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nci의 비행체(ornithopter)가 제시된 후 한 동안은 항공기 개발의 청체기였다. 그리고 18C초부터 사람들은 기구의 개발에 힘을 쓰기 시작했다. Davinci가 나는 비행체보다 뜨는 비행체가 먼저 개발된 것은 "기초적인 것이다"라는 점에서 설명이 될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최초의 기구학자를 Montgolfier 형제로 아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역사적인 자료에 의하면 그들보다 74년 먼저 브라질의 성직자인 Bartolomeu de Gusmao가 기구를 뛰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후 본격적인 열기구 실험을 한 사람이 바로 앞서말한 Montgolfier형제이다. 그리고 그들보다 약간 늦게 시작한 J.A.C charlesry수 역시 그의 수소기구로 여러번 비행을 해 냄으로써 Montgolfier의 열기구를 조만간 대신하게 되었다. 1783년 이후 기구에 변화가 왔다. 즉, 유선형의 기구에 동력장치와 프로펠러가 부착된 비행선의 출현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단순히 공기중에 뜨기만하고 바람에 영향을 받는 기구에 싫증을 느꼈던 것이다. 비행선의 최초 비행은 1852년 9월 24일 프랑스의 Henri Giffard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Giffard이후 실험에 주력했던 인물로는 프랑스의 공병장교 였던 Charles Renard와 Arthur Kreds가 있다. 특히 Renard와 Kreds의 여러 비행중에 1884년 8월 9일의 비행은 그 규모에 있어 무척 방대하여 유명하게 되었다. 그 뒤 한 동안은 비행선이 사람들의 비행을 주도해 나갔다. 하지만 날으는 비행기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특히 그들 중 몇몇은 앞선 이론과 훌륭한 업적으로 칭송을 받는 데 바로 George Cayley경이나 Nicholas Otto가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의 주된 활동을 살펴보면, 먼저 Cayley는 최초로 비행원리를 과학적으로 규명하여 정립해 놓았는데 특히 Cayley의 비행이론은 오늘날 그대로 적용될 정도로 정확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비행기에 꼬리날개를 붙여 조종이 편리하게 했다는 점 등이 주요 업적이다. Cayley보다 좀 늦은 시대인물인 Nicholas Otto는 비해기 보단 동력장치에 더 노력을 기울인 편인데 1876년에 밝힌 내연기관의 4행정이론 역시 오늘날 많은 피스톤 엔진의 작동원리가 되고 있다. 인간이 기구비행과 비행선을 개발해 내고 한참이 지난 후에 앞서 말한 사람들의 연구가 있었지만 이 사실은 뜨는 비행체에서 날으는 비행체로의 변환을 의미하기에 더 중요하다 할수 있을 것이다. Cayley나 Otto가 비행기(날을 수 있는)의 개발에 힘 쓰는 동안 거의 같은 시대에 자유비행 즉 활공에 힘쓴 인물들이 있다. 독일의 Otto Lilienthal과 그의 제자인 영국의 Percy Pilcher,그리고 미국인 기술자 Octave chanute가 그들이다. 특히 앞의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로써 많은 활공을 해냈다.그들의 글라이더는 오늘날의 행글라이더와 외형도 비슷하고 조종원리도 비슷하였지만 이론과 기술의 부족으로 안타깝게 둘다 추락, 사망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활공이론 중 일부분은 후세 항공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에 비하여 미국인 Chanute는 비행대신 설계에 주력한 사람인데 그는 여러 곳에서 모은 자료 등을 가지고 「Progress in Flying Machines」라는 잡지를 펴내기도 했으며 Lilienthal의 글라이더를 보완하여 모범적인 글라이더로 개발시키기도 했다.
비행역사의 시작
옛 그리스 신화에는 "이카로스"라는 신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이미 기원전에 manlifting kite가 구상 되엇다는 자료가 전해진다. 따라서 이런 내용들로 추측하건데 인간은 이미 기원전부터 비행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최초의 과학적인 연구는 15C에 Leonardo Davinci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사실 Davinci의 연구는 그 방법적인 면에서 상다히 과학적이고 실제적이었다. 그는 새의 날개부분을 수 차례 해부하고 관찰한 후에 ornithopter를 고안해 냈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ornithopter는 이론과 실제의 차이 때문에 도구화 되지는 못했다.
