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an Julius Oberth
오베르트는 1894년 6월 2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노디세벤 (지금의 루마니아 시비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역의 의사였고, 오베르트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19세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뮌헨대학에서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Jules Verne 의 소설에 감명을 받고 우주여행에 관심을 갖게되고, 그 문제를 풀기로 결심한다. 바로 그 다음해인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형가리제국의 군대에 입대하여 참전,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다. 다시, 의무대로 배속받아 여기서 잠시 우주비행의 생리학적 측면에 관심을 갖게되나, 곧 기술적인 문제에 전념한다. 우주비행을 위해서는 효율적이고 강력한 추진력이 필요함을 알고, 액체연료 로켓에 대한 설계를 했다. 그는 지휘관에게 액체연료 로켓으로 추진되는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제안한다. 그의 상관은 기술적 검토를 위해 이 아이디어를 국방성에 보냈으나,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신을 받았다. 1918년 1차대전이 끝나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액체추진 로켓에 대한 이론으로 이루어진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준비했으나, 1922년 대학은 이를 거부했다. 같은 해 미국 클라크 대학의 고다드의 연구를 알게 되고, 편지를 보내 그의 책 "A Method of Reaching Extreme Altitude" 를 부탁한다. 1923년 오베르트는 이론들을 재정립하여 "Die Rakete zu den Planetenraumen" (행성간 우주로의 로켓) 이란 책을 펴냈고, 이책으로 그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25년 소련의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의 업적을 알게 되어,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협조하였다. 1929년 "Wege zur Raumschiffahrt" (우주비행으로 가는 방법) 으로 제목을 바꾸고 제 2판을 내고, 문학상인 '로베르 에스노 펠트리 앙드레 이르슈 상' 을 수상하여 1만 프랑의 상금을 받아 액체추진에 대한 연구 자금으로 사용했다. 이 두책은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로켓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고, 같은 해 VfR (Verein fur Raumschiffahrt) 에 가입하여 대표가 되었다. 그는 대중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고다드와는 달리 자신의 연구를 알리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영화사인 Ufa film 의 기술 고문직을 맡아 Fritz Lang 감독의 "Frau Im Mond" (달의 여자) 란 영화제작에 참여했고, 영화 홍보를 위한 로켓제작을 맡아 젊은 폰 브라운과 함께 작은 로켓엔진을 제작하고 지상시험까지 마쳤으나 발사계획이 취소된 일도 있었다. 1938년 그는 빈 공과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2차대전 중에는 제자였던 폰 브라운과 함께 V-2 로켓 개발에 참여했다. 전쟁이 끝난 후 스위스와 이탈리아에서 로켓 연구에 참여했고, 1955년부터 1958년까지 미육군 탄도 미사일국에서 폰 브라운과 미사일, 로켓에 대한 연구를 했다. 은퇴 후, 62년부터 독일 뉘른베르크 근처의 펜히트 시에서 이론 연구를 하며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