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하스칵 만큼 북 베트남 군인들과 베트콩들을 효율적으로 사살했던 해병 저격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가 사살한 적의 숫자는 공식적으로 93명 이지만 확인되지 않은 기록까지 합한다면 아마도 100명을 거뜬히 넘길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북 베트남 군 당국이 카를로스의 목에 3.000.000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던 일은 그의 저격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증명하는 사례일 것이구요
카를로스는 부니 햇에 흰색의 깃털을 꼽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베트콩들은 그를 하얀 깃털이라는 뜻의 "롱 뜨랑" (LONG TRANG)이라고 불렀다 합니다. 카를로스는 아직까지도 해병대 역사에서 전설적인 저격수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해병대는 1년에 한번씩 가장 우수한 사수를 선정해 카를로스 하스칵의 이름을 따서 만든 상장을 선사하며 캠프 래준에는 하스칵의 이름을 따서 만든 저격수 교육장이 있을 정도랍니다
아칸소 토박이 출신인 카를로스는 마른 체구에 오만하지 않고 자제심이 강한 성격이었으며 이러한 그의 성격은 적들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 깊숙히 침입해 들어가 며칠이고 기회를 노리다가 자신이 노리고 있는 목표물을 일격에 사살하는 임무를 수월하게 하는 데 보탬이 되었다 합니다.
카를로스는 자신이 죽지않고 계속 임무수행을 해낼수 있었던 이유는 쉽게 흥분하지 않는 자신의 기질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장소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산들바람과 나뭇잎의 움직임에서도 사냥감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철저하고,완벽하고, 절대적인 집중력" 때문이었다고 말한적이 있다 합니다.
그가 맡았던 임무는 대부분 신경을 계속 집중해야 하고 쉽게 피로를 느끼게 하는 성격의 것이 많았고 적의 지휘관을 추격해서 사살해야 하는 한 임무에서 카를로스는 넓게 트인 1000미터나 되는 지형을 3일 밤낮에 걸쳐 포복으로 한 번에 1인치씩 전진해 나가야만 했습니다.
카를로스가 그 탁트인 공간에서 풀과 열대식물로 위장하고 엎드려 있을 때 20피트도 안되는 거리에서 적의 정찰대가 탐색을 하며 돌아다녔답니다.^^
베트남에서의 13개월의 복무기간 동안 카를로스는 수 많은 작전에 지원했으며 카를로스의 상관은 강제적으로 그를 다른 분대에 배속시켜 휴식을 취하게 만들었데요
"저는 적의 뒤를 쫓는 것이 아주 즐겁게 느껴집니다. " 카를로스는 워싱턴 포스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합니다. "항상 주변에 다른 인간이 숨어있는지 경계하고 있어야 합니다. 베트남에는 두 번째 장소란 존재하지 않고 두 번째 장소는 바로 시체 자루 속이 되기 쉽지요.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이고 그걸 못 느낀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일 겁니다. 하지만 작전수행 중엔 그런 감정이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공포감은 나 자신을 더욱 각성시키며 경계심을 강하게 하고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알려주지요. 두려움은 제가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
카를로스 하스칵 은 리 틀 락(LITTLE ROCK)의 변두리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모가 이혼한 후에는 할머니와 같이 생활 했습니다. 그는 야외에서 놀이를 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숲속에서 동물을 사냥하는 방법도 터득했고 카를로스는 다람쥐와 토끼가 어느 방향으로 달아날지를 미리 알고 있을정도.. "아직 어렸을 때 저는 숲속에 앉아 주문을 외우며 동물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곤 했지요. " 카를로스는 말한다. "나는 그저 앉아서 토끼와 다람쥐가 오기만을 기다렸지요, 빠르든 늦든 그놈들은 내가 앉아있는 곳의 나무 위 나 그루터기로 달려오곤 했거든요. 이유는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느낌이 오곤 했어요."