사람들이 동력비행에 관심을 가진 것은 Cayley시대부터 였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누구나 알고 있는 Wright형제이다.여기서 마지막이란 말은 동력비행이 Wright형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여튼 Wright형제가 완벽한 동력비행의 장을 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보다 앞서 많은 사람들의 연구와 실험비행이 있었음 은 부인 할 수 없다 미국인 Samuel Pierpont Langley 역시 그런 사람들중의 하나인데, 그가 동료인 Charles Manley와 제작한 Aerodrome은 상당히 발전된 형식의 비행기였다. 5기통 radial엔진을 최초로 사용한 비행기였지만 이러한 잇점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비행(1903년 10월 7일, 12월 8일)이 모두 실패하여 추락하고 말았다. 그 후, Laugley와 Mauley의 실험결과나 자료를 보은 Wjright 형제는 여러 앞선 항공개척자들로부터 후원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의 연구도 활발했지만.... 하여튼 Langley의 비행이 실패하고 불과 이주일이 못된 12월 17일, Wright 형제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동력비행을 해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Wright 형제의 비행이 유럽에서도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다. 의외로 유럽의 애국적인 비행 연구가들은 Wright 형제의 동력비행 연구를 인정하기 보다는 그것을 자극제로 삼아 독자적인 비행기 연구를 하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불란서에서 연구가 활발하였다. 1906년 10월에 파리에서 Santos Dumont라는 사람이 유럽최초의 동력비행을 한 것이 그 증거이다. 때문에 유럽인들은 Wright 형제의 비행보다는 Santos Dumont의 것에 더 가치를 두었다. 하지만 그 성과면에서 보면 Santos 의 실험은 Wright의 형제의 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Wright형제의 Flyer 1호가 비행에 성공하고 또 Santos가 비행을 성공함으로써 이제 사람들은 비행을 그리 어렵게만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리고 각국의 비행 연구가들은 정확한 기준이나 경험이 없으면서도 독자적인 비행체 개발에 참여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당시 (1906년 이후)나온 비행기를 보녀 전부 다른 형태의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주시해야 할 기종은 Voisin형제와 Louis Bleriot 그리고 Henri Farman등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인데 특히 Bleriot단엽기는 최초의 도버해협횡단(1908년 7월 25일)과 수 차례의 중요한 비행들 「알프스 정상비행(1910년 9월 23일), 런던 파리간 무착륙비행(1911년 4월 12일)등」을 해냄으로써 어느 정도 가치를 인정 받았지만 그 자체의 효율상의 문제 때문에 많은 분야에서 사용되진 못했다. 기록수립을 위한 질주 대중 문화 속에 기틀을 잡지 못하고 있떤 항공산업에 촉매 역할을 했던 회사가 있었다. Daily Mail신문사는 유럽에서 최초의 동력비행이 시작될 무렵부터 새로운 기록수립에 대한 실질적 보상을 지급하면서 항공 붐을 조성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다. Daily Mail신문사의 항공산업 발전을 위한 이 같은 공공 봉사정신은 후대의 항공 산업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Daily Mail사의 역학과 각국 정부의 항공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은 무수히 많은 진기록의 수립이라는 결실을 맺게 하였다. 괄목할 만한 것은 Vicker's Vimy (조종사:Brolwn & Alock)와 Sprit of St.Luis(조종사:Lindbergh)라는 비행기에 의한 북대서양의 횡단이었다. 특히, Sprit of St.Luis의 조종사였던 Charle's Lindbergh는 33시간 39분 동안에 최초 nonstop(무착륙)단독비행을 무사히 성공함으로써 항공수송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1927년 5월 19일 7시 52분 린드버그는 2750 파운드의 연료와 약간의 식량을 가지고 대서양 횡단을 위하여 루즈벨트 비행장을 이륙 했다. 처음 비행을 시작한 Cape Cod와 Nova Scotia 간의 일기는 맑았다. Nova Scotia로부터 Newfoundland 까지 바다는 빙산으로 되어 있었고 그는 해변을 따라 비행했다. 저녁이 되자 어두워 지기 시작하였으며 안개가 진해졌고 검은 구름으로 둘러싸졌다. 달이 떠오른 후에야 비행이 쉬워졌다. 그는 계기를 사용 하였지만 종종 항로를 잃었다. 비행하면서 졸음이 밀려왔다. 사실 비행하면서 그에게 가장 큰 적은 졸음이었다. 