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차의 역사 (1944~1969)
경성정공 모습
기아자동차의 모태는 1944년 12월 창업한 경성정공에서 시작됩니다. 1922년 만17살의 청년은 일본 오사카에 건너갑니다. 오사카에서 이 청년은 일본의 기계산업을 공부한후 1930년, 삼화제작소를 설립해 자동차와 자전거의 부품 제작에 몰두합니다. 이렇게해서 수익을 벌어들였지만 1944년 이미 일본은 패전의 징조가 보였고 이로서 김철호는 더이상 일본에서의 사업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여 고국으로 귀국, 자신의 사업분야를 살려 서울 영등포에 자전거 부품을 수공업으로 생산하는 경성정공을 설립하게 됩니다. 해방 후, 일본에서 돌아온 한국인 기술자들과 함께 자전거 자체조립과 부품 국산화를 달성하게됩니다. 1952년 4월, 아직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 김철호 사장은 새로운 사명으로 기아산업으로 변경하게되는데 이는 일어서다의 起자와 아시아의 ?자를 조합한 문장으로 아시아에서 일어선다라는 의지가 담겨있는 사명입니다.
이때 기아산업은 국산 최초의 자전거인 3000리호를 개발에 성공, 생산하게되고 이 자전거는 나중에 삼천리 자전거로 분사됩니다. 57년에는 서독에서 현대식 생산설비를 도입해 한국 기계공업의 형태를 갖춘 시흥공장을 준공합니다. 그러나 자전거 생산에서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 시흥공장을 건설했지만 이는 경영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시흥공장을 착공하면서 과도한 투자가 계속돼 4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고 설상가상으로 1959년 9월 우리나라를 강타한 사라호 태풍으로 부산공장은 기능이 마비될 정도로 피해를 입어 경영악화를 가중시키게 됩니다.
거기에 당시 대한민국은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4·19 시민혁명이 발발해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경제활동은 마비되었고 4·19 이후 실시된 총선에 기아산업의 김철호 사장이 출마했으나 낙선하는 등 여러 상황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결국 기아는 1960년에 첫 부도사태를 맞게 되며 위기를 맞게됩니다. 뒷날 대부분 복직되었지만 당시 부도사태로 총 450여 명의 종업원 중 200여 명이 회사를 떠나야 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기아산업은 2륜 오토바이와 3륜 자동차 생산을 위한 시설확충에 총력에 기울이게됩니다. 기아차의 3번의 위기중 첫 위기로 그 대책으로 1961년, 혼다와 기술제휴에 성공 국내 최초의 2륜 오토바이 ‘기아혼다 C-100’을 생산하고, 1962년에는 토요공업(마쯔다)와 기술제휴에 성공, 3륜차인 ‘K-360’을 생산에 돌입했습니다. 3륜차 생산을 계기로 1962년 기아 시흥공장은 국내 최초로 자동차제조공장 허가를 취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3륜차 사업이 곧바로 성과를 안겨주지는 않았기에 기아산업은 3륜차와 자전거로 양립시키는 전략을 통해 6년 만에 적자의 늪에서 탈출합니다.
기아마스터 K360
이로서 생산한 기아마스타의 첫 삼륜차인 K360은 작은 몸집에 다소 빈약한 적재능력을 지녔습니다. K360은 ‘최소의 경비로 최대의 효용!’이라는 문구를 내걸고 등장했고 이는 곧 소상공인 사이에 히트상품으로 거듭하게 됩니다. 세 개의 바퀴에 아담한 크기의 객석과 적재함을 갖춘 이 작은 세 바퀴 트럭은 소량 수송이 필요한 곳곳에서 요긴하게 사용되어 도로에 굴러가는 차가 적었던 당시, 작은 몸집에 적당한 운송능력을 가진 K360은 쌀 가마니나 연탄 등, 산업의 현장이 아닌, 생활의 현장에 필요한 각종 화물을 시가지의 비좁은 골목 구석구석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서울시에서 비좁은 변두리 골목의 쓰레기 수거를 위해 50대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기아산업이 라이센스 생산한 토요공업 K360은 1959년부터 생산을 시작한 삼륜 경상용차로, 일본에서 미친듯이 팔리던 다이하츠의 삼륜 자동차 미제트(난쟁이)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차입니다. 일본만 1959년부터 1969년까지 10년간 약 28만대가 생산되었고 디자인은 훗날 마쯔다의 초대 파밀리아를 디자인하게 되는 코스기 지로가 맡았습니다. 이때 기아가 생산한 K360은 초기형 모델인데 창문의 1/3만 개패되는 슬라이딩 방식이였습니다. 후미등도 노란색 방향등이 없고 미국차처럼 후미등하나로 방향등과 후미등의 역활을 하였습니다. 이후 일본에서는 후기형이 등장해 수동으로 완전히 내리는 방식의 창문 개패를 사용하고 노란색 방향등도 따로 만들었지만 국내에서는 K360을 단종시키고 T600을 양산하게됩니다.
