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을 읽기에 앞서
우리모두가 한반도의 서해상 교전을 다시 되새기며 봤으면 하는 목적으로
글을 썻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제 1 연평해전.
1999년 6월 15일 오전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벌어진 남북 함정간의 해전.
날짜 : 1999년 6월 15일 오전
위치 : 서해 연평도 인군 해상
누가 : 한국과 북한 함정
어떻게 : 해전
왜 : 영해 침범 저지
북한측 경비정이 1996년 6월 6일부터 NLL(북방한계선)을 매일 침범함
몇시간씩 한국 영해에 머물면서 반응을 살피고 돌아감
그러다가 9일째 되는 15일 오전.
북한 경비정4척이 꽃게잡이 어선 20척과 함께 북방한계선 남쪽 2km 까지 내려왔다.
한국 해군은 고속정과 초계함 10여척을 동원. 9시 7분부터 20분 두차려에 걸쳐 선체를 충돌시켜 밀어내기식 공격을 감행
북한 경비정은 25mm기관포 공격과 어뢰정 3척도 가담함.
이에 한국 해군도 초계함의 76mm 함포와 고속정의 40mm 기관포 등으로 응사.
북한 어뢰정과 경비정을 명중. 총 2척이 서해상에서 침몰.
다른 3척도 크게 파손된 채 퇴각함.
북한 군인의 피해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남한 장병7명이 중상을 입음
교전후 1시간이 오전 10시 지난 판문점 유엔군사령부와 북한군 장성급 회담에서 교전이 거론되었으나
양측의 입장 차이만 드러낸 채 아무런 성과없이 종결.
북한측은 한국쪽이 먼저 도발했다는 억지주장을 내새우고 더 나아가 교전지역이 북한 12해리 이내여서 북한영해라고 주장.
NLL은 수십 년동안 남북한 양쪽모두가 한반도 동서 해상의 실질적인 경계선으로 인정한것을 무시.
영해문제를 다시금 부각시키려는 북한의 전술적 의도를 드러냄.
제 2 연평해전.
2002년 6월 29일 오전 서해 연평도 서쪽 해상
북한 경비정의 선제 기습 포격으로 시작된 남북 함정 사이의 해전
언제 : 2002년 6월 29일 오전
위치 : 서해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
누가 : 한국과 북한 함정
무엇 : 해전
왜 :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와 한국 경비정에 기습 포격
제 17회 월드컵 축구 대회의 마지막 날 하루를 앞둔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 25분 무렵
서해 북방한계선(NLL) 남쪽 3마일.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해전이 일어남
1999년 6월 오전에 발생한 제 1차 연평해전이 벌어진 지 3년 만에 같은 지역에서 일어남
'서해교전'으로 불리다가 2008년 4월 '제2연평해전'으로 격상
북한의 꽃게잡이 어선을 경계하던 북한 경비정 2척이 남한측 북방한계선을 침범하면서 남하함
한국 해군이 고속정 4척이 즉각 대응에 나서 초계와 동시에 퇴거 경고 방송을 하는 한편, 교전 대비태세를 취함
그러나 아무런 징후없이 북한 경비정이 갑자기 선제 기습포격
고속정 참수리 357호 조타실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임.
이로써 교전이 시작되고, 곧 인근에 있던 초계정과 고속정이 합류.
10시 43분경 북한 경비정 1척이 화염이 휩싸이자 나머지 1척도 퇴각. 10시 50분 북방한계선을 넘어감
25분만에 교전이 끝남.
이 교전으로 한국해군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형 병장
총 6명이 전사였으며 19명이 부상을 입음
도 해군 고속청 1척이 침몰하였는데 북한 측 피해상황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음.
교적 직후 국방부는 '북한의 행위가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며, 묵과할 수 없는 무력도발'로 규정.
북한측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강하게 요구하였으나, 북한 쪽의 답변을 듣지 못함.
월드컵 축구 3.4위 전 경기에 앞서 제2연평해전 사망자를 위해 묵념하는 모습.