꼬집고 물도 마시고 눈도 비비고 그렇게 하면서 시간이 지나갔다.. 23시간이 지났을 때 그는 수평선 너머로 해안선을 보았다. 또 돌고래 어선도 보았다. 한 시간이 지나서 그는 흐릿한 아일랜드 Ireland의 해안선을 보았고 영국을 통과해서 해가 질 무렵에야 그는 런던 - 파리 구간을 비행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파리의 등불을 보았다. 그는 에펠탑을 한바퀴 선회 하고서 Le Bourget 비행장으로 향했다. 비행은 끝났다. 그는 3600 마일을 33시간 31분만에 비행 하였고 85 Gallon의 연료가 남아 있었다.비행기가 착륙하자 수천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린드버그를 조종석에서 끌어내어 치켜 올리기 시작 했다. 그가 대서양 횡단을 성공한데에 무엇보다 큰 이유는 비행기 무게였다. 다른 비행사들은 비행기도 크고 혼자만 간 것이 아니라 몇 명씩 떼지어 갔다. 하지만 린드버그는 비행기도 작고 혼자만 갔고 연료를 많이 가져가기 위해 낙하산도 가져가지 않았다. 횡단 성공후에 미국 신문들은 그에게 The Lone Eagle 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뉴욕과 파리를 연결했던 이 비행에서 Llindbergh에게 가장 큰 고통은 33시간 31분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라하니 진 기록속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그의 불굴의 의지와 용기에 의해서 이룩된 이 비행은 훗날 미국 국내 항로 발전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제 1차 세계대전과 항공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활발한 연구가 있었음에도 비행기를 정찰이외의 군사적인 목적에서 사용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앗따. 단 독일의 경우를 제외하곤..... 1차 세계대전 발생 당시 독일군은 상당한 수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합군 역시 항공기 수는 독일군 못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연합군의 항공기 사용이 독일군보다 비효율적이었다는 점이다. 이제부터 1차 세계대전 중의 정찰기, 전투기, 폭격기 등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정찰기의 경우, 사람들은 무척 오래전부터 정찰 목적에는 눈을 떴었기 때문에 1차 대전 중의 양측 정찰기 사용은 별로차이가 없었다. 사실 연합군의 정찰기가 제 임무를 수행치 못했더라면 1차대전은 독일군의 승리로 돌아가고 아마도 세계사에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정찰기를 이용하게 됨으로서 전쟁이 길어지자 차츰 공격용 항공기를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 전투기가 등장하게 된 이유는 상대방 정찰기를 막는데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점점 그 역할이 커져 지상공격용이나 공중전용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찰기에서는 서로 균등했던 독일과 연합군이 전투기에서는 독일쪽이 우세했다. 그 이유는 네덜란드인인 Fokker에 의해 만들어진 Fokker전투기에 있었다. Fokker기는 그 당시 전투기에 기관총을 부착하는데 문제가 되었던 프로펠라와 기관총의 위치 문제를 시간 단속 기어를 사용함으로서 해결한, 그 당시 최고 성능의 전투기였다. 이에 반해 연합군측의 전투기 WW시리즈 등은 그 성능면에서 독일의 Fokker기를 따르지 못했다. 전투기에 관심을 두면서 동시에 사람들은 폭격기의 개발에도 힘을 썼다.연합군측의 폭격기로는 Handley Page나 Vickers Vimy등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 주종을 이루는 데 독일군측의 Zepplin비행선 폭격보다는 그 성능이 우수했고 또 Zepplin이 연합군 전투기들에 의해 자취를 감추게 되자 독일군에는 그나마 폭격기가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 당시 일어난 공중전은 가장 힘들면서도 가장 재미있는(?) 전투 였을 것이다. 요즘처럼 적도 않보이는데 미사일만 쏘고 튀는 전투가 아니라 적과 수백에서 수십미터를 사이에 두고 총을 쏴 대던 전투이다. 하지만 조종사위치가 가운데 이고 비행기 위로 돌출된 부위가 머리 부분이라서 운이 나쁘면 험하게 죽을수도 있었다. 여기선 간단히 그 때 사용된 주력기종과 내가 존경하는 에이스(Ace) 레드바론을 소개한다. 주력기종 Sopwith F-1 "Camel" Sopwith Camel은 세계 1차 대전 중에 가장 효율적인 전투기 중의 하나 였다. 이 비행기는 다른 나라의 어떤 비행기 보다도 많은 비행기를 격추 시켰다. 그러나 이 비행기의 특이한 조종 방식 때문에 연습 중에 죽은 사람이 전투 중에 죽은 사람보다 많았다. 이 비행기는 영국에서 제작 되고 1917년 7월에 왕립 비행대와 함께 전장에 배치되었다. 엄청난 훈련을 받은 조종사 때문에 기동성이 좋았고 3600m의 높은 비행 고도로 쉽게 격추 당하긴 힘들었다. 5490여 대의 캐멀 기가 제작되었으나 극히 소수만이 지금까지 남는다.
