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생도 1기와 생도 2기에 대하여.
육군사관학교에 10번째 생도들이 들어온 것은 1949년 7월 15일의 일이었다. 9개월만을 수학하고 임관한 육사 9기와는 달리, 이들은 2년간의 정규교육을 수료하고 임관하는 계획이었고, 총 312명이 1949년 7월 15일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입교 직후부터 자신들의 수업연한이 2년에서 1년으로 축소되었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들어야 했다. <육군사관학교 1기생 모집>이라는 광고를 보고 시험을 쳐 수많은 경쟁률을 뚫고 입교한 지 일주일 만이었다. 술렁거리면서 네다섯명의 퇴교자 또한 나왔다. 그럼에도 대부분이 이후 1년여간 군사학 등의 교육을 받았고 1950년 7월에는 임관할 계획이었다.
이들의 다음 기수가 될 생도들이 육사에 입교한 것은 1950년 6월 1일의 일이었다. 이들은 정규 4년제 교육을 받게 될 최초의 육사 생도들로써, 이들은 이전 다른 모든 육사생도들과는 달리 일반대학과 같은 4년간의 교육을 받은 후 임관하게 될 것이었다.
문제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김일성이의 북괴군이 38선을 밟고 남침해왔다는 것이었다.
1950년 6월 25일은 1일 입교한 생도들의 첫 면회가 있을 날이자, 49년 입교한 생도들의 졸업행군 전 있은 외박날이었다. 6월 5일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김홍일 육사교장과 이한림 육사부교장이 참석한 육사 입교식을 치른 생도들은 25일날 첫 면회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이들에게 닥쳐온 것은 가족, 친지들이 아닌 비상을 뜻하는 사이렌 소리였다. 11시 비상집함을 거친 이들은 그날 5시, 2주 후면 소위로 임관했을 생도들과 함께 포천 부평리고지 전투에 투입되었다.
생도들을 전선에 투입시킨다. 이 생각은 당시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의 아이디어였다. 물론 이에 반대한 장교들 또한 있었다. 이들은 49년 입교한 생도들은 임관시킨 후 소대장으로 출전시키고, 50년 입교한 생도들은 후방 안전지대로 돌린 후 교육을 거쳐 임관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이후 합참의장을 지내는 육본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은, “패전 일로에 있던 일본도 사관생도를 전선에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본관은 찬성할 수 없습니다. 재고하셔야 합니다.”라며 반대했지만, 채병덕의 “이 판국에 어떻게 할 작정이요? 묘안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라는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결국 생도들은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조암 중령이 대대장이 된 생도대대는 소총중대 2개, 중화기중대 1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부대대장 손관도 소령, 1중대장 송인율 대위, 2중대장 박헌규 소령, 3중대장 이원엽 대위 등이 임명되었고, 49년 먼저 입교한 생도들은 소대장, 분대장, 부분대장, 자동소총 사수로, 그리고 50년 입교한 생도들은 분대원과 연락병으로 편제되었다. 이동을 위해 근처 민간차량 30여대가 징발되었다. M1 소총과 실탄 56발 또한 분배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육사 생도들의 전투는 엄청난 참사로 끝났다. 대대장 조암 중령에게는 지원을 위해 경찰대대 1개가 배속되었으나 이들의 훈련 수준은 처참했고, 무기 또한 99식 소총 혹은 칼빈 소총에 실탄 20발로 전차를 앞세워 진군해오는 인민군 3사단 9연대 2대대에 비하면 매우 미약한 수준이었다. 경기도 내촌면 내리 330고지에 배치된 경찰대대는 적이 유효사거리에 들어오기도 전에 사격하여 매우 빠르게 분쇄되었고, 건너편 372고지에 배치되었던 육사 생도대대 또한 백병전까지 치르는 혈전을 벌였으나 경험 부족, 탄약 부족등으로 완전한 열세였다. 대대장 조암 중령은 실종까지 되었다.(이후 그는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왔고-고의적이라는 혐의가 있었다-적전도주, 지휘방기 등의 혐의로 총살된다.)
후퇴명령이 내려오자 부대대장 손관규 소령의 지휘 하에 사관생도들 대부분이 후퇴하였으나, 이중 몇몇은 복귀하지 않거나 못했고, 또다른 몇몇(49년 입교 생도 10명, 50년 입교 생도 3명)은 후퇴하던 7사단 장병들(7사단 9연대 김만석 중사 등 기타 6명)과 함께 불암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전개하였다.(이후 이들은 불암산 유격대로 불렸으며, 9월 21일까지 김원기 생도를 제외한 전원이 전사했다. 김원기 생도 또한 총상으로 치료 중 1951년 7월 10일 사망했다.)