서해교전 박동혁병장 치료한 군의관 글
2002년 6월 29일 토요일. 나는 터키와의 월드컵 3, 4위전을 앞두고 축제 분위기 끝물의 애틋함이 괜히 섭섭해서 이런저런 월드컵 이야기를 동료들과 노닥거리며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웬걸, 갑자기 구내방송이 나오고 어수선한 분위기…. 이윽고, TV에서는 연평도 앞바다에서 양측 해군 간에 교전이 있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국군수도병원 전 군의관을 비롯한 장병들은 퇴근을 미루고 대기상태로 남겨졌고,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보낸 후 헬기를 통해서 환자들을 후송 중이라는 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필요 인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퇴근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날, 외과계 군의관들은 입대 이후 미증유 의 수고를 했음은 물론이다.
내과 군의관들을 찾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귀가한 나를 아내와 뱃속의 아기가 반겼다. 점심식사를 하며 흘깃거리던 TV화면에는 사망자를 비롯해서 많은 부상자들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흐르고 있었다.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 만삭인 아내와 함께 아침식사를 하던 나는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어쩐지 쉽게 퇴근할 수 있었던 것이 찜찜하더라니….
내과를 찾는 일이 뭘까?’
이유인즉, 경상자 중에서도 배의 화재로 인한 연기로 폐 손상을 입은 환자들이 있어서 내과 군의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출근한 뒤 들어선 중환자실의 분주함은 수도병원 근무 후 처음 접하는 광경이었다. 응급수술을 마치고 누워있는 중상자들이 즐비했고 팔다리를 잃은 장병들도 눈에 띈다. 콧등이 시큰거렸다. 평화로운 대한민국에서 이게 웬 난리인가. 저 창창한 청춘들을 어찌 하라고…. 화재에 의한 흡인손상이 의심되는 환자들을 봐주고 담당배정을 한 후 내 환자인 오중사의 몸에 박혀 미처 제거되지 않은 파편과 총알조각들을 손닿는 대로 마저 빼냈다. 14mm 기관총 탄두가 깨진 채로 등 뒤를 뚫고 들어가 방광을 찢고 사타구니 근처의 피부 밑에 묻혀 있었다.
피부를 절개하고 탄두를 끄집어내니 반 동강이 난 것이 어딘가에 부딪힌 후 튀어 들어간 듯 했다. 그나마 경상 축에 속하던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사뭇 처절했다.
북방한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계속 내려오는 북쪽 배를 가로막고자 참수리 357호는 배의 옆구리로 적선의 진로를 막는 ‘차단기동’을 하고 있었다 한다. 차단기동이 무시무시한 이유는 서로 간에 배의 옆구리를 고스란히 노출시키게 된다는 점이다. 이건 피차간에 절대공격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으니…. 남하하던 북측 배가 방향을 틀며 옆으로 도는 순간 우리 장병들의 눈에는 포탑을 돌려 조준하고 있는 인민군들이 보였다.
'어, 쟤네들 왜 저래?’하는 순간 적의 85mm포가 불을 뿜었고 무척이나 가까이 붙어 있던 우리배의 함교(조타실)가 명중당했다. 이후 우리의 포탑들이 차례로 가격 당했다. 이때 함교와 포탑에 위치하던 장병들이 전사했다. 우리와 같은 전자조준장비도 없이, 수동으로 조준하는 북쪽 함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우리를 노리고 미리 공격계획을 가진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중앙 통제실인 함교가 무력화되고 대응 사격할 수 있는 포탑들이 날아간 상황에서 어려운 전투를 벌이게 됐고, 유명한 이야기지만
권모상병 같은 경우는 왼손이 날아간 상태에서...
오른손만으로 M60 기관총을 발사하는 투혼을 보였던 눈물나는 전투는 이렇게 시작됐다.
더욱 황당한 것은 피격당한 참수리 357호가 당하고 있는 동안....
