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조사하면 항상 1위인 사람...
최소한 요즘 선거 후보들 같은 가면을 쓴 입신 양명에 눈이 어두워...공명심에 앞장섰던 사람은 아닌것 같습니다. 일제시대 광복군 토벌과 일화들은 상당부분 조작된것 같더군요.
저도 한때 박정희란 인간이 궁금해서 며칠간 인터넷으로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얻은 결론입니다.
말만 번지르르했던 '노대통령들' 이나 '김대통령들' 과의 비교는 안된다고 생각되고요
앞으로 대통령하겠다고 나서면서 박통욕할 김, 이, 박 들이 과연 박통의 발끝에라도 미칠것인지...
요즘같은 때는 예전에 한참 찾아다녔던 박정희 대통령의 일화가 왜 자꾸 생각나는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박정희 대통령 일화나 심심풀이로 읽어보시죠...육영수 여사 저격 동영상도 한번 찾아서 보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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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년도 쯤인가 박대통령은 평소 측농증증세가 있었다. 어느날 낮에 시간을 내어 서울대학병원으로 차를 타고 가서 수술을 했다. 수술하기전 박대통령은 의사에게 몇시간이나 걸리겠냐고 물었더니 의사말이 수술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으나 마취깨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대답하자 박대통령왈 "그러면 마취하지말고 그냥 하시요, 그렇게 한가하게 보낼 시간이 어딨나"
놀랜 의사가 그건 통증이 너무 심해서 안 된다고 하자 박대통령은 고집대로 마취하지 말고 바로 수술에 들어가자고 우겨서 기어이 마취없이 그대로 했다.
수술중에 단 한번도 소리를 내지 않고 끝났는데 담당의사가 얼마나 놀랬는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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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중반쯤에 혜화동로타리근처의 막걸리집에 박대통령이 혼자 들어와서 막걸리 한사발을 시켜서 김치를 안주삼아 마셨다. 조금있다 막걸리주인이 부스럭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니 박대통령이 막걸리독에서 직접 또 한잔을 퍼고 있더란다. 다 먹고나서 얼마냐고 묻고는 호주머리에서 동전을 꺼내어 계산하고 나가더란다.
3>>>>>> 이동원비서실장이 박대통령의 서독방문시에 오는 길에 영국의 런던에 가서 도시계획을 직접 한번 보시는게 좋겠다고 하니까 박대통령이 버럭 화를 내면서 "돈도 없는데 관광이나 다니게 됐어?" 했다.(이동원 회고록에서)
4>>>>>>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으로 남북이 전쟁발발직전까지 갔는데 박대통령은 특별임무를 부여한 작전이 진행중인 그 시간에는 청와대에서 서류를 읽고 있었다. 김정렴비서실장은 전쟁이 나는 걸 기정사실로 알고서 안절부절 못했다.
마침내 김정렴비서실장에게 보고가 올라왔다.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북괴놈들은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는 ...... 김정렴비서실장은 너무 기뻐서 급히 박대통령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집무실로 달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박대통령은 쳐다보지도 않고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상태대로 급히 성공적인 상황종료를 보고하자 박대통령은 시선을 서류에 그대로 고정한채 이렇게 말했다. "그렇겠죠. 알겠습니다." 김정렴비서실장은 이때의 장면을 회고하면서 "그 작은 체구가 그땐 그렇게 크게 보일 수가 없었다."
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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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문경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어느날 학교근처에서 여학생이 물에 빠져서 야단이 난 적이 있었다. 교사들이 우왕좌왕하면서 소리만 지르고 있을 때 어깨에 트럼펫을 맨 어느 선생님이 트럼펫을 맨채로 물에 뛰어들어 그 여학생을 구했다 한다, 그 선생님이 박정희선생님이었다고 당시의 학생이 증언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99년 KBS프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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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범학교시절의 학생기록부에 "일본인교사에게 반항적이며 불손하다."고 적혀있다 "(99년 KBS 제작프로에서) 당시 동급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항시 나폴레옹사진을 가지고 다녔으며 프루타크영웅전을 손에 들고있던 걸 기억한다고 증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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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세광이 쏜 총알이 연설대 모서리를 맞고 튕겨나가자 그때서야 위급함을 알아차린 박통은 얼른 자세를 낮춰서 상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상황이 종료되자 박대통령은 아까 읽던 문장의 단어까지 정확하게 찾아내서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는 침착하게 연설문을 읽어나갔다. 연설문을 읽고난 뒤에 무대위를 훑어보고는 육여사의 신발을 발견하곤 주워서 손에 든 채로 걸어나갔다.
