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녀가 웃는다
여자화장실을 뛰쳐나온 나는
부리나케 카운터로 달려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허억...허억...하악하악하악하악...아앙...”
......
...이건 아니고...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무도 없는줄 알았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그곳은 금남의 구역,
여자화장실이었으니까.
어쩔 줄을 몰라
카운터 밑에 짱박혀 있던 나는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고개를 빼꼼 내밀어
그녀들이 앉아있는 자리를 쳐다보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지
두 여자는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하고 있다.
귀염녀는 아직도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은 듯 하다.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으리라.
아아,
나는 이제
무슨 낯짝으로 그녀를 볼 것인가.
이대로 그녀와 마주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리저리 좋지도 않은 머리를 최대한 굴려가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본다.
없다.
방법이 없다.
어쩌면 좋지? 어떻게 할까?
자, 당신이라면?
1.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대로 무릎을 꿇고 빈다.
2.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한다.
3. 뭐야. 그녀가 나빠. 화장실에 가면 간다고 얘길 했어야지.
4. 월급도 받았겠다, 이대로 튄다.
5. 자살해 병신아. 넌 살 가치도 없어.
자.
수능기념 오지선다형이다.
......
5번을 선택했다면 굉장히 미안하다.
2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3번을 선택하신 분,
당신은 정말 훌륭한 정치가가 될 것이다.
어쩜 그리도 뻔뻔한가.
나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므로
당신들처럼 극단적인 생각은 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없는 최선의 길은...
...없다.
피하자.
일단 피하자.
무조건 피하고 보는거다.
그렇다고 이대로 월급봉투만 들고 튀기에는
조폭형아들에게 시달리며 벌어놓은
20여만원이 너무 아깝다.
또한 튄다고 하더라도
이곳 피씨방에서 우리집까지는
고작 10분거리.
이런 일로
이사를 갈 수는 없지 않은가.
......
사실...
그때 당시만 해도
진지하게 이사갈 것을 고민해보았었다.
어쨌거나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어찌됐든 이 가게 안에서
그녀와 마주치지만 않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우선은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들고
화장실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여자화장실은 남자화장실과 나란히 있으므로
의심받을 일도 없다.
그렇게 서성거리다
여자화장실 안쪽에서
물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자
잽싸게 뛰어가서 청소를 하는 척 했다.
물론,
그녀들이 앉아있는 곳에서
직선거리상으로 가장 먼 곳이다.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타박타박 그녀의 발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발소리를 기점으로
죵나게
진짜 아주 죵나게
피씨방 바닥을 쓸었다.
마대질을 하지 않고도
빗자루만으로 바닥을 번쩍거리게 할 수 있음을
그때
알바한지 한달만에
처음으로 알았다.
때는 아직 늦은 여름이었던지라
새벽이라고는 해도
좃빠지게 쓸다보니
땀이 주륵주륵 흐른다.
내가 할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으므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죵니 열심히 청소하는 수밖에 없었으므로.
한참을 그렇게 쓸다보니
허리가 아파오고 눈앞이 노래진다.
바닥만 쳐다보며 그토록 열심히 쓸어댔으니
현기증이 일어날 만도 하다.
쏟아지는 어지럼증에
어쩔수 없이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물론
그녀들이 앉아있는 반대편을 향해.
그렇게 아주 잠깐
단 몇 초 동안을 쉬고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이다가
왠지 모를 위화감에 살짝 머리를 들어본다.
없다.
아무도 없다.
그 넓은 피씨방 안에서
오직 나홀로
대가리를 숙인 채 바닥을 쓸고 있다.
겨우 한숨을 돌린 다음
카운터로 돌아가 보니
카드 세 개가 나란히 올려져 있다.
가버렸구나.
다시 생각해보니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든다.
차라리 욕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걸.
아니,
싸대기라도 한 대 날려줬으면 좋았을걸.
하긴,
처음 본 순간부터 오늘까지
꾸준히 변태인 새끼랑
무슨 대화를 하고 싶겠는가.
시간이 흐르고 교대자가 왔다.
나는 멍한 얼굴을 한 채로
인수인계를 하는둥마는둥 하고
넋이 빠진 모습으로 퇴근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늘 마침 쉬는 날을 허용해준 사장에게
진짜 처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
.
.
눈을 떠보니 벌써 오후 8시다.
피곤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샤워를 한다.
이제 곧 저녁을 먹고
잠시 티비를 보다가 출근...
...이 아니라
오늘은 쉬는날.
오랜만에 친구놈을 불러다가
술이나 한잔 얼큰하게 취해보아야겠다.
문득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을 훑고 지나간다.
그때 당시의 상황과
텅빈 피씨방에서 좃빠지게 비질을 하는 모습이 오버랩되자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열한다.
잊자.
잊어야지.
오늘은 즐거운 날,
한 달만에 찾아온 달콤한 휴식.
오늘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즐겁게 놀아보세.
......
......
...안 잊혀지잖아 씨발;
그래.
마시자.
이 크나큰 시련을 잊게 해줄 존재는
오직 술밖에 없다.