급히 접근한 참수리 358호에서 북측 경비정에 포탄을 퍼부어댔지만 그 상황에서도 북측 경비정은 오로지 357호만 공격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더 위협적인 상대를 먼저 공격해야하는 것이거늘, 침몰시키겠다고 작정을 했던 모양인지 ‘난 한 놈만 패’식의 공격에 의해 357호는 결국 가라앉아 버린다. 당연히 북측 경비정은 옆에 있던 358호에 의해 신나게 두들겨 맞아서, 침몰되는 것만 겨우 면하고 퇴각하게 됐고 이후 들리는 이야기로는 북측 사망자만 30명 이상이라 한다. 같은 민족끼리 내가 더 많이 죽였네, 겨루는 것은 또 다른 비극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오전을 보낸 가운데 오중사의 맞은 편 침상에서 생존자중 가장 많이 다친 박 상병을 접하게 된다. 건장하고 준수한 청년이었는데 의식은 없었고 인공호흡기가 달려 있었으며, 내가 군대온 이래로 목격한 가장 많은 기계와 약병들을 달고 있는 환자였다. 파편이 배를 뚫고 들어가서 장을 찢었고, 등으로 파고 들어간 파편은 등의 근육 과 척추에 박혀있었으며, 등과 옆구리는 3도 화상으로 익어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에도 길쭉한 파편이 박히고, 전신에 총상과 파편창이 즐비했다.
"쟤는…, 왜 저렇게 다쳤어요?”
옆 침상에 누워 있던 부정장 이중위가 입을 열었다. 그는 포탄에 맞아
왼쪽 발목이 부서져 절단술을 끝낸 상태였고 그 옆에는
한참을 울었는지 눈이 발그레 부어오른 젊은 아가씨
가 앉아 있었다. 약혼자란다.
“우리배의 의무병 녀석인데 부상자들 처치한다고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니다가 그랬습니다….”
참수리 357호의 의무병이었던 박상병은 첫 포탄에 조타실이 깨지면서 파편에 쓰러진 정장 윤영하 대위를 몸으로 덮고 함교 계단 아래로 끌고 내려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으나, 방탄조끼 밑으로 줄줄 흐르는 핏물을 보며 소용없음을 깨닫고는 다시 나가 쓰러지는 전우들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숨기지 않고 뛰어다녔다. 당연히, 총을 쏘는 전투병은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로 사격을 하게 마련이지만, 부상병을 찾아 이동해야하는 의무병은 전투시 가장 위험한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총탄에는 눈이 없다.
이야기를 듣자 울컥했다. 멋진 놈…. 그런데, 이게 뭐냐. 상태는 굉장히 안 좋았다.
출혈이 엄청나서 후송당시부터 쇼크 상태였고, 수술하는 동안에도 엄청난 양의 수혈이 필요했다.
정형외과와 외과 군의관들이 달려들어 가능한 대로 파편과 총탄을 제거하고, 장루를 복벽으로 뽑고,
부서진 오른쪽 허벅지의 혈관을 이어놓은 상태였다.
엄청난 외상으로 인한 전신성 염증반응 증후군(SIRS)으로 인해 혈압이 쉽사리 오르지 않아 결국,
순환기내과 전공인 나도 박상병과 인연을 맺게 된다.
스완갠쯔 도자를 삽입하고 수액과 승압제로 혈압을 힘겹게 유지해
나가는 가운데, 후송 시부터의 쇽에 의한 급성 신부전 때문에 신장내과 동료도 힘을 합해 혈액투석을 지속했고,
외상성 ARDS가 속발해 호흡기내과 동료도 합류한다.
방광손상이 발견돼 비뇨기과 동료도 합세하고, 부비동에 문제가 생겨 이비인후과 군의관도 손을 더했다.
건장했던 박상병은 다행히도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고, 그 가운데,
나는 테니스 친구, 술친구들에 다름 아니었던 동료군의관들이 실은 대단한 의사들이었음에 새삼스러워했다.
‘너는 반드시 살려낸다!’
