보고 판단해, 아빠는 전과기록은 꼭 보거든.
나도 네가 그것은 꼭 판단하는데 반영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네가 물어봐서 하는 말인데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정의당 찍었으면 좋겠어.
우리 딸분 : 정의당? 그런것도 있어?
저 : 심상정, 노회찬 이름들 들어보지 않았니?
우리 딸분 : 그게 정의당이야? 나 완전 좋아해.
이런 것이 실제 우리 집에서 일어난 리얼리티 100%의 대화입니다.
다음날은 "아빠, 나 투표했다."라면서 얼굴에다가 선거도장 찍은
인증샷을 보내오길래 "잘했다. 내딸. 너희들이 살아갈 세상이잖아." 했을뿐
누구를 찍었느냐는 질문 자체가 없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갑니다. 제가 어찌 다 알겠습니까만
적어도 제가 알고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습니다.
누구도 대구-경북이라는 이유로 싫어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싫어하지만 지역적인 이유로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너미워와츄리해님의 글에 참으로 고마움을 느끼면서
이곳에 사는 사람으로서 글을 드림으로 답례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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