재미없는 기술적 설명
K360은 삼각형 사다리 프레임 방식에 오토바이식 리지드 포크 댐퍼와 후면에는 긴 반타원형 3겹 판스프링에 리지드 엑슬을 장착하였습니다. 엔진은 공냉식 4행정 OHV 76도 V형 2기통 BA 가솔린 엔진을 장착했고 윤활은 놀랍게도 드라이 섬프 방식이였습니다. 출력은 11마력@4,300rpm 과 토크는 2.2kg*m@3,000rpm으로 캐빈 뒤에 위치하여 미드 쉽 레이아웃에 세로로 장착되어 건식 단판 클러치를 채용한 상시교합 및 선택습등식의 3단 수동 변속기를 통해 추진축을 거쳐 후륜을 구동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화물칸의 길이에서는 불리하지만 엔진을 캡과 분리하여 정숙성, 정비성, 무개중심에서 경쟁차량이 비해 월등히 우월한 요소입니다.
기화기는 히타치 소렉스 VAD26-2A가 장착되었고 클러치는 건조단판식이 채용되었습니다.시동성 향상을 위해 수동 초크버튼이 들어갔고 연로게이지 대신 탱크엎에 레벨게이지(투명비닐관)으로 잔량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륜차에 캔버스탑과 짐칸을 달았을 뿐인 여타의 삼륜상용차와는 다르게, 외부와 독립된 공간에 좌우 2인승 좌석이 배치된 차체와 랙 엔 피니언 타입의 원형 스티어링에, 속도계, 방향지시등, 와이퍼 등을 채용하여 자동차로서의 구색을 온전히 갖춘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덕분에 여타의 이륜차 기반 삼륜차에 비해 한층 쾌적한 주행환경을 제공한 것이 인기 요인으로 작용하여 쏠쏠한 실적을 올리게됩니다. 특히 마쯔다가 다히하츠보다 정숙성이 더 뛰어났고 타이어도 미제트의 9인치에 비해 12인치로 더욱 커보인 느낌을 주었습니다. 댐퍼는 전륜에만 장착되었고 유압식 드럼 브레이크는 후륜에만 장착하였습니다. 내부에는 속도계와 다이나모 경고등, 오일압력 경고등, 방향지시 레버, 와이퍼 스위치번트, 전조등 스위치 레버등을 갖추었고 다이나모 경고등은 차량 충전상태를 알려줘 시동 스위치를 누르면 녹색으로 점등하고 제너레이터가 충전을 시작하면 꺼지는 방식이었습니다.
기아마스터 T600
70년대 서울거리
1969년 K360의 후계로 등장한 T600은 K360의 강화판에 해당하는 차종으로, 20마력의 최고출력을 내는 577cc의 수랭식 4행정 엔진을 채용하여 500kg의 적재중량으로 K360에 비해 여러모로 월등한 성능을 자랑했습니다. 새로운 엔진은 동력성능과 연비 모두 기존 K360에 비해 훨씬 상승했습니다. 당시의 소상공인들은 연료를 덜 소비하면서도 운송능력도 우수한 T600의 출시를 환영했다고 합니다. 전장 3,295mm, 폭 1,280mm, 전고 1,450mm의 아담한 사이즈에 최고속도 65km/h만 발휘해 당시 개통한 경부고속도로에 출입이 금지당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스페어 타이어를 지붕에 올린 차량도 있었습니다. T600은 69년에서 74년까지 국내에서만 7,742대가 생산되어 자동차 산업사에서 기술사적 가치에 높은 평가를 얻으며, 2008년부터 문화재청의 등록문화재 제 400호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용달업무
농장수확
공장화물
도산매점
신속한 소운반물 수송!!