박상병의 숭고했던 행동을 여러모로 전해들은 우리 군의관들은 암묵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이기심으로 질펀한 세월을 뚫고 오면서 형편없이 메말라 버린 내 선량함에 박상병의 회생은 한통의 생수가 되어 줄 것만 같았다.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것…. 레지던트 기간 동안 수없이 지새워냈던 하얀 밤들과 바꿔낸 중환자관리의 기술이 너무나도 기꺼웠다. 하지만, 감염부위에서 녹농균과 메치실린 내성 포도상 구균이 배양되면서 소위 항생제의 마지막 보루라 일컬어지는 이미페넴, 반코마이신, 아미카신으로 배수진을 치게 됐다.
오르내리는 체온에 일희일비하는 가운데 전신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지만 오른쪽 다리가 서서히 차가와지며 색이 죽기 시작했다. 부서졌던 혈관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결국,
고관절부위에서 절단이 이뤄졌고, 사타구니 아래쪽 오른다리는 그렇게 사라졌다. 사지 손실이 검정적 아쉬움에 그치는 사건은 아님을 누구나가 알고 있었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아픈마음과 괜스런 죄책감을 그나마 생명이 지속된다는 사실로 슬그머니 달래 버렸다.
그렇게, 3주를 지내며 더 이상의 발열도 없었고 등과 옆구리 화상부위 및 관통창에는 발간 육아조직이 자라고 있었다. 수술부위의 상처들도 자리가 잡혔다. 인공호흡기도 멈췄고, 기도 절개를 미루며 버텨오던 기도관도 제거했다.
박상병이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사이 바싹 말라버린 박상병은 정신을 차리면서 오히려 군의관들을 힘들게 했다.
현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면서 차오르는 불안과 공포와 절망감을 입으로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주렁주렁 매달린 약병 사이에서 부서진 육체로 꼼짝 못하고 누워 흐느끼는 젊은 장정을 바라보는 일은 너무나도 불편했다.
정신과 군의관이 나서서 도움을 주었지만, 그 역시 박상병의 망가진 육체와 앞으로 닥치게 될 고난을 대신해 줄 수 없음은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박상병은 그렇게 회복돼 갔다.
그사이 오중사는 방광수술을 위해 비뇨기과로 옮겨지고, 부정장 이중위도 정형외과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박상병이 서해교전 환자들 중 가장 늦게 중환자실을 빠져나와 외과병동으로 옮겨지게 됐다. 가장 위중했던 그의 회복으로
서해교전으로 인한 전투 시의 사망자 외 추가 사망자는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고, 이에 고무된 병원 측은 수고한 군의관들에게 포상으로 위로휴가를 주었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고통스러운 사건에서 파생된 개인적 호사여서 마음이 불편했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라며 자위를 했다.
따지자면, 6.25 동란, 경술국치까지도 거슬러 올라가야 할 일이라고….
그렇게 얻어진 휴가로 나는 아내의 출산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 딸의 첫 모습을 대한 순간만큼은 광막한 우주 속에 나 와 아이, 단 둘만 존재하는 감격이었다.
그 때까지 내 삶이 순전히 그 순간을 위한 것이라 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서도, 배냇짓을 하는 딸아이에게 풍덩 빠져 한참을 허우적거리는 사이에 또 한달 정도가 흘렀다.
어느 날, 박상병이 다시 중환자실로 내려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식이 나빠져 CT를 찍어보니 뇌실질 전반에 걸친 세균감염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예의 배수진용 항생제들은 계속 사용되던 중이었고, 중환자실에서 다시 만난 박상병은 완연히 수척해진 모습으로 인공호흡기와 약병들에 또다시 생명을 매달고 있었다.
새로 개발된 항생제들을 민간에서 구매해서 사용하기도 해봤지만 패혈성 쇼크가 이어지며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결국
9월 20일 금요일 새벽
젊은 심장은 마지막 박동을 끝냈다.
이틀 뒤, 가족들의 오열 속에 우리병원에서 영결식이 거행되고
박병장(진급했다)은 대전국립묘지에 묻혔다. 충무무공훈장도 수여됐다.
하지만 그는 꿈꿔왔을 나머지 인생을 하늘로 가져가야 했고,
그의 부모님은 아들을 잃었다. 그를 만났던 군의관들의 가슴에도 구멍이 났다.
