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지역에서 김대중 이라는 정치가는 가히 독보적인 존재임은 부정할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호남민심은 언제부터 김대중 이라는 인물에게 그토록 지지를 하였을까요??
과거를 평가할 때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들여다 보면 큰 오류를 범할수 있다고 생
각합니다. 과거는 과거의 사실에서 현재는 현재의 사실에서 봐야 합니다.
지역감정 조장의 시발점 ??
어찌되었건 김대중 씨의 정치사를 이야기 하려면 1970년 박정희 정권의 반대 세력인
당시 야당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 상황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당시 흐지부지 했던 유진오,유진산 으로 이어지는 야당의 정치적
입지가 약해지자 김영삼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경남과부산 학생권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당시40대 신민당 원내총무인 (당시 대선후보 자격이 되려면 당 원내총무 자리는 기본적으로 하고 나와야 함.김대중 씨는 이런 기본적인 수순없이 대선출마 그 이유가..)
김영삼은 조윤형의원을 통해 40대 기수론에 힘을실어달라고 요청하지만
이에 대해 김대중은 아직은 당내의 형편이 40대 기수론을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성숙되지 않았고 나의 목표는 75년 대통령 선거라면서 지명전 경쟁선언을 거부했다. 조윤형은 71년 대통령 선거에 나설 계획이 없더라도 40대의 도전은 개인의 이해타산을 떠나 젊은 우리들이 함께 쟁취해야 할 高地라고 역설하고 어떤 형태로든지 협조해 줄 것을 권유했으나 김대중은 시간을 두고 연구하자는 말로 거절했다. 김영삼의 40대 기수론은 초기에는 당내에서 외면을 당한 고독한 투쟁이었다.
당내 기류를 예의 주시하던 김대중은 시간이 지날수록 40대 기수론이 호응을 얻자 태도를 돌변, 전당대회 이틀 전인 1970년 1월 24일 뉴 서울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설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김대중이 지명전에 나설용의를 보이자 , 40대 기수중 김영삼 다음으로 당내 입지 및 정치적
입지를 가지고 있던 이철승도 1970년 2월 12일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기로 선언했다. 이로서 이들 40대 3명은 젊은 힘을 과시하며 대통령 후보를 꿈꾸던 유진산 총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신민당은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를 예정된 1970년 6월에서 다시 연기해 9월 29일에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소석 이철승에 대해서 알아보시면 아시겠지만 해방전후사의 그의 경력은 누구못지 않게 화려한 경력을 자랑함.
그래서 당시에 야권에서는 정치적기반이나 입지를 봤을 때 김영삼과이철승의 구도는 부정할수 없는 팩트임.
호남분들이 들으면 기분나쁠지 모르겠지만 당시 김대중은 저 두사람의 정치적입지나 영향력에 크게 못 미쳤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당시 71년 대선후보 경선에 뜻밖에도 김대중 이란 인물이 당선이 됩니다.
이것이 당시 정정 당당하게 경합을 벌여 그런 결과가 나왔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죠..
그런데 참으로 그 내막에는 김대중 씨의 권력욕심이 지나치게 작용했음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들이 밝혀 집니다.
일각에서 이철승이 김대중에게 찾아가 김영삼 타도를 외치며 김대중 세력으로 몰아줬다고 하지만, 사실은 김대중이 이철승을 찾아가 구원을 요청합니다.
유진산은 9월 25일 오전 이철승, 김영삼, 김대중을 자택으로 불러 “내가 출마하지 않을 테니 그 대신 나에게 후보 지명권을 일임해 달라”고 제의했다. 유진산으로부터 별도로 후보 지명 언질을 받은 바 있는 이철승과 김영삼은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지자들과 상의할 시간을 달라고 한 김대중은 오후 1시 30분에 ‘6인 지명단’에 추천권을 위임하겠다는 대안을 냄으로써 사실상 이 제안을 거부했다.
9월 27일 김영삼과 이철승은 그랜드 호텔에서 유진산 총재가 내민 메모지 서약서에 서명했다.
서약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합에 있어 나는 후보 제1 추천권을 유당수에게
맡기고 당수가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을 추천했을 경우에는 나를 지지하는
대의원들과 함께 일체의 난동이나 반란을 하지 않고 당수의 추천에
승복하여 지명대회와 대통령 선거에서 성의를 다할 것을 인격과
신뢰를 걸고 당과 국민에게 서약합니다.