26일 23시경부터 27일 아침까지 후퇴하여 태릉 육사에 집결한 이들은 다시 한번 출동명령을 받는다. 불암산-창동 일대 방어를 위해 92고지에 방어선을 차렸으나, 이미 372고지 전투로 전투력이 많이 약화되어 있었고, 북괴군이 서울로 진입하자 고립을 우려한 손관도 소령의 철수 지시로 이들은 한강 이남까지 철수하게 된다.
수원까지 철수한 이들은 다시금 전선에 투입되려 하고 있었다. 김재명(이후 육본 작전참모부장) 생도 등은 북괴군 전차에 맞서 육탄공격을 실시할 생도에 지원하여 육탄공격을 위한 훈련을 총 3일간 받고 투입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시흥지구전투사령관이던 김홍일 장군의 저지로 육사 생도들은 투입이 중지되었고 이후 비전투부대로 분류되었다. 전쟁 극초기 생도들의 고난이 끝나던 때였다.(다만 50년 입학 생도들은 이후 3사단에 배속되어 포항 전투를 치렀다)
49년 임관한 생도들의 임관식이 열린건 1950년 7월 10일 대전에서였다. 대전 충남도청 광장에서 열린 임관식에 참석한 생도들은 134명. 원래 생도들이 262명이었음을 감안한다면 130여명의 생도들이 전쟁통에 실종 혹은 전사한 것이었다. 소위 계급장이 모자랐기 때문에 반창고를 잘라붙여가며 임관식을 치러야 했다. 이들은 통칭 생도 1기로 불리었으며 1966년 육사 10기라는 기칭을 부여받는다.
1950년 임관한 생도들(333명중 248명만이 생존했다)의 경우에는 아예 육사 기칭조차 받지 못했다. 육군보병학교와 육군사관학교가 폐교 후 통합 조치되면서 탄생한 육군종합학교로 입학해 6주간의 군사 훈련을 받고 임관하게 된 것이었다.(이는 현지임관을 제외한 최단기 장교 임관 과정이었다. 그 바로 뒤인 군사영어학교는 총 45일간의 교육을 거쳤다.) 사병 출신 일부가 보병학교 1기생들과 함께 종합 1기로 임관하였고, 이후 대부분의 2기생들이 종합 2기로 임관하였다. 낙오된 생도들이 복귀하면서 생도들의 임관은 종합 19기까지 이어진다. 그렇게 이들은 2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육사 대신 종합 출신으로 분류되어 복무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통칭 '생도 2기'로 불리게 되었다.
생도 2기들의 문제가 다시 제기된 것은 전선이 고착화되었던 1951년이었다.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장군은 채병덕(당시 전사)의 육사 생도 투입 결정을 크게 비판하면서 육사 재개교를 앞두고 대부분의 생도 2기들이 근무하고 있던 9사단 내부의 생도들을 찾아 이들의 복교를 위한 소재 파악 등을 지시하였다. 아래는 당시 9사단에 보내진 공문이다.
수신: 보병 제9사단장
발신: 참모총장 명에 의하여 작전국장 준장 이용문
제목: 육사 재개교에 다른 생도 2기생 소재 파악
1. 육군사관학교 재개교를 앞두고 생도2기생 소재를 파악하고자 함.
2. 귀 사단에 배속된 육사 생도 2기생의 소재를 파악하고 명단을 작성하여 보고 할 것.
3. 생도 2기생이 복교 후 발생할 문제점을 도출하고 그 대안을 건의할 것.
이후 9사단에서는 1현직 중위를 사관생도 신분으로 끌어 내리는 것은 세계 역사에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점, 술 담배 등 이미 세상 풍속을 맛본 장교들을 재교육시킬 경우 통제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엄격한 규율의 육사 전통수립에 지장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들었고 결국 전사, 부상, 전속 등의 문제로 9사단 내의 생도 2기들이 흩어지면서 이들의 복교 문제는 무산되었다. 이후 실시된 장교 미국 유학 프로그램에서 생존한 생도 2기생들 중 절반이 넘는 70여명이 합격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전후 생도 2기들은 육사 10기가 누리는 '육사'라는 호칭을 얻지 못해 진급 등에서 큰 손해를 입었다. 당장 생도 1기로 통칭되는 육사 10기의 주요 장성들을 살펴보자면, 황영시(육군참모총장), 소준열(1군사령관), 김윤호(합참의장) 등 대장이 3명, 강영식(6군단장), 신현수(국방부 특명검열단장)등이 있으나, 생도 2기는 대장 없이 장정렬(1군단장), 김용진(군수사령관), 김기석(전교사 부사령관), 박경석(6사단 부사단장)등으로 다른 육사 출신들에 비해 진급에 불이익을 입었다.
