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지구촌=이탈리아]○…‘꿈을 강한 의지로 실현 시킨 야생마’, ‘1900년대 이태리 영웅’, ‘자동차의 살아있는 신화’
이 모두는 엔쵸 안셀모 페라리(Enzo Anselmo Ferrari)를 지칭하는 대명사이다. 처음에는 카레이서로, 자동차 경주팀의 창립자로, 이후 페라리의 설립자로 전쟁 후 급변하는 이태리 경제 속의 역사적 주인공이었던 Enzo Ferrari.
공부에 관심 없고 운동만 좋아했던 페라리
그는 1898년 12월 모데나(Modena)의 외곽지역에서 태어났다. 그가 10살이 되던 해 철공소를 경영하는 그의 아버지는 Enzo의 형과 함께 볼로냐(Bologna)의 자동차 경주장을 데려가는데 여기서 그의 인생을 결정짓게 해주는 경주를 보게 된다. 자동차 경주에 강한 인상을 받은 Enzo는 13세 때 이미 운전을 배우게 되며 경주선수로서의 꿈을 조금씩 키워나가게 되고, 더욱이 그의 아버지가 자동차 정비소를 세우게 되자 실제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공부에 특별한 관심은 없었으나 스포츠에 대한 애정은 탁월해 16세 때에는 스포츠 신문에 축구기사를 쓰기도 하였다. 사실 그의 부모님들은 그가 엔지니어가 되기를 희망하였지만 16세가 되던 해 다니 던 기술 학교를 그만두며 학업을 접는다.
1916년에는 집안에 아버지와 형이 사망하는 비극이 겹치게 되고 Enzo역시 1차 대전에 불려가게 되는데 최근 조류독감으로 새로이 알려지고 있는 당시 전 세계를 위협했던 유행성 전염병 스페인 독감(Spagnola)에 걸려 목숨에 위협을 받게 되기도 한다. 회복 후 집으로 돌아와 홀어머니를 위해 일을 찾아 나서 피아트(Fiat)사에 입사지원을 해 보았으나 전쟁 후 어려운 경기 탓으로 일자리가 없었으며 토리노(Torino)에서 시험 운전사로 일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자동차 경주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꾸준히 경주 선수 모임에 참석하였으며 여기서 당시 Fiat팀의 A급 선수인 페리체 나자로(Felice Nazzaro)를 만나 그의 소개로 CMN(Costruzioni Meccaniche Nazionali-국립 기계제작소)시험운전사로 일하게 된다.
CMN의 시험운전자이자 경주 팀장인 우고 시보치(Ugo Sivocci)로부터 운전기술을 인정 받아 파르마(Parma)의 베르체또(Berceto)경주에 첫 데뷔를 하여 11위를 기록하고 따르가 플로리오(Targa Florio)경주에서는 9위로 입상하게 된다. 하지만 다음해인 1920년 CMN의 파산으로 Sivocci와 함께 알파 로메오(Alfa Romeo)팀으로 옮겨 시험 운전자이자 경주선수로 일하게 되는데, 이때 다시 Targa Florio에 참가하여 2위의 기록을 함으로써 Enzo의 전성시대를 열기 시작한다.
달리는 야생마, 엠블럼Emblem의 탄생
1923년 사비아(Savia)라는 작은 지방 대회에서 Enzo의 우승을 지켜본, 당시 1차대전의 영웅이자 전투 조종사인 프란체스코(Francesco)의 부모 바라까(Baracca)백작 부부는 Enzo의 팬이 였다. 그들은 그의 아들 조종기에 새겨진 뛰어오르는 말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행운을 가져 다 줄 것이라며 그에게 건넸고 이를 그의 차에 달도록 요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노란색 방패 위에 뒷발로 선 검은 말이 지금의 Ferrari의 Emblem이 된 것이다. 다음해 그는 이 Emblem을 달고 아르체보 컵(Coppa Arcebo)대회에 출전하여 당시 유럽 최강인 독일 벤츠 SKK를 물리치며 우승하고 이로 이태리 내 최고의 레이서로 공식 인정을 받아 급성장하게 된다.