8>>>>>>
자유당시절 장군들끼리의 회식자리에서 박통이 이승만을 비난하자 다른 장군이 흥분해서 권총을 꺼내어 "이 새끼. 금방한 말 취소해, 안 하면 죽이겠어!"하고 소리지르며 머리에 권총을 갖다대자 모두 놀라서 숨죽이고 봤다. 박대통령은 눈도 깜짝 안 하고 앞에 있던 빈 술잔에 술을 따라서 붓고는 태연하게 마셨다. 권총을 겨누고 있던 그 장군은 한참있다 스스로 권총을 내렸다. 김재규의 총을 가슴에 맞고도 꼿꼿한 자세로 그대로 있어서
옆에 있던 심수봉은 총알이 빗나간 줄 알았다고 증언했다. 나중에 앞으로 쓰러지자 놀란 심수봉이 "각하! 괜찮으십니까?" 하고 묻자 "응, 나는 괜찮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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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이 돌아가시고 얼마뒤 朴대통령의 일본지인들이 서울신당동으로 유족들을 위로방문한 자리에서 차대접을 받는데 이 사람들이 가만보니 찻잔하고 잔받침하고
하나도 짝이 맞는게 없더라는것입니다.
이에 이 일본인들은 "아! 박정희는 죽어서도 교훈을 주는 사람" 이라며 입을 다물지 못하더라는것입니다.
18년간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사람집에 제대로된 다기세트 하나가 없으니 놀랄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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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사건당일,서울육군통합병원의 당직군의관이었던 정규헌대위는 사건직후 합수부조사에서 이런말을 합니다. "응급실에 안치된 시신이 VIP일것이라고는 어느정도 짐작했지만 대통령일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못했다.
바지는 도대체 몇번을 수선했는지 수선흔적이 역력했고,혁대는 다 헤져있었으며, 넥타이핀도금도 다 벗겨져있었다.시계도 흔해빠진 세이코였다"
朴대통령은 사건당일 아침에도 보좌관을 시켜 바지의 허리부분을 수선해오게했고 결국 그 바지를 입은채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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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6 자동소총 과 박정희
지금 적고자 하는 이야기는 어떤 책에서 나온 이야기로서, 실화임을 먼저 밝히고자 한다.
단지 그 책의 내용과 저자명, 책의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관게로 이 글을 읽고 이 내용이 적힌 책의 내용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책의 원문과 제목, 저작자를 함께 밝혀주셨으면 한다.
때는 한국군 육군 맹호부대의 파병으로 월남전의 열기가 한참 뜨겁게 타오르고 있을 때 였다.
월남전참전 당시에 전세계가 한국을 비난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였지만 그들은 그런 한국을 보고 비난만 해대었을 뿐이었지, 누구도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쌀한톨, 기름 한방울 원조해주지 않았었다.
그런 우리에게 그나마 조금의 원조라도 해준 국가가 있었으니 그 국가가 바로 미국이었다.
박정희대통령의 과거 남로당의 행적이 미국수뇌부의 의심을 받아, 미정부에서는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보복조치로 당시 대한민국 1년 예산의 80%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던 우리는, 당장 미국이 제공해주는 원조를 중단당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전 국민이 그야말로 아사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음을 느껴야만 했었다.