생도 2기들의 명예가 마침내 회복된 것은 1996년 5월 4일의 일이었다. 71년 육사 내부에 생도 2기의 입교일에서 딴 "6.1 탑"이 건립되었고, 1992년에는 372고지 전투 등에서 전사한 생도 2기생들에 대한 국립묘지 봉안이 이루어졌다.(이전까진 372고지 전투 장소 그곳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1996년 4월 16일, 육사 생도 2기들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1996년 5월 4일 육사 화랑연병장에서 마침내 생도 2기 전원(당시 생존자는 94명)에 대한 명예졸업장이 수여되었다. 임관 46년만의 일이었다.
참고
<軍 1-정치장교와 폭탄주>, 김재홍, 동아일보사, 1994 (생도 1기와 2기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되어있다. 이후 기칭파동과 연관되는 부분인데 이에 대해서는 차후 서술하겠다.)
http://kmaaa.or.kr/data_sub_11_02.php (불암산 유격대에 관해 참조하였다.)
http://blog.naver.com/steelgun/40149198079?viewType=pc (한국전 초기 육본을 엿볼 수 있는 박정인씨의 수기이다.)
http://blog.naver.com/hyunkh7/220237050538 (생도 2기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다.)
https://goo.gl/HXoqW8 (생도 1기와 2기의 행정적 처리에 대해 나와있다. 소설이긴 하지만 이것만큼은 사실이기 때문에 참조하였다.)
http://www.n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2401 (생도 1기 김재명 장군의 증언과 생도 1기의 전투 등이 나와 있다.)
http://nestofpnix.egloos.com/4010142 (생도 1기와 2기의 전투 등이 매우 자세하게 나와 있는 글이다. 이런 미개한 글보다는 훨씬 질이 좋으니 참조하는것을 적극 권장한다. 다만 일부 오류는 정정했음을 밝힌다.)
http://egloos.zum.com/nestofpnix/v/4176270 (전술한 글과 같은 블로그이다. 조암 중령의 최우에 대해 자세하게 나와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82%B4%EC%B4%8C-%ED%83%9C%EB%A6%89_%EC%A0%84%ED%88%AC (위키피디아이긴 하지만 참조할 가치는 있다.)
http://blog.naver.com/horasmauser/30170033111 (역시 조암 중령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http://kmaaa.or.kr/data_sub_10_03.php (육사 총동창회 생도 2기 페이지로, 생도 2기의 전시 활동과 1951년의 복교 기도, 그리고 전후 명예 회복 운동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나와있다. 일독을 권한다.)
최초의 4년제 육사라고 박정희의 많은 사랑과 지원을 받아 육사 11기 전두환이 승승장구하고 박정희 사후에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었음..... ㅠㅠ
전두환 노태우 얘기가 아닌데
전두환 노태우 중심으로 생각을 하시네요.
육사11기 생도2기의 관점에서 보세요.
생도2기는 전두환 노태우와 비슷한 나이에서 1개월만에 참전했다는 겁니다.
18세 소년에게 책임을 지운다 만다의 의미가 아니고 기수에 대한 내용이 핵심인데 자꾸 전두환을 옹호하려고 하시는 것 같네요.
나는 참전안했다고 알고 있음.
개인적으로 소년병을 하던 학도병을 하던 그 얘기가 아님..
전두환 노태우가 속했던 육사 11기 얘기임..
생도2기는 육사 생도는 참전하지 않는 전례를 무시하고 입학 1개월 만에 참전
육사 11기는 전쟁 중에 입학하여 참전을 안함. 최초의 4년제 육사 졸업생이 됨
생도2기는 최초의 4년제 육사로 들어갔다가 바로 전쟁하고 그 이후도 대우를 못 받음
비운의 기수임
이것이 팩트입니다.
전두환을 까자는 소리가 아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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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걸려 기억 없어~...29만원이 전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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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갈은 육군 사관 학교를 국가 반란 사관 학교로 만들고!
전대갈을 좋아 하는 육사 장교는 3차 군부 반란을 바란다!
왜?
군부 반란으로 정권을 가지면 육사 장교는 귀족으로 ~전대갈처럼 호의 호식하며 살수 있기에(역사적 증명!)
전대갈에게 육사 생도는 사열대에서 사열식으로 전대갈의 영웅적 군부 독재에 찬양!(2012년)
단 한 놈도 전대갈 사열식을 거부 비판 않고 참여!!!!!!!!!!!!!!
잠재적 반란 장교의 후예
육사 생도는 잘못된 상관의 명령에 거부해야 한다고 배우면서!
역사를 모르니 민간인 학살과 군부 반란 그리고 신군부 독재 수괴를 위해 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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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3차 군부 반란시 ...병사가 장교를 사살 할수 있게 교육하고 훈련 시켜라!(장교는 절대 반란 장교를 막지 못한다!)
제2의 전대갈이 병사에게 사살 당해야 군부 반란의 치욕이 사라진다!
꿈속에서 재규가 부르거든 하트 뽕뽕하며 함께 강을 건너라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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