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기피자와 연예인에
저는 충북 제천이라는 시골도시에서도 한참을 더 시골로들어간 박달재 밑 깡촌 중 왕 깡촌에서
73년 4남3녀중 막내로 빈농에서 태어놨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때 부터 감기에 건린후 귀에서 물이흘러나오는 증상이있었지만
중이염이란 병도몰랐고 초등학교도 교육받지못한부모님은 병에대해 무지했고 돈도없었습니다
장남인 큰형도 병원에데려갈 집안형편이아니어서 민간요법이나 원주 나병환자촌에서 나온다는 마이싱을
숫가락으로 으깬다음 가루로만들어 귀에 들이붓는것이 치료였습니다
여름에 귀에서 계속 고름물이 흘러나와 그 냄새가 진동하여 학교에가면 친구들이 저와 않으려하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왕따였습니다
친구들 옆에가면 냄새난다고 떠밀리거나 매맞기일쑤여서 자연 왕따가 됀것이였습니다
귀에솜을 틀어막고 쉬는시간에 수도가에서 솜을빼면 고인물이 주룩하고흘러나오고 제가 맡아봐도 냄새가 고약했습니다
아무도 저와 같은책상에서 안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맨뒤자리에서도 더떨어진 뒤에서 혼자않아 공부해야했습니다
저 멀리서 들리는 선생님목소리는 한쪽귀로 들리지 않았고 나긋하게들리는소리는 자장가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수업시간에 잠을자는 습관이생겼고 안들리는 귀로 억지로 듣다보니 집중력이 현져희떨어졌습니다
고름이나오던 귀는 5학년이돼서야 물이말라버렸고 중이와고막자체가 없어져서야 끝이났습니다
결국 큰형님과 저는 한쪽귀가 전혀 안들리는 반 장애인이돼었습니다
큰형님과 나이차가 12년이나나서 제가 6학년일때 병역면제를 받으시고 사회로 나가셔서 결혼까지하셨습니다
한쪽귀가안들리는건 사회에서도 큰 장애였습니다 씨끄러운 공장환경에서 매번 퇴사하셨고 공사판이나
조용한곳을 찾아 전전긍긍하며사시는 형님을 제 앞날인양 보며자랐고 저또한 희망이 많이도 사라졌습니다
중학교에서도 친구들 이야기를 제때 못들어 왕따와교육은 하위권을 유지했습니다
선생님에게 안들리니 앞에않혀달라는 말조차못하는 의욕상실에 자신감이없고 패배자가 돼어 있었습니다
같은반 제일 약하다는 친구조차도 저를 데리고가 화장실뒤에서 때릴정도였습니다
중학교 3년시절은 하루하루가 악몽이었고 자살까지도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조차 졸업식에 오시지못하게했습니다
동창생들앞에서 무시당하고 조롱거리인제모습을 마음아파하실 부모님에게 보여드리기 싫었습니다
고등학교는 자연 제천에서 제일 공부못하는학생만 모이는 농업고등학교로 입학하였습니다
그학교는 문제아들만 모인곳이었는데 인생막장이란 최후의보루였던 그 학교에서 반전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환경에 적응하나봅니다 거친환경에서 생존하려는 본능이었는지
늘 싸움이 일어나고 시비가붙고하는 일상에서 생활하다보니 그곳에서 살아남으려는
그곳에선 무시당하고 왕따당할수록 오기가 생겨나고 투지가 생겼습니다
운동이 하고싶어졌습니다 이소룡 절권도나 고 최배달님의 바람의파이터를 보며 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시골에서 도시로 학교다니는 학생에겐 돈도없고 알바할수있는 환경도 운동학원다닐수있는 여건도안돼었습니다
사회로 나가서 내가벌어 내가 운동한다는 일념으로 고등학교를 다녔고 40명이던 입학동창생이 졸업식때는
18명으로 줄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후 저역시 사회생활은 어려웠습니다
씨끄러운곳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힘들었습니다 소음이심한곳에서 정상인들은 잘도들었지만 저는 누군가 다가와
어깨를치거나 그사람과 눈이 마주쳐야 대화가 가능했습니다
저도 큰형님처럼 여러 직장을 돌고돌았습니다
그여건에서 야간작업하는곳은 무조건 배제하고 직장을구해서 야간에는 태권도 학원에 갔습니다