그런 위기의 순간에서 한국과 미국이 다시 우호적인 관계로 돌아서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박정희대통령의 월남전 참전결의였다. 당시 우리에게는 주어진 선택의 길이라는 것이 없었다. 월남전에 참전해서 미국이 원조를 재개해준다면 국민을 생각해서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입장임을 옳게 알아야만 할 것이다. 반드시 생각해두자.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가난한 대한민국, 굶어죽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쌀한톨, 기름 한방울 제공해주지 않았음을..
그러면서 그들은 대한민국이 하는 일에 대하여 내정간섭을 시도할려고 했다는 것을. 나라가 가난하면 전세계가 그 국가를 자신의 노예로 인식하려 한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야기는 그 당시의 미국의 유명한 군사무기제조업체인 맥도널드 더글라스사(한국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의 발사때 많은 기술자문과 발사를 도와주었음-돈주고
샀다고 표현하는게 더 정확하다고 생각됨.)의 중역인사가 한국을 방문해서 박정희대통령과 나누었던 실화를 공개하는 것이다.
한국의 월남전 참전으로 소원해진 미국과의 관계가 다시 우호적이었고, 한국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버리는 대가로 많은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의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이전을 받게 된다.
그 지원중의 하나가 M-16자동소총이었다.
이전의 한국에서 사용하던 무기는 단발식 카빈 소총으로서 M-16과는 비교할 바가 못되는 그야말로 장난감과 같은 수준의 무기였었고 우리는 그런 무기를 들고 남북대치상황을
견디어 내어야만 했었다. 한국이 월남전에 군사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얻을 수 있었던 M-16의 제조.
수출업체는 맥도날드 더글라스사였다.
미 행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의 수출건을 따내게 된 뒤, 한국을 방문한 맥도날드 더글라스 사의 한 중역은 자신들의 무기를 수입해주는 국가를 찾아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하게 된다.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것도 너무도 더웠던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나(맥도날드 더글라스사의 중역)는 대통령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박정희대통령의 집무실로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그리고 비서관이 열어주는 문안의 집무실의 광경은 나의 두 눈을 의심케 만들었었다.
커다란 책상위에 어지러이 놓여진 서류더미속에 자신의 몸보다 몇배는 더 커보이는 책상위에 앉아 한손으로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남은 한손으로는 부채질을 하면서 날씨를 이겨내고 있었던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한나라의 대통령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었다.
아무리 가난한 국가라지만 그의 先痔?도저히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기조차 힘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의 모순이 내
안에서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손님이 온 것을 알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옷걸리에 걸린 양복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가 런닝차림으로 집무를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미국 맥도널드사에서 오신 데이빗 심프슨씨입니다." 비서가 나를 소개함과 동시에 나는 일어나 대통령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많으셨소. 앉으시오."
한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긴장 탓인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굳게 매어진 넥타이로 손이 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나 혼자 있는 이 넓은 방에서 그것도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튼다는게 큰 낭비인 것 같아서요.
나는 이 부채바람 하나면 바랄 게 없지만 말이오. 이 뜨거운 볕 아래서 살태우며 일하는 국민들에 비하면 나야 신선놀음이 아니겠소. 이보게. 비서관! 손님이 오셨는데 잠깐동안 에어컨을 트는게 어떻겠나?"
나는 그제서야 소위 한나라의 대통령의 집무실에 그 흔한 에어컨 바람 하나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만나봤던 여러 후진국의대통령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의 말에 제대로 대꾸할 수 없을만큼 작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네. 각하." 비서관이 에어컨을 작동하고 비로소 나는 대통령과 업무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 나는 내가 한국을 방문한 목적을 그에게 이야기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각하. 이번에 한국이 저희 M-16소총의 수입을 결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한국의 국가방위에 크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들이 보이는 작은 성의..." 나는 준비해온 수표가 든 봉투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그(박정희대통령)는 봉투를 들어 그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흠.. 100만 달러라...내 봉급으로는 3대를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큰 돈이구려.." 차갑게만 느껴지던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머물렀다.
나는 그 역시 내가 만나본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임을 알고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실망이 처음 그에 대해 느꼈던 왠지 모를 느낌이 많이 동요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이돈은 저희 회사에서 보이는 성의입니다. 그러니 부디..