Fokker Dr. I 전쟁기간 중에 Fokker Dr. I의 무서움을 모르는 연합군 조종사는 없었다. 특히 1차 대전의 전설의 에이스인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이 타던 비행기였기에 그것은 더 심했다. 포커기는 연합군의 Sopwith Camel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1917년 서부 전선에 처음으로 배치되었으며 많은 조종사들은 이 비행기의 기동성에 대해 매우 놀라워 했다. 그리고 곧 연이은 승전보가 밀려들어왔다. 위에서 말했던 리히트호펜의 21번의 승리 중에서 19번이 이 비행기로 이루어졌다. 320여기의 포커기가 제작되었다. 하지만 진짜 포커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최초의 동력비행
여객기의 발달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기 전부터 이미 비행선은 장거리 운송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전후 최초 비행선에 의한 운송은 1919년 7월 2일과 6일 사이에 북대서양을 횡단했던 R-34에 의해서 새롭게 출발되었고 뒤를 이어 여러 나라에서 비행선의 운용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장본인으로 전재엥 패하면서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항공 산업 분야만 보더라도 Versailes조약에 위해 항공기 제작이 사실상 금지된 실정이었다. 그러나 Zepplin의 뒤를 이은 Eckner은 국제 상황에 대처하면서 항공회사를 운영하기 싲가했다. Eckner은 우선 미국에 대한 보상의 일환으로 Lz126(Uss Los ANgeles)을 제작,폐기 도기 전까지 미국 해군운송에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Lz126의 성공은 그 뒤 세계에서 가장 큰 비행선인 Graf Zeppelin을 탄생시켰다. Graf Zeppelin은 길이 245m,직경 41m의 초대형 비행선으로, 1928년 최초 비행을 시작하여 폐기된 1940년 동안에 17178비행시간, 600회의 비행, 140회의 북 대서양 횡단 등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Graf Zeppelin의 뒤를 이은 Hindhberg는 시험 비행중에 97명의 승객중 54명이 사망한 대형 사로를 불러 일으켰으며, 이 영향으로 독일의 비행선 개발은 여기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영국은 R-34다음으로 R-100과 R-101같은 거대한 비행선을 제작하였다.R-100의 시험비행은 카나다로의 왕복 비행이었으며 그 당시로서는 커다란 성공을 보았다.그러나 R-101은 인디아행 왕복 비행도중에 추락하여 54명의 승객중 48명의 생명을 앗아갔고, 그 충격으로 R-100의 비행도 금지 되엇으며 마침내는 폐기되어 버렸다.
미국의 경우에는 민간 운송보다는 군수송용으로 육군과 해군에서 비행선이 사용되었다.대표적인 것은 독일에서 만들어져 미 해군의 수송을 담당했던 Lz-126과 미국에서 제작된 Uss Akron과 Uss Macon이었다.그러나, Lz-126을 제외한 나머지 두 비행선은 각각 193년과 1935년에 바다에 침몰하였고 이로써 미국도 역시 비행선 개발계획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앞에서 본 3국의 경우에 거대한 비행선의 사고로 비행선 개발 계획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이 공통점으로 지적되었다. 물론 대형사고 였기 때문에 정부 당국이나 국민에게 준 충격은 컸겠지만, 정책의 꾸준한 일관성이 부족했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그 다음은 비행기의 시대이다.
최초의 여객기는 러시아의 볼쇼이 발티스티라는 비행기이다. 이 비행기는 승무원이 2명 승객 7명을 태울 수 있었다. 또 요즘과는 다르게 비행기 앞에 전망을 볼 수 있는 발코니도 설치 하였다. 또 그것을 업그레이드 한 것은 르 그랑이라는 비행기이다. 이 비행기 객실에는 의자, 소파, 화장실, 심지어 난방장치도 있었다.