1920년대 Alfa Romeo의 레이서로만 활동했던 그는 1929년 그토록 열망하던 경주 팀을 몇 부유한 기업들의 후원으로 탄생시키게 된다. 이가 Ferrari의 전신인 ‘페라리 경주팀 Scuderia Ferrari’이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Alfa Romeo의 한 부분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1932년 1월 아들 디노(Dino)가 태어나자 아내와의 약속으로 경주 선수 생활은 그만두고 경주 팀의 관리자로서 그리고 제작자로서 일에 몰두하게 되는데 다음해 Alfa Romeo는경영부진으로 레이스 활동을 S.F.에 위임하게 된다.
당시 50명의 S.F. 조종사들은 정규직 혹은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봉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나 우승은 언제나 이들 차지였으며 막강의 팀임을 즉시 증명해 보였다. 1937년 Scuderia Ferrari는 Alfa Romeo158 즉 ‘알펫따(Alfetta)’를 만들어 국제대회를 석권하고 38년 Alfa Romeo가 ‘알파 꼬르세(Alfa Corse)’라는 경주팀을 만들어 Enzo를 감독으로 만들면서 S.F.는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이듬해, Alfa Corse는 Enzo와 강한 의견충돌을 가지게 되는데, 그 동안 자신이 직접 디자인 한 차를 경기에 출전 시키고자 꿈꿔왔던 Enzo는 오히려 이를 기회로 Scuderia Ferrari를 독립적으로 운영할 계획을 세운다.
전설의 레이서에서 자동차 왕으로
Alfa Romeo의 계약조건에 따라 이후 4년 동안 경주에 Ferrari 이름을 달거나 생산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건으로 그는 Alfa Romeo를 떠난다. 그리고 1940년 Modena에 Auto Avio Costruzione(자동차 및 항공 제작회사)를 세워 Mille Miglia(천마일 경기) 출전용으로 스포츠카를 생산하는데 8개의 실린더와 1.5리터 엔진의 815 (Vettura 815)를 만들었지만 엔진 결함으로 완주하지는 못하였다. 1943년 공장은 전쟁의 영향으로 Modena에서 마라넬로(Maranello)로 옮겨져 항공기 부속품들을 납품하며 자본을 획득하지만 이후 공장이 폭파되는 비운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공장을 곧 다시 세우고 1945년부터 계획에 들어간 Ferrari의 첫 경주차인 125S를 1947년 출시하며, 이듬해 일반 도로에서도 달릴 수 있는 Ferrari 166을 만들어 내어 포뮬러 레이스카와 스포츠카 두 종류의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1951년 영국 Grand Prix에서 처음으로 우승한 Ferrari는 레이스에서의 활약과 함께 높은 성능을 바탕으로 점차 명성을 얻어 세계 최고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기능성에 치중하던 디자인도 피닌파리나 (Pininfarina- 본명:Giambattista Farina)와의 만남으로 우수해졌으며 특히 전년도 경주 자동차를 팔아 수입을 유지함으로써 Ferrari가 대중화 되는 계기를 만든다.
세계 카 레이싱 사상 최고의 챔피언
하지만 이 행복한 시기의 끝에, 1956년 외아들Dino가 24세에 사망하게 되고 숨겨둔 애인과 아들이 아내에게 발각되면서 이혼을 겪게 된다. 이후 그는 그의 공장에서만 생활하며 쉬는 날 없이 일에만 몰두하였다.
차츰 그의 차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자 요청만큼 충분한 공급을 할 수 없었던 Ferrari는 1969년 Fiat사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어 Ferrari의 지분 50%를 양도하게 된다. 하지만 경주용 자동차 부분의 운영권은 양도하지 않았으며, Fiat의 도움으로 70년대 다시 활기를 되찾아 80년대 까지 그의 차들은 Grand Prix와 Le Mans를 휩쓴다. 그러나 1988년에는 90%의 지분을 Fiat에 넘기며 Fiat 그룹의 계열회사로 넘어가게 되지만 스포츠카에 대한 탁월한 기술력 덕분에 지금도 별도의 회사로 운영되고 있다.
Ferrari는 1947년부터 Enzo가 사망한 1988년 까지 전 세계 자동차 레이스에서 우승만 5천회 이상,25개의 세계 타이틀을 획득한 세계 자동차 경주사상 가장 많은 승리를 기록하였다. 1988년 Ferrari는 창립 40주년을 맞아 Enzo의 지시 하에 F40을 내놓았지만 안타깝게 그는 이를 보지 못하고 같은 해 사망한다. -박정영(밀라노 한이문화연구원
www.cricc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