" 대통령은 웃음을 지으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하나만 물읍시다."
"예. 각하." "이 돈 정말 날 주는 것이오?" "네. 물론입니다. 각하." "대신 조건이 있소. 들어주겠소?"
"네. 말씀하십시오. 각하." 그는 수표가 든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되돌아온
봉투를 보며 의아해하고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자, 이돈 100만 달러는 이제 내돈이오.
내 돈이니까 내 돈을 가지고 당신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소. 지금 당장 이 돈의 가치만큼 총을
가져오시오. 난 돈 보다는 총으로 받았으면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해주리라 믿소" 나는 왠지모를
의아함에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이 나에게 준 이 100만 달러는 내 돈도, 그렇다고 당신돈도 아니오.
이 돈은 지금 내 형제, 내 자식들이 천리타향에서 그리고 저 멀리 월남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내 아들들의 땀과 피와 바꾼 것이오. 그런 돈을 어찌 한나라의 아버지로서 내 배를 채우는데 사용할 수 있겠소. 이 돈은 다시 가져가시오. 대신 이 돈만큼의 총을 우리에게 주시오."
나는 낯선 나라의 대통령에게 왠지 모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일어나서 그에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각하.
반드시 100만달러의 소총을 더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나는 방금전과는 사뭇다른 그의 웃음을 보았다. 한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한 아버지의 웃음을.............그렇게 그에게는 한국의 국민들이 자신의 형제들이요, 자식들임을 느꼈다. 배웅하는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을 다시 한번 둘러본 나의 눈에는 다시 양복저고리를 벗으며, 조용히 손수 에어컨을 끄는 작지만 너무나 크게 보이는 참다운 한나라의 대통령으로 보였다.(퍼온글)
12>>>>>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
최근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눈물’이라는 글이
인터넷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기성세대의 땀과 노력, 그리고 박 전 대통령의 일화를 담은 이 글에
20, 30대 네티즌들은 ‘우리 세대의 가벼움을 반성하게 됐다.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났다’며 공감을 표명하고 있다.
이 글은 육군사관학교의 김충배 교장이 지난해 11월 생도 교육에 사용해
그동안 ‘육사교장의 편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제 작성자는 예비역 장성인 김유복(金遺腹·79)씨.
그가 지난해 6월 로터리코리아(한국로터리의 기관지)에 기고한 글은
“60대를 수구 골통이라 몰아붙이는 젊은이들이여!
이 글을 읽어 보렴”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 들이여!
여러분들은 5,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과연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지난날 5,60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한다면 아시아, 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 바다가 되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 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해서 부쳐진 별명이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박 대통령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 줄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
코리안 광부 만세!
코리안 엔젤 만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 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 강당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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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께서 1962년 대통령에 취임하시고 나서 다짐하셨던 것이 내치와 외치를 모두 성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행정부의 수반과 국가 원수의 지위에서 내치에 성공하고,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할 지위에서 외치에 성공하겟다는 다짐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역사상 내치와 외치를 모두 성공한 대통령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됩니다. 일본과 호주는 외치에 실패햇지만 내치에 성공해서 근대화한 경우이고, 미국은 세계대전에 승리함으로서 외치에 성공한 경우입니다.
한국은행 총재가 꼽은 6.25이후 우리나라의 성장 과정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때가 1960년대였다고 합니다. 이 시절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겠죠.
박대통령께서 외치에 성공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가장 염두에 두신 것이 수출입국의 기반을 닦는 것이며 선진국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박대통령께서 정부 관료들에게 자주 하신 말씀이 '국민들을 배신하지 맙시다' '국민들에게 하면된다는 자신감을 줍시다' 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GATT 가입 과정에서의 에피소드를 소개 합니다.