그런데 이때 비행기들의 모양을 보면 열차 한 칸을 떼어다 붙인 것 같고 라이벌인 비행선에 비해 성능은 형편 없었다.
제 1차 세계 대전 후 비행기 기술은 급격히 발전했다. 각 나라가 폭격기를 만들면서 대형기가 보다 쉽게 운용이 된 것이다. 후에는 독일에서 도니어 코멧기라는 세계 최초의 단엽(날개가 쌍이 아님) 여객기가 나오게 된다. 이 비행기는 전체가 금속으로 되어 있고 조종석도 의자가 쌍인 복좌식이었다. 그래서 승객이 조종사하고 같이 앉을 수도 있었다. 그 후에도 코멧기와 비슷한 포커기가 나왔다. 모양은 거의 코멧 기와 유사했다. 독일에서 이렇게 항공 기술이 발전하자 다른 나라도 자극을 받아 서로 개발에 몰두 했다
제트기의 출현
1960 년대에 접어들면서 항공수요는 다소 침체 기미를 보였으나 1957년부터 도입된 제트기의 출현으로 새로운 고속 항공수송 시대가 개막되었으며, 세계적인 경기호황까지 겹쳐서 전세계적으로 항공수송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제트기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터보프롭기로서 Vickers Vicount 를 비롯하여 Bristol Britannia, F-27 등 많은 기종이 개발되었다.
다른 하나는 터보제트기로서 보잉사의 B-707, 더글라스사의 DC-8, 록히드사의 CV-880, 프랑스의 Caravell, 영국의 Comet 등의 많은 제트기가 민간수송용으로 개발되었다. 제트기의 취항으로 그 대까지 주력기로 사용되었던 DC-7 등 프로펠러기는 단거리용으로 대체되었으며 1958년말부터 세계항공수송은 제트기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기간에 취항한 제트기의 수를 보면 1958년에 불과 15대 밖에 취항하지 않았으나, 1961년에 413대나 취항했으며, 터보프롭기의 경우에는 1961년에 총 718대가 취항함으로써 명실공히 제트기 시대를 장식하였다. 이 기간에 연평균 14% 이상의 항공수요의 성장이 계속 되었으며, 제트기의 출현으로 항공기의 속도도 시속 320Km에서 시속 960Km로 빨라졌다. 특히 1976년의 초음속기인 콩코드의 출현으로 시속 2,160Km까지 빨라졌다. 또한 프로펠러기로부터 제트기로 전환되면서 수송력이 증가됨으로써 단위 운항원가의 저하와 이에 따른 실질적인 항공운임의 저하로 항공수송이 발달 초기에 볼 수 있었던 바와 같이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용하던 시대는 지났고 항공의 대중화가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특히 국제교통분야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다.
음속을 넘어서
비행기가 점점 발전을 거듭하자 사람들은 음속을 넘으려는 욕심을 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많은 사람들이 음속을 넘으려다가 죽었다. 그 이유는 비행기가 튼튼하지 못하여 공중 분해 된 것이다. 탈출을 하려해도 너무 속력이 빨라서 나오기도 쉽지 않았고 나온다 해도 살기는 어려웠다.
나온 순간 인간의 몸은 음속의 속도로 날고 있기 때문에 공기저항으로 인해 내출혈이 생겨 죽는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음속으로 나는 것에 성공했다. 첫 비행기는 X-1이였다. 정식 명칭은 Bell X-1 Glamorous Glennis 이다. X-1은 음속을 넘기 위해 제작된 로켓 추진 형태의 실험용 비행기이다. 이 비행기는 1947년 10월 14일 첫 비행을 했다. X-1는 제대로 된 날개가 없었다. 때문에 스스로 이륙하는 것은 불가능 했다. 그래서 B-29 밑에다 달았다. B-29가 X-1를 아래에 달아서 적당한 고도가 되면 분리를 시킨다. 그러면 이 비행기의 무식하게 큰 엔진이 가속을 한다. 가속시간은 약 5분 정도 였다. 모든 연료를 다 쓰면 조종사는 X-1을 글라이더 식으로 운전해서 착륙했다.
이 비행은 성공하여 X-1는 처음으로 음속을 돌파한 비행기가 되었다. 이 비행에서 Chuck Yeager 라는 사람이 비행기를 조종했다. 이 때까지 음속 비행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 사람이 성공해서 미국의 영웅으로 떠 올랐다. 6년 뒤엔 같은 비행기로 마하 2까지 기록한다. 더 놀라운 것은 퇴역 후에도 계속 전투기를 조종하고 1997년엔 음속 돌파 50주년 기념으로 F-15로 또 음속 돌파했다고 한다.
