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녀가 왜
“...그쪽은...이름이 뭐예요?”
세 여자가 차례로
회원가입을 끝내자
노모녀가 내 이름을 물어온다.
마치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 것은
회원가입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듯이.
“네? 제...이름...이요?”
“......”
노모녀를 비롯,
세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
당연히 너도 이름을 밝히라는
시위처럼 보인다.
“아...네...저 저는...재석입니다. 유...재석...”
24년간 수없이 내뱉아온
고작 내 이름 석자를 끄집어 내는데
왜 이리도 떨리는 건지.
결국 내 이름을 받아낸 후에도
그녀들은 전혀 동요가 없다.
사실
그녀들이 내 이름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나는 그냥 이 가게의 알바생에 불과하므로.
“...수고하세요.”
애초부터 내 이름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는 듯이
짤막하게 내뱉고는 돌아선다.
......
왜 물어봤냐...
그녀들이 떠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녀들에게 이름을 물어본 것과
그녀들이 내게 물어본 것은
분명히 다른 의미이다.
비록 그 동기가 불순하다고는 하더라도
내게는 분명히 명분이 있다.
회원가입을 위해
어쩔수 없이 알아야만 한다는 명분.
그러나 그녀들이 내 이름을 물어온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정보수집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그녀들에게
일방적으로 관심을 보인 것은 내쪽이었다.
그녀들은 근 한 달 동안
내게 눈길을 준 적도 없었으므로.
그러나 오늘의 입장은
분명히 다르다.
나는 지극히 공적인 사정으로
그녀들의 이름을 물었고
그녀들은 어떠한 명분도 없이
내 정보를 요구했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지.
그러고보니,
그뿐만이 아니구나.
마지막에 짧게 내뱉은
‘수고하세요’라는 말.
근 한달 동안이나 그녀들을 봐 오면서
한번이라도 내게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카드를 내밀고 조용히 돌아서는 그녀들에게
답변은 기대하지도 않은 채로
“안녕히 가세요.”라고
일방적으로 말해왔던 것은
내쪽이 아니었던가.
나는
이로써
그녀들에게 한걸음 다가선 것일까.
궁금증을 뒤로 한 채
마무리 정리를 하고
교대자가 오기를 기다린다.
늦여름의 아침햇살은
여전히 따끔하다.
나는
텅빈 피씨방에 혼자 앉아
조금 전에 입력한 그녀들의 이름을
속으로 더듬는다.
.
.
.
집으로 돌아와서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는
털썩 방바닥에 주저앉는다.
이채연, 김혜수, 임수정.
그녀들의 이름이 다시
머리 속에 하나하나 떠오른다.
이름을 알았다는 것,
아니,
서로가 이름을 주고받았다는 것은
서로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일까.
오늘은 아무래도
잠을 이루기가 힘들 듯하다.
.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그마치 12시간이나 푹 자고 일어났다.
다른 날보다도
훨씬 더 긴 시간을 처자빠져 자버렸다.
부랴부랴 샤워를 끝내고는
곧바로 출근할 준비를 한다.
여기서 가게까지는 고작 10분 거리이므로
아직까지 충분히 여유가 있음에도
벌써부터 준비를 마치고
소풍가는 어린애마냥 설렌다.
다시 그녀들을 만날 것이므로.
오늘은 무슨 말을 할까.
새벽에는 이름을 주고받았으니
오늘은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알아갈 수 있을까.
......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의 완벽한 오산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껏 긴장하여 출근했음에도
그녀들은 예의 그 모습으로
완전히 돌아와 있었다.
출근해서 일을 하는 내내
그녀들은 단 한번도 내쪽을 봐주지 않았고
어제와 같은 대화를 기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회원가입을 권한 것은
오히려 악재로 작용했다.
이제 그녀들은
카드를 반납하기 위해
카운터로 다가오는 일도 없이
이 피씨방에 대한 용건이 끝나면
조용히 나가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애초에 야간정액을 권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이 마지막으로 나갈때
카운터로 와서 계산을 하는 시간을 없애버린 것도
내가 아니었던가.
그녀들에게
말이나 한번 걸어볼 요량으로 시작한 행동들이
지금에 와서는
커다란 벽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그녀들과 한 마디도 나눌 수 없었다.
간신히 얻어낸
그녀들과의 교감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 것인가.
그러는 사이에
훌쩍 가을이 다가서고 있었다.
비록 잠을 자느라
낮의 햇살은 느끼지 못했지만
점차 길어지고 있는
노모녀의 옷차림만 봐도 알 수가 있다.
그녀들에게 이름을 알려준 지
일주일이 되던 날,
이날도 역시 사장을 퇴근시켜놓고
홀로 카트라이더를 즐기고 있는데
느닷없이 아래층 ‘딸기’의 사장 녀석이 들이닥친다.
“어이 알바야, 여기 컴퓨터 한대 잠깐만 켜봐라.”
이녀석은
늘상 찾아오시는 조폭 형님들보다
훨씬 악질이다.
형님들께서는
내게 잔심부름만을 시키지만
이녀석은 컴퓨터를 켜는 것부터
이런저런 싸이트 회원가입,
게다가 담배심부름까지
마치 나를 종 부리듯 부려먹는다.
