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된 일일까.
왜 그녀가 ‘딸기’에서...
그것도 노모녀패션으로...
다시 가게로 돌아온 나는
한동안 멍하니 카운터에 앉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니터가 켜진 세 자리중
그녀의 자리만이 여전히 비어있고
다른 두 여자는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 할 일에 여념이 없다.
그녀는 그날
두 여자가 나갈 때까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와 그 앞에서 마주친 것이 충격이었는지
아니면 그 안에서 무언가 바쁜 일이 있었는지
나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다.
그때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으므로.
분명한 것은
그날이 처음으로
세 여자가 함께
이 피씨방을 나가지 않은 날이었다는 것뿐.
다음 날,
세 여자는 오지 않았다.
물론
그게 내 탓일 거라 생각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들에게 어떤 의미도 아니었을 테니까.
다만
그녀들이 없는 그날 밤 동안
나는 다시 진지하게
그녀들의 정체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자그마치 한 달이 넘도록
매일같이 피씨방을 찾아
밤을 새는 것 하며
번갈아가며 한번씩 자리를 비우는 것 하며
언제나 말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던 것까지.
그렇다면 그녀들은
셋 모두 ‘딸기’에 소속된 여자들이었을까.
그리고 매일같이 이곳 피씨방에서
특별히 하는 것도 없이
밤을 새는 이유는 무엇일까.
.
.
.
또 그 다음날,
피곤했던 탓인지 늦잠을 잔 나는
출근준비를 서둘렀다.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도
그녀들에 대한 생각으로
통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출근을 하며 내린 결론은
더 이상은 그녀들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그녀들과 나는
단순한 알바생과 손님에 불과했고
그녀들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든 간에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었으므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경림이 마치 자기가 사장인양
카운터에 거만하게 앉아 있고
옆에는 왠 놈팽이가 하나 같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내 쪽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인사 안하냐?”
“아, 오빠 왔어요? 오늘은 안 늦었네?”
건방진 년;
내가 늦었으면 몇 번이나 늦었다고.
한 달 중에 겨우 7번밖에...
......
...조금 자주 그랬구나.
“...사장님은?”
“오늘 이 동네 피씨방 업주들 회의. 또 요금 올리려나봐.”
사실
두 번째 봤을 때부터
경림은 말이 짧아지더니
이제는 아주 반말 수준이다.
“아참, 오빠. 여기 내 남자친구.”
“안녕하세요? 경림이 남자친구 김제동이라고 합니다.”
“아...네...그러세요.”
......
내가 참
비록 솔로인생 24년이지만
살다살다 이렇게 안 부러운 커플은 처음이다.
그나저나
얘처럼 생긴 애도 짝이 있는 판에
나는 도대체 뭐하는 꼴이냐.
하기사
경림이 외모는 비록 성실하지만
그러한 재난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
밝은 성격을 가졌으니
외모보다는 내면을 중시하는 남자에게는
더없이 좋은 여자일지도...
“그나저나 오빠는? 제대한지도 꽤 된 거 같은데 여자친구 안 만드나?”
“......”
“하긴 그게 오빠 맘대로 되는 건 아니지. 세상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거든. 깔깔깔깔깔.”
......
취소다 시발련.
너 따위한테 어떻게 남자친구가 생겼는지
죵니 의문이 증폭되는구나.
“오늘 우리 데이트해야 되니까 일찍 갈게. 인수인계는 오빠가 알아서 해요. 킥킥킥.”
“...손님들 나간 자리는 좀 치워놓지.”
“아, 오늘은 오빠가 좀 해. 데이트하러 간다니까!”
“데이트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내 손에 한번 뒤져볼래 이 진상커플아!”
라고 소리쳐주고 싶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역시
목숨은 하나다.
“...하하...그래...내가 치울 테니까 재미있게 놀다 들어가렴.”
“수고해 오빠. 내일 봐요.”
말을 마친 경림은
남자친구라는 녀석의 손목을 붙잡고
문을 열고 나선다.
그 모습이 흡사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새끼 한 마리를 보는 듯하다.
가게를 둘러보니 아주 가관이다.
사장이 나간 시점부터
아예 가게 안의 환경미화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듯.
여기저기 쓰레기가 굴러다니고
사용한 자리를 치우지도 않아
손님이 들어와도 앉을 자리도 없겠다.
그러고보니
그녀들은 오늘도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그녀들의 신상에 변화가 생긴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그날 나와 마주친 것 때문인가.
정신없는 가게 내부를 정리하고
카운터로 돌아와 앉았다.
학생들을 다 내보내고 나니
남아있는 손님은 얼마 되지 않는다.
특히나
그녀들이 늘상 앉아 있던 그 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슬그머니 문이 열린다.
사장녀석이 돌아왔나 보다.
......
어라?
조용히 문을 열고
그녀들이 들어선다.
볼륨녀와 노모녀.