우주로의 도약
로켓은 11세기 초 중국 시대 부터 발명되어 끝없는 발전을 했다. 이 때는 화살에 불 달린 것 정도 밖에 안 되어서 큰 화력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유럽에는 13세기에 전해져서 미국 독립전쟁 때 영국군에서 로켓 부대가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이 때도 시각효과 이외엔 큰 효과를 기대하긴 힘들었다. 가장 획기적인 발전은 액체 연료 로켓이다. 액체 연료는 고체보다 화력도 더 좋고 부피도 작았다. 맨 처음 실행 시킨 사람은 미국의 고더드라는 사람이었다. 이 때 비행시간 2.5초 높이 13초를 갔다고 한다. 이 때 액체 연료와 액체 산소가 가장 좋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 후에 로켓은 엄청나게 발전하게 된다. 특히 전쟁때문에.. 독일에서 1944년 런던에 V-2로켓을 씀으로서 영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참고로 여기서 V는 보복병기(Vergeltungs waffe)의 머릿글자이다. 그 로켓이 가장 제대로 된 로켓이라고 하겠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의 로켓 과학자들은 미국과 소련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계속 연구를 하여 결국 미국과 소련의 대결로 치닫게 된다.
맨 처음은 소련이 우세했다. 맨 처음으로 우주에 인공위성 '스푸트니크'을 띄우고 유인 우주선도 처음으로 발사했다. 유인 우주선 조종사 이름은 '유리 가가린'이다. 이에 미국은 우주 비행사를 달에 착륙시켰다가 지구로 안전하게 귀환시키는 아폴로 계획을 세워 인류역사상 최초로 달착륙을 하였다. 어쨌든 미국의 달 착륙에는 세턴 5형(Saturn V)라는 로켓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로켓은 당시 과학 기술의 집합체로서 3단 로켓,액체 엔진, 착륙선, 사령실 등등 엄청났다. 여기서 우리는 있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름은 폰 브라운. 독일 사람으로서 V-2로켓에 참여했다가 종전 후에는 미국의 세턴 5형에도 참여했다. 정말 이 사람 없었다면 로켓 기술은 아직도 걸음마일지도 모른다. 세턴 5형 로켓이 뛰어남은 틀림 없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경제성! 한번 띄우면 지구로 다시 돌아오는 것은 조그만 사령선 뿐이었다. 그것도 재활용 못하였다
결국 우주 왕복선이 개발되는 계기가 된다. 1981년 미국 우주 왕복선 컬럼비아호가 지구 궤도에 진입했다.
우주 왕복선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재활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버리는 것도 철 덩어리 뿐, 비싼 기계 부품은 고스란히 가져온다. 이 우주 왕복선도 업그레이드 된다고 한다. 곧 우주 시대가 올 것이다
주요항공기 개발연도
1903년 라이트형제 최초 동력 비행 성공
1907년 헬리콥터 최초 비행
1909년 드하빌랜사, 복엽기개발
1916년 보잉사 설립
1926년 포드 3발기용 엔진개발
1933년 DC-1기 첫공개, 보잉 247개발
1934년 DC-2기 개발
1935년 DC-3기 개발
1937년 VS-17기 개발
1938년 DC-4 처녀비행
1939년 독일 제트기 실험, 시콜스키(sikorsky)
1947년 음속최초 돌파, B-47기 서비스 개시
1948년 미그 15기 개발
1949년 F-86기 서비스 개시
1954년 보잉, 최초 제트기 개발, C-131개발
1955년 U2기 테스트
1958년 F-4 처녀비행, 팬암사보잉707 서비스 개시
1961년 수직 이착륙기 개발
1964년 F111기 생산
1967년 보잉 737기 개발
1972년 F-15 이글 처녀비행
1974년 F-16 처녀비행
1975년 B1폭격기 개발
1977년 A-10 서비스 개시, F-18기 처녀비행
1981년 보잉 767 개발
1982년 Airbus 310 개발
1988년 스텔스기 개발
1989년 B-2 스텔스 폭격기 개발
1995년 보잉 777 개발2007년 에어버스 A380개발
2008년 보잉 787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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