대통령과 당시 정부의 외무 재무 관료들이 수출국가로서 발돋움을 하기 위해 GATT 가입을 추진했는데, 이 GATT 가입 준비만 4년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 GATT가입이란게 그냥 신청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입신청을 한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무역을 할 만한 나라인지, 무엇을 생산하는 나라인지에 대해 GATT 본부에서 심사를 하고, 기존 회원국들의 대표들이 투표를 해서 결정하게 됩니다.
GATT 기존 회원국들의 투표로서 가입이 결정하는데 회원국의 대표들중 2/3가 찬성해야 가입허가가 됩니다.
한국이 GATT 가입을 하기 위해, 태스크 포스팀이 만들어 졌고, 치밀한 준비를 하게 됩니다.
1966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GATT 총회에서 가입신청을 하기 위해 이 팀이 출국하게 됩니다.
그런데, GATT 가입을 하기 위해서는, GATT 위원들과 많은 협상을 해야 했었고, 기존 GATT 회원국의 대표들에게 한표 부탁한다는 로비도 해야 될 필요가 있었겠죠.
그런데, 그 당시 대한민국이 무슨 돈이 있었겠습니까? 가트가입을 위한 태스크 포스팀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5개월 동안 채제하는 동안 여관에서 머무르고 여관방에서 직접 밥을 해 먹으면서 많은 고생을 햇다고 합니다.
한번은, 이 분들이 GATT 위원들과 기존 가입국가 대표들에게 식사라도 대접할 수 있도록 본국에서 돈을 좀 보내달라고 요청를 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의 재정은 너무나 가난했지요.
부총리에게 이 보고를 받은 박대통령이 하신 말씀이
"부총리.. 내 월급을 가불해서 보내시오..."
15>>>>> 청렴했던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의 전속 이발사가 중앙일보 기자에게 말한 증언을 인용하겠다.
"박 대통령, 그 양반을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런닝셔츠를 입었는데 낡아 목 부분이 해져있고 좀이 슨 것처럼 군데군데 작은 구멍이 있었어요. 허리띠는 또 몇 십년을 사용했는지 두세 겹 가죽이 떨어져 따로 놀고 있고 구멍은 늘어나 연필 자루가 드나들 정도였다니까요. 자기 욕심은 그렇게 없던 양반이......"
16>>>>그는 또 변기물을 아끼느라고 그의 욕실에는 변기 물통에 벽돌을 한 장 고여놓았다. 이 사실은 그가 죽은 다음 나중에 보안사 수사팀에 의해서 발견된 것이다. 이것을 발견하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7>>>> 중요한 사안을 결정할 때는 10-20일 동안 회의하고 사색하는 등 주야로 골몰해서 그 때마다 십이지장 염증이나 궤양을 앓게 되었으며 그 때마다 주치의의 치료를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김정렴(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또 몇가지의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박정희는 여름에 대통령 집무실에서 늘 파리채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것은 집무실의 에어콘을 전기 아끼느라고 틀지 않고 늘 유리창문을 열어놓기 때문에 밖에서 파리들이 날아 들어와서 늘 파리채로 잡거나 쫓아야 했던 것이다. 세상에 어느 최고 통치권자가 그 집무실에서 파리채로 파리를 쫓으면서 집무를 하였을까.
박 대통령이 서거하신 뒤 며칠 후에 당시 군의관이었던 정규형 대위는 자신이 10.26 당일 담당한 응급 환자가 대통령이었던 사실을 몰랐던 이유에 대해 합수부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당시 박 대통령이 차고 있던 시계는 평범한 제품이었고, 넥타이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해져있어 대통령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오일쇼크 이후 물자 절약운동이 국가적으로 행해지고 있던 때에 물을 절약하기 위해 청와대 1층 집무실 옆 전용 화장실과 침실 옆 욕실 변기의 물통 속에 남몰래 벽돌 한 장씩을 넣어둔 일화는 그의 소박함과 솔선수범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널리 회자되고 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최고 권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재임기간 내내 국민들에게 근검절약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또한 서거 이후에 국민들 속에 남아 있는 그의 향수를 지우기 위해 후속 정권들이 집요한 노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재임기간 중 부정축재나 권력남용형 비리에 관여한 사실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