귀염녀는 없다.
왜지?
왜일까?
역시나 나 때문인 것일까.
“정액 세 자리 주세요.”
만원짜리 한 장과
오천원짜리 한장을 내밀며
노모녀가 말한다.
응?
세 자리라고?
“네...어? 네? 저...한분은...?”
“...수정이요? 곧 올 거예요.”
그럼 그렇지.
내가 그녀한테 뭐라도 되는 것도 아닌데.
나 때문에 안 올 이유는 없잖아.
그보다...
‘수정이요?’라니...
그녀들은
내가 당연히 그녀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건가?
물론
똑똑히 기억하고 있긴 하지만.
두 여자는 이내 돌아서서
자신들의 지정석으로 걸어간다.
내가 조금 전에 치운 자리다.
이상하게도
그녀들이 항상 앉는 그곳은
그녀들이 올 때가 되면 언제나 비어 있다.
그녀들이 단 한 번도
다른 자리에 앉은 적은 없다.
자리에 앉은 그녀들은
컴퓨터 세 대를 켜고
각자 자기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한 명은 음악싸이트에 접속하고
한 명은 싸이월드에 접속한다.
신경쓰지 않으려 했지만
역시나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그녀들은 한 달 이상이나
매일같이 이곳 피씨방에 와서는
특별히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싸이질이나 음악감상뿐.
상식적으로 봤을 때
야간정액씩이나 끊어가면서
할만한 행동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를 볼 때
온라인 게임을 하지 않는 한
밤새 피씨방을 이용하는 일은 드물다.
게다가
만약 그녀들이 ‘딸기’의 종업원들이라고 한다면
가장 왕성한 영업시간에
이 곳에 와 있는 이유는...
그녀들이 앉아 있는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출입문 쪽에서 뭔가 그림자가 서성인다.
카운터에 앉아서는
바깥쪽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유리문이기에
그림자를 통해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할 뿐.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빼고 문 밖을 쳐다보니
귀염녀가 안절부절하며 서성이고 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발로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퍽이나 귀엽다.
문 앞을 서성이던 그녀는
슬그머니 안쪽을 들여다보다
나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만다.
움찔하며 놀라는 그녀.
이내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목까지 발갛게 달아오른다.
나름대로 무언가 초조한 모양이지만
그 모습이 무척이나 깜찍하다.
빨개진 얼굴로 이리저리 눈을 돌리던 그녀는
체념한 듯 출입구 손잡이에 손을 올린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언제나 무표정한 그녀들이었기에
그 모습이 더욱 재미있게 느껴진다.
슬그머니 들어온 그녀는
애써 나를 쳐다보지 않으려는 듯
얼굴 한번 돌리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다가
갑자기
뚝
멈춘다.
...뭐하는거야?
제자리에 우뚝 선 그녀는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잠깐 그대로 서 있다가
내쪽으로 고개를 휙 돌린다.
다시 한번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나는 애써 그 눈을 피하려 들지 않았다.
내가 더 이상 피해야 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한참이나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가던 길을 재촉하다가
다시 한번 움찔
하며 멈춘다.
그리고 또 한번 내 쪽을 쳐다보고는
다시 한번 얼굴이 빨개진다.
이쯤 되면
누가 봐도 저건 정신병자의 행동이다.
내가 그녀를 알고 있기에 망정이지
만약 오늘 처음 근무하는 알바생이었다면
이미 119를 눌러 두었을 것이다.
다시 얼굴을 돌린 그녀는
혼자서 잠시 그 자세로 서 있다가
좌우로 고개를 가로젓더니
슬그머니 내쪽으로 다시 얼굴을 돌린다.
도대체 왜그래;
또 한번 눈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내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리고는
카운터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뭐 뭐야.
순식간에
카운터 앞까지 다가선 그녀는
무언가 잠시 망설이더니
나를 한 번 쳐다보고
고개를 숙이고
다시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번 고개를 숙이고
그리고는
빨개진 얼굴을 다시 한 번 들어본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진짜;
뭔가 말이라도 해보세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새빨간 얼굴을 한 채
입을 뻐끔뻐끔대다가
이윽고
말문이 트인다.
“...봐...봤죠?”
“...아...뭐 뭘요?”
“......”
“......”
간신히 말을 꺼낸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안절부절한다.
귀엽다.
“...어 어제...그...그거요...”
“......”
역시나
어제 새벽에 마주친 일에 대해서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구나.
나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 지도 모르겠다.
“...그 그거...그러니까...어제...그...옷...”
“...아...네...그...네 네...그 그거요...네...”
더듬거리며 간신히 말을 꺼낸다.
나도 덩달아 더듬기 시작한다.
“...그거...그거...아 아디다스예요...그 그냥...체육복이거든요....아디다스껀데...”
“...아...네...네?”
아...
아디다스였구나.
펌입니다.펌펌 유머게시판에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