10살이 되면서 카를로스는 자기가 잡은 짐승들이 고기를 규칙적으로 식탁에 올려놓게 되었습니다. 17살이 되던 1959년, 카를로스는 해병대에 하사관으로 지원입대 하게 되고 카를로스가 자신의 재능을 나타나는데 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합니다. 그는 샌 디에고 에 있는 신병훈련소에 입소하자마자 전문가에 가까운 사격실력을 발휘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죠.^^
그 후 몇 년 동안 1965년에 열린 명성 있는 윔불던 컵 장거리 사격대회에서 수상한 경력을 포함하여 카를로스는 다양한 사격대회에 참가해 우승을 차지했고. 윔불던 대회에서 우승한 다음해에 카를로스는 베트남으로 파병되었답니다. 카를로스가 처음 도착해 맡은 직책은 헌병이었으나 그는 좀더 전투적인 임무를 맡게 되기를 원했고. 그는 장거리 정찰부대의 정식대원으로 자원해서 들어갔지만 밀림의 생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동료들과 같이 행동하는데 불편함을 느끼고 독자적으로 적을 사냥해 나가기로 결심을 내린답니다.
카를로스가 이런 결정을 내렸을 때 동료해병들은 단독으로 행동하는 저격수의 실용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지만 6개월이 지난 후 - 이미 공식적으로 14명의 적을 사살한 후였습니다. - 카를로스의 전술을 타당하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카를로스는 동료에게 " 사격시합 처럼 가장 많은 인간을 죽인 사람이 메달을 받게 되는 " 방식으로 자신의 저격임무를 생각해 본적은 없다고 말했지만 포스트 지의 기자에게 이런 애기를 한적도 있답니다. " 적을 사살하는게 즐겁게 느껴지곤 한 적이 많습니다. 때로는 그 감정이 저를 경악하게 만들지요, 추악한 일이죠."
카를로스의 저격수 시절은 1969년 케산에서 그가 타고가던 상륙장갑차가 500파운드의 지뢰를 밟고 폭발하면서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카를로스는 사고현장에서 도망치는 대신에 불타오르는 차체안에서 7명의 해병대원을 구출해 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이 용감한 행동에 대해 주어지는 훈장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폭발당시의 화상으로 전신의 40퍼센트에 2-3도 가량의 화상을 입었으며 곧바로 텍사스에 있는 브루크 육군 의학센터로 후송되 13번의 피부 이식 수술을 받았고 화상으로 입은 상처의 후유증 때문에 그는 라이플을 이용한 동작을 더 이상 실행할 수 없었답다.
전장에서 복귀한 후 카를로스는 콴티코 에 위치한 해병기지에 정찰 저격수 학교를 세우게 되고 1975년 해스칵 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었고 다양한 동맥질환과 치유가 불가능 할 정도의 퇴행성 신경성 질환에 걸려 있다는 진단을 받게됩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병대에 머물러 있으려 했지만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고 복무 20주년을 채우기까지 55일이 남은 시점에 그는 제대를 결심하게 됩니다.
카를로스의 제대를 기리는 행사에서 그는 자신이 직속상관에게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힌 국기를 받게 되었습니다. " 많은 수의 해병대원들이 존재한다. 또한 많은 수의 해병저격수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일발필살(一發必殺)의 실력을 가진 진정한 해병 저격수는 - 사격지휘 상사인 카를로스 하스칵 , 오직 이 한 사람뿐이다. " 이 감동적인 글귀가 적힌 국기를 받은 후 카를로스는 군을 떠나 소시민의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는 35살의 아내 조세핀 과 버지니아 해변에서 거주했지만 건강은 더욱 악화돼 결국은 휠체어 신세까지..
하지만, 그는 이 비참한 상태를 박차버리고 경찰청 에 저격술 을 가르치는 강사로서의 고용되게 되고 이 당시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두 권 의 책이 출간되었으며 그의 생애에 어느 정도 줄거리의 기반을 둔 "스나이퍼 (SNIPER)라는 이름의 영화가 상영되었죠.
그러나, 병마는 그의 목숨을 가차없이 빼앗아 가 버립니다. 그의 죽음은 유일한 혈육인 34세의 아들 카를로스 하스칵 3세가 설립하는 재단의 설립을 돕기 시작한지 2주 후에 일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구요.
전쟁이 끝난 후 하스칵 의 친구는 그에게 헤밍웨이의 소설에서 인용한 문구를 하나 보여주었습니다.
"인간을 사냥하는 것에 비견할 만한 사냥은 없으며 무장한 인간을 사냥했던 사람은 그 사실을 충분히 오랫동안 자랑할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 밖의 다른 스포츠들은 고려할 값어치도 없는 것이다. "
하스칵 은 이 문구를 종이쪽지에 옮겨 적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 헤밍웨이가 옮아" "저격은 사냥이야, 살인이 아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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