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의 벽>
사랑하는 페친 여러분,
저는 지금 <하일지 미술전람회 제 4부, 미투로 죽은 남자들>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 전람회에서 저는 지금까지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영화감독 김기덕을 추모하는 그림과 글을 올렸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유의 그림들을 계속해서 올리고, 그와 관련한 글을 올릴 계획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과 글을 올리면서 저는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고 놀랐습니다. 관람자 또는 독자들의 생각과 정서가 극단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박원순 시장의 그림을 보고 경기를 일으키듯 싫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슬픔을 느끼기고 하는 것 같습니다. 같은 그림을 두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김기덕 감독을 그린 그림에 대한 반응은 더욱 복잡합니다. 좌우를 떠나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김기덕은 인간성이 나쁘다는 납득할 수 없는 신념을 가지고 나의 그림이나 글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가하면, 박원순을 고은이나 김기덕 같은 인간과 동일 선상에 놓고 말하는 저의 글에 대하여 심한 불쾌감을 느끼는 분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박원순은 “우리나라”이고, 고은이나 김기덕은 “나쁜 나라”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특기할만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는 글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분노하면서 저를 떠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약간 혼란스런 반응들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나름나름의 편견과 소문의 벽에 갇혀서 누군가를 턱없이 지지하고 누군가를 턱없이 미워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말입니다. 가령, “김대중은 간첩이다”라는 소문을 아직도 믿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김대중은 간첩이 아닐 뿐만 아니라 죽는 날까지 존경해야할 위대한 선생님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편견과 소문의 벽에 갇혀 어떤 사람을 존경하기도 하지만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런 속성은 공포스런 마성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어떤 특정 정파나 윤리관에 입각하지 않고 21세기 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위 “미투”에 의해 죽어간 남자들을 추모하고 그들의 억울한 점을 하나라도 밝히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뿐입니다. 문재인을 비판하는 것도 그들의 죽음이 너무 애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원순이나 김기덕이나 3류 소설가, 3류 화가에 지나지 않는 저에게는 살아생전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미숙한 그림과 글이지만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편견 없이 봐 주실 것을 간청드립니다.
하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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