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필자가 매월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미식가 모임에서 마침 자동차가 화제가 되어 참석한 회원들과 오랜 시간 자동차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통상적인 대화 도중에 필자의 심중을 깊이 흔든 말은 개인 건축사무소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면서 각종 미디어에 컬럼도 연재하고 있는 유명한 건축가 한 분이 ‘ 나는 돈도 없고 물건도 많이 싣고 다녀야 하니 큰 차가 필요해 구형 SM5를 타고 다니는데, 디자인이 평범하고 지루하긴 하지만 어딜 가도 왜 이걸 타고 다니냐고 물어 보는 사람이 없어 아주 마음이 편하다’ 라고 무심하게 던진 한마디였다.
사실 개성과 창의력을 중시하는 건축가가 활력을 주거나 영감을 주는 차를 타고 다녀야지 무색무취의 별 느낌이 없는 차를 타고 다니면 되겠냐고, 돈이 없으면 중고라도 그런 차를 사서 타고 다니라고 평소에 그 건축가를 구박하던 필자라 그 자리에서도 한번 더 가벼운 구박을 주고 웃으면서 화기애애하게 모임을 끝냈다. 그런데 건축가의 그 한마디가 계속 필자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는 것이다. 어디를 타고 가도 왜 이런 걸 타고 다니냐고 물어 보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무난하다는 것인데, 어떤 차종이 무난하다는 것은 딱히 내세울 특별한 것은 없지만 차 값이나 크기, 브랜드 등의 관점에서 4,50대 중년층이 아무 생각 없이 타고 다니기에 적당하다는 공통된 인식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음을 얘기한다.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이나 호주 같은 곳에서는 SM5 정도의 차는 Compact Car로 분류되어 일상생활의 기본 필요(Basic Needs)를 충족시키는 소형차의 범주에 들어 간다. 이런 소형차의 범주에서는 특별한 멋이나 성능을 추구할 것도 없이 그저 품질 좋고 쓰기 편하면서 서비스만 잘되면 그만인, 그야말로 무난한 차들이 인기를 끈다. 도요타의 캠리(Camry)나 시보레 말리부(Malibu) 같은 차종들이 이러한 기준에 적합한 대표적인 차종이고, 역시 인기있는 혼다 어코드(Accord)가 나름대로의 스포츠성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나 약간의 스타일 특성과 브랜드 이미지 마케팅의 결과일 뿐 근본적인 차량의 특성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러한 외국의 기준이 인구과밀의 작은 나라인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비싼 중형차에 속하는 차종이 말이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큰 차를 좋아하는 것은 우리나라 자동차문화의 후진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는 해도 우리나라 자동차시장의 큰 특징으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에 그대로 받아 들이기로 하자. 국내 메이커 수가 적고 아직 수입차는 비싸고 눈치가 보이니 국내 소비자가 살 수 있는 차종도 불과 몇 가지에 국한된다는 것도 인정하자. 문제는 그러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들도 왜 천편일률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무난하고 남들이 다 타고 다니는 차만 좋아하냐는 것이다. 차량 색상도 온통 검은색 아니면 회색, 흰색으로 통일되어 있다시피 하다. 혹자는 국내 메이커들이 원가측면에서 제한된 색상의 세단 승용차만 만들어 팔기 때문에 그렇지 않냐고 얘기하기도 하나, 국내 메이커에서 상품기획을 해 보았던 필자는 오히려 국내 수요가 없기에 메이커들이 중형차에서 다양한 색상이나 3도어나 왜건 같은 다양한 제품군을 구성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충분한 수요가 있으면 돈이 되는데 왜 만들지 않겠는가?
인생에 있어 4,50대는 그 동안 공들여 쌓아 온 자기만의 세계를 화려하게 꽃피우는 시기다. 혹자는 2,30대가 개성만점의 활력있는 시기고 중년층은 그냥 별 생각없이 관성에 의해 살지 않냐고 이야기하나, 사실 그 젊은 나이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각 개인의 성격이 강하게 표출되기는 해도 각자의 인생 경로도 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나름대로의 지식과 연륜도 충분치 못하여 그저 수선스럽고 서투른 경쟁에 어수선하기만 하다. 각자 걸어 온 길에 우열은 없고 단지 다를 뿐이라는, 그렇게 나와는 다른 너를 인정할 때에 각자의 개성이 긍정적으로 두드러지기에 나이나 지위로 보아 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4,50대의 자기 긍정과 개성은 우리 사회의 건전한 발전과 다양화에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다른 계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서적, 시간적, 금전적 여유도 있지 않은가?