친구들에게 맞고자란 한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그한이 저를 극한으로 내몰았고 학원에서 하루4시간은 기본으로 운동하는
열정을 보이게했고 사범님이 현관키를 맞기고 갈정도로 극성을 보였습니다 태권도 단증을딴후 합기도로 전환하여
합기도 역시 전력을다해 연마했습니다
사범님이 대련을 기피할정도로 훈련량이 강했습니다
그 쯤 동기들이 하나둘 군대를 가더군요 누구는 방위 누구는 면제 누구는 해군지원해서 갔다더라
모든 동기들이 힘들걸 기피하더군요
오호라 ~~좋다 니놈들이 학교다닐때 그토록 기고만장하더니 이런데는 약한척하는구나
전 그런 약한놈들이 경멸스러웠습니다 저를 때리고 업신여긴놈들이 친구라기보다는 제가 부셔버릴 적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군대를 봤습니다
어릴적 배달의기수를 티비로보며 자라왔던 낮익은 군대가 아닌 동창생들이 어쩔수없이 징집돼어 끌려간 군대가아닌
최고의군대를 가고 싶었습니다
서울에서 직장을다니다 시골에 볼일이있어 내려올때 시골 버스 터미널에서 특전사모집 포스터를 보았습니다
저는 이거다 싶어 메모를 하고 시골부모님에게 상의드렸습니다
부모님은 가만히 있으면 면제인데 왜 군대를 가려하느냐하셨습니다
남자로 태어나서 한번은 최고가 돼야한다고 부모님을 설득하였지만 극구 반대하셨습니다
힘들고 귀도안들리고 잘못돼면 죽거나 불구가됀다고 하셨지만 제고집과 눈길은 이미 특전사에 가있었습니다
그때는 특전사를 지원하려면 부모님동의가 필요해서 저는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시골로내려와 농사일을 거들면서
필수체력을 단력하였습니다 저희시골은 사방이 험한 산지라 산악으로만 구보를 했고 하루 14km를 7km씩나누어
오전과오후 거친산악구보를 하고 야간엔 윗몸일으키기 턱걸이 돌던지기를 했습니다
12월에 시골에와서 3월에 특전사모집에응시하려고 작정을 하고 겨울내내
3개월을 부모님을 복아습니다 결국 부모님이 항복하시고
죽던말던 가보라 하셨습니다
시골집에서 백수생활을 하던 동창생하나가 같이 놀친구가 없던처 시감만나면 만나게돼었고
자연 저와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같이 특전사지원을 하게 돼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와 저는 지역이 충북이라 조치원에있는 병무청으로 지원서를 냈습니다
인터넷도 없고 팩스지원도 허용없던 시절이라 서류들고 찾아가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지원하였고
지원후 조치원에서 다시 군 적성검사 안보검사를 받았습니다 합격
그후 체력시험을보러 다시 조치원으로 갔고 체력장은 독무대였습니다 체력은 모두 특등이었고 5km달리기 370명중 3위 상위두명은 육상선수였습니다
윗몸일으키기 만점 초월 던지기 . 턱걸이 .모두 만점 초과했습니다
그후 문제는 신체검사였습니다
친구는이미 치질검사에서 불합격당했습니다 저는 치질이없어서통과
모든 신체검사가 합격으로 끝나고 맨 마직막이 청력검사였는데 말굽으로 쳐서보는 검사가아닌
이비인후과에서보는 불켜진 검사기로 양쪽 귀로 다보는것이었습니다
군의관님이 문제의귀를 보시더니 어 ~귀에 고막이 없네 하시는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연 문제의 왼쪽귀에서 걸렸고 군의관이 불합격처리하였습니다 안타깝고 억울한마음 진정시키며 친구와 쓴웃음지으며
나가려는데 군복을 입으신분이 서류를 들고오시더니 하시는말씀이
참 안탑깝다
모든것이 특등이라서 더 아깝다 가을에는 지원자가 조금이니까 다시 도전해보라하셨습니다
저는 용기가 생겨 그해 가을까지 체력단련하며 부모님농사일 거들며 고향에서 버텼습니다
그리고 가을이오고 조치원행을하였습니다 그해가을 이상하게도 지원자는 더 늘어 충북과 충남이 한곳에서 시험을 치뤘고 지원자가 700명이 넘었습니다
모든 합격후에 최종 신체귀검사에서 친구와 또다시 불합격받았습니다
이번엔 전에 군복입은 분도 안타나나시더군요 오기가 생겨서 그다음해 3월에 다시도전했습니다