힘빠진 손가락으로
간신히 지훈이 녀석의 번호를 찾아 누른다.
“뚜르르르르 뚜르르...찰칵...왜 임마.”
“...나와라.”
“이 시벨늠이 지랄하네. 나가긴 뭘 나가 병신아.”
“...쏜다.”
“......”
“......”
“...어디니 친구야.”
나올거면서 씨발롬.
첫마디부터 욕이나 내뱉다가
쏜다는 한마디에
쓰레빠 차림으로 좃;날리게 뛰어나온 녀석을
열린 마음으로 비난하다가
함께 술집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에서 술을 마실 만한 곳은
다리 건너편 유흥골목 밖에 없는데...
편의점에서 소주 사다가
김밥천국 가서 몰래 먹자는 내 의견을 묵살한 채
지훈이 녀석은 벌써 저만치 걷는다.
마침 지금 시간은 9시.
잘못 방황하다가 그녀들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안되는...
......
...벌써 걸렸구나.
어차피 아저씨들 가는 노래주점 따위는
엄두도 낼 수 없으므로
호프집을 찾아가야 하는데
바로 그 호프집으로 가는 길목에
우리의 ‘딸기’가 서 있다.
그 ‘딸기’를 10여미터 앞에다 두고
걸음을 재촉하던 중,
막 피씨방으로 올라가려던 그녀들을 발견,
그중 볼륨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슬쩍 눈만 마주친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꼰질르진 않겠지? 꼰질르진 않겠지? 꼰질르진 않겠지? 꼰질르진 않겠지?
젠장...
꼰질르나 마나 내일이면 또 봐야 되잖아.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오랜만에 술이나 퍼먹고
모든 것을 잊어보자.
오랜만에 고딩때부터 친구인 지훈을 만나
날이 새도록 술을 퍼마시고
아침 8시가 넘어서야
어기적어기적 집에 기어들어갔다.
.
.
.
황금같은 하루 동안의 휴가는
그렇게 터무니없이 날아가버렸다.
오후 9시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캄캄해진 바깥 하늘을 보고
정확히 아홉 번을 울리는
뻐꾸기를 보고
또다시 바닥을 뒹굴며
미칠듯이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다시 출근해야 한다는 부담감보다
조폭형아들을 다시 만나야 한다는 아찔함보다
그녀들과 마주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들을 보는 것은
내 근무시간의 유일한 낙이었는데...
무엇 때문에 나는
그녀들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서
출근마저 기피할 정도가 되어버렸는가.
간신히 몸을 추스리고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옷을 입었다.
어차피 출근은 할수밖에 없으므로
이제는 부딪히는 수밖에 없지.
......
뭐...
일단 피하는데까지는 피해보고...;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전히 호감가지 않는 경림의 얼굴이
나를 반긴다.
“...사장님은?”
“어제 밤새고 오후까지 있다가 들어가셨어요. 오늘은 안나오실거래요.”
흠...
이런 식으로 어제의 복수를 하는구나.
쫀쫀한 사장 같으니...
내가 막 출근한 시점부터
사장이 퇴근하는 시간까지가
가장 바쁜 시간대라
혼자 가게를 보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사장과 같이 있는 것보다는
부담은 훨씬 적다.
조심스레 힐끔 가게를 둘러보니
그녀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은 오지 않을 건가?
경림이 퇴근하고
한껏 고조된 긴장을 풀며
퍼질러 앉았다.
오지마라. 오지마라. 오지마라. 오지...
......
...왔구나.
세 여자는 오늘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최대한 그녀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 딴짓을 하는 척 했다.
그래봐야 어차피 마주하게 될 것은 알고 있다.
그녀들은 야간정액을 끊을 것이므로.
“정액 세 자리요.”
만원짜리 하나와 오천원짜리 하나를 내밀고는
카드 세 장을 집어
늘상 앉던 그 자리로 걸어간다.
다행이다...
뭐 하긴,
할말도 없겠지만
있어도 하고 싶지 않겠...
......
...뭐 뭐야;
돌아간 줄로만 알았던 그녀들
정확히 말하면 귀염녀가
카운터 앞에 서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아...저...그게...아...왜 왜...?”
“......”
당황하여 말이 더듬어진다.
그러나 그녀는 말이 없다.
잠시 뜸을 들인 다음에야
조용히 입을 연다.
“...어제는...안 보이시던데...”
“...아...네...저...어 어제는...쉬는...쉬는날인데...”
어제 만나서 따질 생각이었나?
그녀가 무슨 말을 할까
풀렸던 긴장감이 확 조여지면서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내가 먼저...
변명을 해 보아야 하나?
“...아...저...그 그때는...저...아무것도 못봤는데...지 진짜로...”
“......”
“...지...진짠데...”
“...알아요...”
아아 이제는 도저히
회생의 방법이 없는 것인가.
‘알아요’라니...
......
...어라?
뭘 안다고?
“네? 아 저...무 무슨...?”
“...그때...화장실에서...볼일 보던거 아니었거든요...”
그 말을 마친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서 있더니
이내 양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와아...
그녀가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