소자본으로 성공하실수 있는 기아마스터 600이 있읍니다
당시 기아산업이 했던 라이센스 생산는 지금도 제조업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라이센스 생산의 예는 자동차 산업 같은 중공업 분야에서 자주 이루어지는 방법입니다. 경공업에 비해 부가가치가 높고 기술 획득이 어려운 중공업의 특성상 새롭게 산업을 일으키고자 하는 개발도상국에게 있어서 일본가 미국, 독일같은 선발주자가 오랜 세월에 시행착오와 얻은 데이터를 빠른 속도로 흡수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합니다. 그 중에서는 소상공인의 발 노릇을 톡톡히 해냈던 경량급의 상용차도 존재했습니다. 기아산업(現 기아자동차)의 삼륜차는 소상공인의 일의 쉽게 도와주면서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 시작의 신호탄을 쏜 기념비적인 차량입니다.
기아 최초의 4륜차도 궁금하신 분들은 http://www.bobaedream.co.kr/view?code=truck&No=86987&cpage=4
아니면 만들었는데 오토바이부문을 효성으로 분사 한 걸까요??
bmw도 현재까지 오토바이 만드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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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X파일 사건'을 통해 기아차 매각 앞뒤로 유동성 위기에 처한 기아차 쪽에 금융권이 추가 지원을 하지 않도록 삼성이 정치권을 대상으로 로비를 벌인 정황이 실제로 드러나 음모론이 사실로 밝혀기도 했다.[7] [8]삼성이 삼성생명과 제2금융권을 통해 기아의 자금 경색을 유도하고 정부를 압박해 기아 경영진 퇴진을 이끌어 냈다는 것. 이후에 기아차를 인수할려 했으나, 자동차 산업 철수를 결정하면서 인수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9] 실제 삼성은 1997년 초에 '기아차 성장 한계 봉착' '자동차 업계 대대적인 구조조정 필요' 등의 보고서를 공개해서 기아를 흔들기도 했다. 삼성자동차 보고서 파문 부도유예협약 직후인 8월에는 '쌍용, 기아차 인수가 필요하다'는 삼성내부 보고서가 유출되기도 했다. 1999년 외환위기 청문회 당시 김선홍 회장은 "삼성이 이를 바탕으로 금융계열사 등을 통해 빌려줬던 5000억원대의 자금을 거둬들였고, 결국 기아가 파산에 봉착했다"면서 음모론을 제기했고,
이에 대해 몇가지 추가 이야기가 있는데 1995년 당시 삼성중공업 직원들이 기아차 소하리 공장 출고장에 있던 봉고 J2의 사진을 찍다 기아자동차에 걸리는 바람에 기아와 삼성 간의 알력이 발생한 바 있고(1995년 6월 17일 한겨레 기사), 1997년 3월에는 중앙일보의 취재헬기가 기아자동차 아산만공장(현 화성공장) 상공을 선회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1997년 3월 13일 동아일보 기사). 참고로 봉고 J2 사진을 찍다 걸린 사건에 대해 삼성중공업에서는 사내 차원에서 중징계를 내리는 조치를 취했다고. #[10]
부도가 나자 굉장히 특이한 상황이 발생되었는데, 회사의 실질적인 주인인 노조와 경영자가 정치로 회사의 위기를 풀어나가려 시도한 것이다. 적은 규모의 부정 혹은 부도였다면 14%의 지분율을 가지고 있던 노조가 1% 지분율의 경영자를 쫓아냈겠지만, 너무 부도의 규모가 크자 양 측이 합심해서 정부를 상대로 정치적인 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관련기사
https://namu.wiki/w/%EA%B8%B0%EC%95%84%EA%B7%B8%EB%A3%B9
설명 좀 해주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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