3월 도전역시 보기좋게 친구와 불합격당하고 12번의조치원행을 끝내야했습니다
이상한건 제친구는 치질수술만 받았으면 합격이었을텐데 3번을떨어져도 치질수술을안하고 불합격당했습니다
그렇게 3번도전의 특전사가 불합격당햇습니다 그래도 특전사에 대한 제마음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육군으로 가면 특전병으로 갈수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역으로 가고싶었습니다
특전병에서 하사관으로 다시 갈수있으테니까요
시골집으로 전입신고가돼어있으면 100% 방위로 배정됀다고해서 서울형님에게 전입해놓고
입대를 기다렸습니다
입영영장이 날라왔고 신체검사에서 귀가 안들린다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현역신체검사는 청각말굽검사도 없이 얼굴보고 대화만해도 통과더군요
신체 특급 현역 판정을 받았습니다 특전사에서 못받은 특급을 현역병신체검사에서 받으니 감회가 새롭더군요
그해 가을까지 농사일을 거들고 그다음해 3월 논산제2훈련소로 입대하였고
무엇이든 열심희하면 특전병으로 차출됀다기에 남들은 안하려고 기를쓰는데
전 잘하려고 기를썼습니다
그후 훈련소생활이 끝나가고 주특기병과를 배정할때 특전병에 이상한애들만 뽑혀가고
저는 손까지들며 저를 데려가달라고 했지만 묵살당했습니다
그렇게 남들은 기를쓰며 안가려하는 군대를 저는 기를쓰며 가려고했고 결국 제의도와는 무관하게
육군으로 복무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특전사에대한 꿈이 사라져갔습니다
어제밤에 한밤의연예에서 MC몽이 발치를 고의로했네 치료로했네 박해진이 병역비리를했네 정신치료를 받았네
그런 방송보면서 열이 확받아서 저런사람들은 사지멀쩡해도 안가려하는데
저는 가고싶어도 못갔습니다
처음에는 친구들보다 멎진모습을 보여주려는 마음이 앞서있었지만 군대 제대후에는 현역도 만만하지는 않고 중요하다는사실을 알게돼었습니다
특전사를 지원하고 최고가돼어보려했던 정신과 체력모두가 군대생활내내 저에게도움을 주었고
제대후에도 사회생활할때 그 자신감과 강한정신력 체력으로 결혼하고아이낳고 조그만 사업하며 잘살고있습니다
신체건강한 제 동창들보다 제가 조금더 앞서산다고 자부할정도 됩니다
지루할정도의 긴글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좀더 맛깔나게 써드리고싶었지만 작가도아닌 일반인이 쓰고 추려서 쓰다보니
지루할수도있겠고 아쉬운부분들도있을테지만 긴글이라 이해해주십시요
다행이 제아들놈이 사지가 아직은 멀쩡합니다
제아들놈은 기필코 특전사에보내고싶어서 아들놈과 저의구호는
안돼면~~돼게하라가 구호입니다
그런데아들놈이 개그를 알기시작하더니 제가 선구호로 안돼면 하고 외치면 안됀다 하더군요 ^^
다커서 군대갈 나이가 돼봐야 특전사를 지원할지 확실해지겠죠
저는 제딸도 가능하면 군대보내려합니다
군대는 학교에서 배우지못한 것을 가르쳐주는 좋은학교입니다
6.25전쟁후 한국이 빠른 발전을 이루워낸것도 모든 남자들이 군대를 다녀와서 정신이 제대로박힌
이유도 한몫했을겁니다
그런 군대는 우리사회의버팀목이며 내나라내조국을 지키는방패입니다
내가 이땅에태어났나서 자랐다면 당연 이땅을 지켜야할 의무 신성한 국방의의무를 짊어져야
자랑스럽고 당당하고 책임감있는 어른이될것이며 이땅의 주인이며
후손인 자손들에게 당당히 이야기할수있는 주역이될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오타수정 내용 수정 입니다 12시14분>
친한 친구들이 우루루 몰려가더니 첫 휴가 나와서 말들이 많더군요, "그 새끼 변했다,
재대후 죽여버린다,., " ㅋㅋ 해병대는 친구도 없나봅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걍 입대, 306가니 어떤 근사하게 군복입고 썬글라스 쓴 아저씨가
무리들에게 우더니 특전사에 지원할놈 부르더군요, 저 포함 십여명정도 따라가서
빙~둘러앉고 장황하게 설명들었습니다. "제대할때까지 돈 모으면 3000만원 된다,
요즘은 먼지(방석?)털기 같은거 없다"
아저씨 몇달동안 근무해야되요?