유진산 당수가 누구를 지명할 것인가에 대한 추측과 소문이 난무했다. 유진산은 김영삼과도 이철승과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유진산은 본명이 유영필(柳永弼)로 전라북도 금산(錦山) 출신이었다(행정구획 조정으로 나중에 충청남도가 됨). 자신이 살던 진산면(珍山面)의 지명을 따서 개명을 했고 자신이 살던 마을의 이름을 따서 옥계(玉溪)라는 호를 사용했다. 이철승의 부친은 유진산의 부친과 여수 돌산에서 동업으로 금광업을 했었다. 유진산은 이철승의 숙부 이석주씨와도 절친한 사이로 한국전쟁 때는 이석주씨 집에 피신을 했으며 이철승의 정치 스승이 되기로 약속한 관계이기도 했다. 이런 인연 때문에 진산이 이철승을 후보로 추천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신민당 내 사정에 정확한 사람들은 이 소문을 믿지 않았다. 이철승은 1954년 3대 국회에 진출했었다. 민국당을 중심으로 야권의 여러 정파가 1955년 9월 19일 민주당 창당대회를 열었다. 이때 이철승은 장면 중심의 신참 무소속 그룹인 신파의 일원이었다. 민주당 내부에서 구파와 신파의 갈등은 치열했다. 신익희씨나 조병옥씨가 없었으면 일찌감치 분당할 당이었다. 이철승은 구파의 조직참모인 진산에게 저돌적인 공격을 감행했었다.
이에 비해 같은 민주당 구파출신으로 20년 이상 같은 배를 탄 김영삼 원내총무는 진산에게 무난한 선택이었다. 유진산은 9월 28일 오후 4시 중앙상무위원회에서「나는 당수로서 김영삼 의원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여러분 앞에 추천한다」고 공개 발표했다.
이로서 모든 것은 결정된 것처럼 보였다. 유진산은 당 내 5분의 2를 자파 대의원으로 거느리고 있었으며 서약에 따라 이철승도 김영삼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비주류측에서도 속속 김영삼 지지를 약속하며 당직배분 문제를 제의해오고 있었다. 전당대회는 요식 행위에 불과한 것 같았다. 언론매체도 김영삼의 승리를 확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김대중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날 김대중의 심복인 김상현이 일선에서 발벗고 뛰었다. 김대중 진영은 퇴계로 금수장 호텔에 진을 쳤다. 대의원 9백표 중에서 계산해 본 결과 김대중을 지지할 표는 242표에 지나지 않았다.
참모들은 이철승의 본부를 찾아가 전라도라는 지연을 근거로 김대중 지지를 부탁했다. 그러나 이철승은『정치와 고향선배를 몰라보는 김대중을 지원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 김대중은 이날 밤 청진동 일대 여관에 나뉘어 여장을 풀고 있던 대의원들에게 이희호, 김상현 등을 대동하고 찾아가 일일이 큰절을 한 후 지지를 호소했다. 당시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은 표의 이탈을 막기 위해 각 계보별로 집단투숙을 하면서 다른 계보요원의 침투를 막으려고 파수군까지 세워 두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서슴없이 적진에 뛰어들어 큰 절을 올리며 지지를 호소했다.
이에 앞서 김대중은 지난 8개월 동안 전국의 지구당을 누비며 대의원들을 설득했다. 이러한 강행군으로 조직의 밑바닥을 다졌다. 민주당 신파에 속했던 김대중은 민주당 구파가 주도권을 잡은 신민당에서 비주류에 속했다. 신파 원로인 정일형과 박순천의 지지를 받았으나 열세를 면할 수 없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김대중은 김영삼과는 반대로「저인망 어선」「베트콩 작전」이라고 불릴 만큼 하부조직을 파고드는 데 힘을 기울였다.
9월 28일 밤 김대중은 동아방송의 김 모 기자를 만나 두 가지를 부탁했다. 그는 야당가의 움직임을 한 눈에 꿰뚫고 있었다(이 나라에는 ‘정치군인’도 있고 ‘정치기자’도 있다. 숫자로 따지면 후자가 전자보다는 몇 배 많을 것이다. 그뿐인가. 정치목사, 정치신부, 정치승려, 정치학생, 정치앵커, 정치검사, 정치교수, 정치교사, 정치시민단체 등 ‘정치’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존재가 매우 많다. 정치군인만 비난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 ).
『김형, 난생 처음의 부탁이오. 지금 고흥문 사무총장이 엄청난 돈을 풀고 있다는 정보가 있는데 이 시간부터 돈을 쓰지 말길 바란다는 내 말을 전해주시오.』
김대중과 고흥문은 국회 재정경제위 소속이었다.