이날도 역시 아니나다를까
오자마자 하는 소리가
컴퓨터 부팅을 하라는거다.
나는 잔뜩 골이 났으나
별소리 않고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어쨌거나 손님은 왕이므로.
“이새끼 표정봐라. 내가 자꾸 시키니까 열받지?”
“...아니에요.”
이새끼 알면서 뭘 묻냐.
녀석은 혼자서 온갖 욕설을 섞어가며
이리저리 컴퓨터를 쓰더니
10분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나버린다.
“이거는 달지 말고 그냥 놔둬라. 얼마 안했잖아.”
앞에서 얘기한 적은 없지만
녀석은 우리 가게의 단골이다.
거의 매일같이 피씨방에 와서
리니지를 돌린다.
다만
내가 일하는 새벽시간과
‘딸기’의 영업시간이 겹쳐서
자주 마주치지 않는 것뿐.
그러나 한가한 새벽이 되면
시도때도 없이 들이닥쳐 종종 나를 괴롭힌다.
또한 매번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외상장부를 만들어
그곳에다 기록을 해 놓으면
보름에 한번, 한달에 한번 식으로
한꺼번에 계산을 하는 것이다.
이런 녀석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리 없다.
그리하여 차츰 나는
녀석이 올라오면
표정부터 구겨지는 것이었다.
막 문을 나서려던 ‘딸기’사장은
갑자기 돌아서서 말한다.
“이새끼 너 요새 또 계단청소 안하지?”
“......”
“계단청소 좀 해 임마. 아주 드러워 죽겠어.”
마치 내가 자기네 업소의 종업원인양
잔소리를 하는 녀석에게
잔뜩 화가 났으나
그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어쨌거나 녀석과 부딪히기는 싫었으므로.
‘딸기’ 사장이 나가고 나자
누르고 있던 화가 치밀어 오른다.
“으휴...씨발새끼...”
워낙 더러운 꼴을 많이 당한 탓일까.
나도 모르게 상소리가 입에서 나온다.
나름대로 조용히 내뱉으려 했던 욕설은
적막한 가게 안을 메아리치고
조용히 모니터를 쳐다보던 그녀들이
깜짝 놀란듯 이쪽을 쳐다본다.
“...아...저...아 아니에요. 신경쓰지 마세요.”
오오
이게 얼마만인가,
그녀들에게 말을 건 것은.
그러고보니
어느새 가게 안에 남은 사람은
그녀들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귀염녀가 또 안보이는구나.
또 화장실에 있으려나?
귀염녀가 없다면
그녀들에게 말을 걸 건덕지도 없다.
어찌됐든 가장 가깝게 생각되는 쪽은
귀염녀 뿐이었으므로.
뭐 귀염녀가 있었다고 해도
할 얘기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
예전처럼 그녀들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 주지 않는 한은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들은 언제나 무표정하고
내쪽에 관심을 주지 않으니까.
또다시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며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래, 해주마.
까짓 계단청소 지금 당장 해주면 될거 아냐.
청소도구를 챙기러
조심스레 여자화장실 문을 연다.
또 귀염녀가 안에 있다면 낭패를 당할 수 있으니...
다행히도
안에는 아무도 없다.
그럼 그녀는 어딜 간거지?
손님이 없으므로
카운터를 비워둔 채로
문을 열고 나서서
입구쪽부터 차례로
계단을 쓸어 내려간다.
4층의 ‘딸기’ 안마시술소와
우리 ‘사이버리아’ 피씨방을 잇는 계단은
상당히 지저분하다.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담배꽁초와
아무렇게나 찌그러진 음료수캔과
무수한 ‘딸기’ 찌라시들.
결국 여기가 더러운건
니네 안마시술소 탓인거잖아.
속으로 투덜대며
피씨방 입구부터 아래층 안마시술소 입구까지
빠르게 쓸어내려갔다.
그러고보니,
같은 건물에 있으면서도
한번도 저곳의 존재에 대해
특별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구나.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이는
우리 피씨방의 입구와는 달리
‘딸기’의 입구는 상당히 화려하다.
입구 한쪽에는 ‘딸기’라고 크게 쓰여져서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간판 외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두툼한 발판이 깔려 있고,
같은 유리문으로 되어 있음에도
시커먼 썬팅지를 붙여놓아
내부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알바 그만두는날
꼭 한번 가주마.
......
...오해는 하지마라.
난 그냥 거기 사장새끼한테 복수하고 싶어서...
......
뭐...어쨌거나...
...꼬...꼭 갈거다.
안마시술소 입구까지 쓸고 내려온 뒤
계단 위를 올려다보니
단지 쓸어내리기만 했음에도
상당히 깨끗하다.
만족한 표정으로 잠시 숨을 고른다.
그때,
끼익 소리와 함께
‘딸기’의 문이 서서히 열린다.
뭐 뭐야.
누가 나오는거지?
사장?
아니면 이곳을 이용한 손님?
문이 열리고
자그마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난다.
속옷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의 핫팬츠에
가슴을 간신히 가리는 탑.
그리고...
...그녀.
“...어...어머...엄마야!”
“...어어...어 어라?”
소스라치게 놀란 귀염녀가
다시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이건...
내가 잘못한거 아니지?
그녀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