응... 4년 반. T..T
입대전 울고불고한 여친만 없었다면.....
저야말로 갈 자격이 없었던 인간인거 같습니다..
입대시켰습니다
그중 장조카가 연평도에 있습니다 저번 연평도포격이후 큰형님에게
왜그리 미안하던지 차조카는 파주에서 부사관생활합니다
멋지십니다 ..양병님
어깨 아파가면 글쓴 보람이 있네요 ^^
송학에 영원한 쉼터를 가야하는데 구제역 때문에 못가내요.
거기 들렸다가 의림지, 제2의림지, 명암낚시터 들려서 올라옵니다.
글 잘 봤습니다.
임진왜란 구한말 일제시대 의병이 가장많이 가장 빨리 일어났죠
저희동네는 신돌석장군님이 계십니다
나라가 위험하면 목숨을걸고 나라를지키는 의로운사람들이 많은고장입니다 제천
저와함께 같은날 입대해서 같이 신병교육받고 같은사단배치돼어 같은날 제대하였습니다
저는 의림지에 있는 고등 학교 나왔는데요...
아직도 제천 시외버스터미널이 특전사모집포스터가 붙어있는지 궁금하네요^^
남들은 군면제 받을려고 안달이었을텐데 ..
제가 72년생이니 저랑 비슷하게 군생활 하셨겠군요
저는 해병대 지원하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극구 반대해서 어쩔수 없이 육군 운전병 지원해서 갔는데 면허만 따고 한번도 운전해보질 않아서 실기시험볼때 교관에게 꼭 합격시켜달라고 사정했던게 기억 나네요
저도 우리도장얘들 근성있게 생긴녀석들에게는 부사관을 적극 추천 합니다
벌써 한녀석은 정보사 갔고 해병부사관.특전사,육군기술병 이렇게 세녀석은 예약중입니다 ㅎㅎ
아늘녀석은
논산훈련소 끝나고 야수교로 운전교육받으로 가서 훈련병 동기랑 특전사 운전병으로 보내주라고 면담 했었는데 착출아니고 지원해서 간경우 이미 갈곳이 정해져 있어서 안된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특전사 7년으로 근무하는것이 있는데 거기 가겠냐고 해서 복무 기간이 너무 길어 동기랑 그냥 나왔던 적이 있습니다 ^^
잘된 후배 친구들도 많습니다.현재 시외버스 터미널에 포스터는 없는듯 합니다.
시설도 예전 보다 좋아 졌구요..
제가 다닐때쯤 별로 인식이 안좋은학교였고
지금은 제천에서 두번째좋은학교로 변해있더군요
제가 문제였나 봅니다^^
군대가서 힘들어 죽는줄 알앗어요..저랑 같은 연배신데 (ㅋㅋ 한살어림) 울 아들한테 특전사 가란 소리 못하겟어요 .. 특전나온 후배들 한넘은 한쪽청력 불구되서 제대
한넘은 제대한지 십년이 넘었는데 지금도 무릅고생 ㅠㅠ
진짜 특전사 나오신분들 존경해요
아들놈에게 귀에 딱지않도록 이야기하지만
막상 커봐야 알수있겠습니다
다시 추천 합니다
이런 사연이,잘 봅니다 파이링
감동적입니다 ㅎㅎ
제천분이시라니 더 정독하여 읽었습니다 ㅎㅎ
저도 제천이 고향이며 지금도 거주하고 있습니다~
특수부대 출신으로서 지원동기가 많이 와닿았습니다~
저도 지원할때 매일 체육관에 살았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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