『다른 하나는 김의택 전당대회의장에게 내일 아침 당헌개정안이 상정되면 우리 쪽 개정안에 손을 들어 달라고 전해 주시오. 떨어지더라도 정치생명은 유지해야 하니 이 두 가지 부탁을 제발 들어주시오.』
김대중은 9월 29일 아침 대회장인 시민회관 입구에 수백 명의 지지자들을 동원, 멜빵을
메고 함성을 지르도록 했다. 지지자들은 김대중의 대형 사진을 붙인 피켓을 들고 입장하는 대의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피켓에는「金大中 同志를 大統領 候補로!」「勝利의 旗手 金大中 同志 萬歲!」라고 써 있었다.
투표 전 이철승은 신상발언을 통해 김영삼을 밀겠다는 서약이행을 선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신상발언이 봉쇄되었다(이것을 정치공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격분한 이철승계 대의원들은 모두 백지투표를 하였다.
대의원 투표결과는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4표(이중 78표가 백지 투표, 이철승 계보의 투표였다)였다. 과반수인 443표에서 김영삼은 22표가 모자랐다. 계산대로라면 대의원의 40%를 차지하는 유진산계, 두 번째로 큰 계보인 이재형계의 약속, 그리고 서약대로라면 이철승마저 김영삼을 지원하게 되어 있으므로 대의원 3분의 2의 지지를 받게 되는 김영삼의 승리는 확정적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진산직계표와 이재영 계보표가 상당수 이탈한데다 이철승 계보가 백지투표를 한 것이다. 과반수 득표자가 없자 40분간의 휴회가 선포되었다.
무효표를 주도한 이철승계 참모 조연하는 자파 대의원들을 한 데 모아놓고 “우리가 끝까지 캐스팅 보트를 쥐기 위해서는 굳게 결속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과반수에서 61표가 모자랐으므로 이철승 계의 백지투표 78표만 얻으면 2차 투표에서 역전할 수 있었다. 김대중은 이철승의 참모 조연하와 직접 협상했다.
“조 선배님, 저는 선배님과 고향도 같으려니와 선배님의 도움으로 신민당 생활을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더욱이 김영삼은 경상도입니다. 저를 밀어주십시오.”
“이 조직표는 素石(이철승의 호)이 다져놓은 기반입니다. 소석의 앞날을 위해 무엇을 약속하겠소?”
“선배님, 무엇이든지 요구하시는 대로 각서를 쓰겠습니다.“
“정치인에 있어 위상이란 자신의 지위로 말하게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대통령후보 지명을 받게된 사람은 경륜에 관계없이 실질적인 야당의 제일인자가 되고 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통령 후보라 해서 어떻게…”
“거두절미하고 소석을 위해 어떻게 하겠소?”
“앞으로 전당대회의 총재 경합은 물론 다음 대권 경쟁이 있을 시 그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겠습니다.” (김대중은 명함에 이같은 내용을 써서 서명을 해 조연하에게 건넸다)
조연하는 이 각서를 받고 자파 대의원들의 동의를 얻어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을 밀기로 결정했다. 이철승은 2차 투표에 참석하지 않고 혼자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이철승계의 대의원은 전라도 출신이 대부분인 관계로 김대중에게 표를 던지는데 이탈하지 않았다. 78표 중 76표가 김대중에게 갔다.
이어 김대중은 신민당의 제 2계보의 수장 이재형과도 밀약을 맺었다. 다음 번 총재 경쟁에서 이재형을 밀기로 약속한 것이다. 김영삼 측에서는 당황했다. 약속대로라면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김영삼 측에서는 계보 보스들에게 약속 이행을 촉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이재형은 계보 대의원들에게『1차 투표 때처럼 그냥 방치하라』고 지시했다(이재형은 1970년 11월에 총재 경선에 나섰으나 김대중이 유진산을 지지하여 패했다. 1971년 초 신민당과 김대중을 극렬 비난하면서 탈당한다. 1980년에는 민정당 창당 발기 위원장이 되었고 당 대표를 역임했다).
2차 투표가 진행 중일 때 불길한 예감이 든 조윤형은 김영삼을 로비로 불러내어『형님, 2차에서는 아무래도 역전될 것 같아요.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속은 것은 분하지만 우리가 어리석었던 것으로 해둡시다. 형님만이라도 약속은 지켜야지요.』라고 말해 패배를 내다보고 있었다. 2차 투표결과는 김대중 458표, 김영삼은 1차 때보다 줄어든 410표, 기타 18표로 김대중이 과반수에서 12표를 넘어 이겼다.
김대중의 승리가 선포되자 대회장은 환호성과 탄식하는 소리에 휩싸였다. 유진산은 옆에 있던 조직 참모 이민우(1985년 신한민주당의 총재가 됨)에게 말했다.





































-애독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