현대 생활에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키우고 나타내는데 자동차가 얼마나 중요한 도구인가? 그러나 우리나라 중년층의 카라이프는 무미건조하기만 하고 이는 4,50대 중년층의 생활 자체가 획일적이고 편안함만을 찾는 데 익숙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생존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지만, 잘 놀 줄을 몰라 그저 술이나 잡담, 잡기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고(사실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가 풀릴까?) 주말에는 지쳐서 꼼짝하기를 싫어하지 않는가? 주말에도 일이 밀려 직장에 나가거나 기껏해야 가족들 성화에 못 이겨 놀이공원이나 야외 드라이브에 동원되어 지친 몸을 추스리며 노력봉사 함에 자족할 뿐이다. 그래도 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취미활동을 하고 운동도 이것 저것 다양하게 할 수도 있을 텐데,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일수록 왜 그렇게 예외 없이 골프에만 매달리는지도 의문이다. 치는 사람마다 싱글이 못되어 안달이고 필드에 나가서는 골프도 대학입시나 업무처럼 죽기살기로 점수 위주로 친다. 골프를 통한 교유(交遊)와 여유로운 인생 즐기기라는 덕목은 돈 내기와 캐디의 ‘빨리 하세요!’ 성화 속에 묻혀지고 만다. 이렇듯 자신의 즐거운 개인생활을 추구하면서 주위와 어울려 여유있게 살지 못하고 일년 내내 업무와 인간관계로 인한 팽팽한 긴장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차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복잡하게 뭘 따지고 신경 쓰는 걸 싫어하게 되어 자동차도 그저 ‘대재벌의 브랜드 제품이니 망신 안 당하려고 당연 잘 만들고 서비스도 잘 하겠지’라는 생각에다 ‘남들이 많이 타는 게 좋겠지’라는 막연한 마음으로 구매결정도 이것 저것 따지고 비교하지 않고 비교적 쉽게 내린다. 그 동안 살아 오면서 험한 꼴도 많이 겪었는지라 주위의 눈치와 평가에 민감하고 그러다 보니 보신의 차원에서 튀지 않도록 남들과 맞추어 같은 차종을 고르기도 한다. 차 자체도 모나지않은 디자인에 비례균형이 맞는 차를 좋아하고, 차가 커서 심리적 만족을 줌과 동시에 그저 조용하고 푹신한 걸 너무나 좋아한다. 사람마다 성격과 모습이 다 다른 것처럼 자동차란 것도 차종별로 만드는 사람들이 다 다른지라 각기 개성과 장단점이 있는데, 우리나라 자동차시장은 많이 팔리는 ‘좋은 차’와 사람들이 잘 타지 않는 ‘이상한 차’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상한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어딜 가도 왜 그걸 사게 되었냐고 질문을 받게 되어 있다. 몇 년 전에 인기없는 어떤 브랜드의 차를 타고 다니면 그 브랜드의 그룹에서 일하는 친척이 있나 보다라고 사람들이 우스개 소리를 한 적이 있었지만, 품질이나 기능 수준이 다 비슷해진 요새 와서도 이러한 수요의 쏠림 현상은 별 개선되고 있지 않아 적지 않이 우려가 된다. 이래서는 우리나라의 자동차문화가 제대로 발전할 수가 없다.
비단 국내 브랜드에만 국한된 현상도 아니다. 수입차 시장을 보아도 차량가격이 비쌀수록 남들이 많이 타고 쉽게 알아보는 브랜드의 4도어 세단 승용차에 집착한다. 예를 들어 BMW나 벤츠의 2인승 로드스터 같은 차종들은 원래 4,50대 여유있는 계층을 타겟으로 개발되어 왔는지라 실제 선진국에서는 개성있는 생활을 즐기는 나이 지긋한 반백의 신사나 숙녀들이 주로 타고 다닌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젊은 사람들이 폼 재려고 거칠게 운전하고 다녀 보기에 영 어색하다. 해외 시장에서의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헤메던 폭스바겐(VW)이 최근 들어 판매가 급신장한 것은 4 도어 세단 파사트(Passat)와 제타(Jetta)가 들어 왔기 때문이다. 폭스바겐이 차량 판매가격을 대폭 낮춘 것도 큰 요인이기는 하나, 단순히 가격만으로 보기에는 그 동안 아무리 싸게 주어도 해치백 스타일인 골프(Golf)의 판매가 극히 부진했던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차종이 제한된 국내 브랜드와는 달리, 각자 갈고 닦아 온 라이프스타일이 있고 그에 맞는 차종을 고르려고 한다면 선택의 폭이 충분한 수입차 시장도 이런 걸 보면 현재 우리나라 4,50대의 삶이 은행의 잔고금액과는 관계없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팍팍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4,50대가 변신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좋겠지만 이미 그렇게 오랜 시간 살아 왔기에 새로이 변화하기가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느 서양 철학자의 말처럼 노인이라는 종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니 얼마 안 있어 중년층이 될 지금의 2,30대 청장년층부터라도 생활의 여유를 가지고 누가 뭐라든 자기만의 개성있는 삶을 추구하길 진정으로 바란다. 그래야 머지 않아 거리에서 깜직한 소형차, 날씬한 왜건, 터프한 픽업을 타고 다니는 개성 만점의 ‘젊은 오빠’들을 만나게 될 테니 말이다. 무난함보다는 다양한 개성들이 어우러질 때 그 힘으로 인해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은 물론 사회 전체가 한층 발전되고 더 재미있는 곳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