옴짝달싹 못하는 역사의 틀 속에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고, 인류사에 전쟁이 없어 지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한 선량한 젊은이의 아까운 죽음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일은 말할 수 없는 무력감을 안겨줬다.
나도, 내 주위의 사람들도 남이 일으키는 전쟁에 인생을 맡겨야 할 수도 있는 초라한 존재일 뿐이었다. 군의관 생활을 하면서 바라본 전쟁은 더욱 두려운 모습으로 저 멀리 서있다. 아득하게 멀지만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그의 섬뜩한 실루엣을 본다. 갖가지 대의명분으로 치장 해도 전쟁은 부서지는 육체와 영혼을 제물로 삼아야 한다.
전장에서 맞닥뜨려야 할 맹목적인 폭력들. 그리고 잇따르는 수많은 이의 비극들. 이를 막기 위한 소위 ‘전쟁억지력’을 키우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을 군인으로 만들고, 더 많은 무기를 갖춰야 하는 또 다른 아이러니….
그렇게 가을을 보내던 중 병원 앞 산책로에서 이중위와 그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약혼녀를 만났다.
처음 중환자실에서 대하던 날의 우울했던 첫인상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밝은 모습이었다. 이중위는 의족보행 연습을 시작한 뒤였고, 퇴원후 다시 해군으로 복귀해 사무직에서 복무할 예정이었다.
그들의 결혼도 예정대로 이뤄질 거란다.
삶은 계속되기에 여전히 아름답다.
나라를 지킨 이 들이여...
고이 잠 드소서..
대청해전.
2009년 11월 10일
북방 한계선(NLL)부근인 대청도 동쪽 약 9km 지점에서 남한과 북한간의 해전
언제 : 2009년 11월 10일 오전 11시경
위치 : 대청도 동쪽 약 9km 지점
누가 : 한국과 북한 함정
무엇 : 해전
왜 : 한국군의 북방한계선(NLL) 침범 경고 무시.
2차례의 해전을 격은후 해군은 경고방송 - 시위기동 - 차단기동 - 경고사격 - 격파사격 이었으나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 - 경고사격 - 격파사격으로 바뀜.
북한의 경비정 한 척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을 침범하여 남하함.(대청도 동쪽 11.3km 지점)
5차례 경고방송을 보냈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계속 남하.
해군은 20mm 발칸포로 4발 경고사격을 했으나 이에 북한경비정은 25,75mm 포로 참수리 325호를 조준사격, 한국함정에 직접 사격을 가함
한국해군도 사격(40mm함포 250발 포함 4950여발 발사)을 가하여 직접적인 교전이 이루어짐
이후 북한군의 선박이 반파되어 북상하자
남하 67분 만에 교전종료.
북한은 경고사격에 대한 언금 없었으며 귀대중인 함섬을 뒤따르며 발포했다고 언급
대한미국의 함선이 달아나며 불질했다고 언급함.
보다더 강력한 보복이 있을 것이라 협박함
서해상 남북간의 관계가 2002년 제2연평해전 이후 위기를 맞음
BGM 정보 : http://heartbrea.kr/index.php?doc-ument_srl=1877101&mid=bgmstorage Mirror b
월드컵개최국의 중요행사를 임하는 대통령이 즉각대응으로 보복전쟁이라도 치뤄애했을까요?
당시상황서 대통령이 전시모드의 워룸들어가는 순간 전세계의 관심은 한국의 월드컵에서 한국전쟁위로 치닫게 되는게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나라에서 전쟁위기의 나라로 전세계에 각인시켜야 했을까요?
일베수준이 그러하니....니네집 잔치중인데 술취한놈와서 갱판친다고 잔치상 다뒤업고 개쥐랄떨며 니성질드러운거 다보여줘야 니덜수준에선 잘한거지??ㅋ
그 잔치 끝난 뒤에 전사자들 는 어찌 했는지는 아냐
김대중은 그거 하나만으로도 욕들어 쳐 먹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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