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 봉고 테스트 영상은 여기 https://www.youtube.com/watch?v=HXosjeQqPEQ&t=2s)
기아자동차는 3번의 고비가 있었죠. 첫번째가 바로 김철호 사장이 무리하게 출마해서 낙선한 상황이였습니다. 이로 인해 회사는 부도사태를 맞게되지요. 이번에는 이 2번째 위기의 원인과 더불어 기아를 살린 첫 봉고를 소개해 드리자합니다.
역사적 배경과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
기아산업은 아시다시피 1962년에 도요공업 (마쯔다)와 기술제휴를 채택하고 첫 자동차인 삼륜차 생산과 4륜차인 타이탄과 복서를 라이센스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경영난에 빠진 아시아자동차의 지분을 매입, 상용차를 생산하였습니다. 아울러 기아산업은 마쯔다 파밀리아 생산을 통해 첫 승용차인 브리사 양산에도 돌입합니다. 기아산업은 이 브리사 생산을 통해 국산화 비율 90%을 달성한데에 이어 디젤엔진을 국산 승용차 최초로 탑재하려는 등 여러가지 시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것이 12.12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들어서 틀어지게 됩니다.
제11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 (1980-09-01)
1980년 8월 20일 중화학 분야 투자조정 및 자동차 부분 투자조정 조치라는 명칭으로 시행되고 1981년 2월 28일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를 발표하면서 실물화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승용차 : 현대, 새한
지프: 신진(민수용), 아시아(군사용)
1~5톤 트럭 및 버스: 기아 단독 생산
8톤 이상 트럭 및 버스: 현대, 기아, 새한
특장차: 전 회사
으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당시 피해액만 해도 현대 195억, 기아 48억, 새한 20억이였고 이중 기아는 승용차 생산을 7년간 못해 엄청난 손해를 봤죠. 안그래도 부채에 시달리는데 승용차 생산까지 금지 당해버린대다 과도한 투자로 인한 부채에 당기손실금만 237억원을 본 기아는 망하기 직전이였습니다. 하지만 1982년 등장한 봉고 코치 (E-2200)는 기아를 살린 1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기아 최초의 봉고, 기아마스타 1톤 디젤과 기술적 설명
전통의 기아마스타 1톤디젤 봉고
이제부터 소형화물은 봉고에게 맡겨주십시요
사실 기아는 봉고를 1980년부터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80년 9월에 등장한 봉고는 봉고라는 이름 대신 1톤 디젤트럭이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가격은 4백만원선으로 책정되었습니다. 이차는 이미 먼저 나온 현대 포터 HD1000을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차입니다. 이중 저상 차체는 대한민국 최초로 선포인 1톤 트럭으로 많은 인기를 모으게 됩니다. 마쯔다 코드명 BA2형은 마쯔다에서 개발한 2세대 봉고트럭인데 1차 오일쇼크로 인한 경영난으로 인해 마쯔다가 단종시켰던 이름을 단종 2년만에 부활, 77년 2월에 등장하게 됩니다.
봉고라는 이름의 유례는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산양의 이름을 토대로 만들어졌습니다. 가봉의 대통령 오마르 봉고의 이름을 땃다는 소문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죠. 다만 봉고 대통령이 생전 자신의 이름을 딴것으로 생각하고 한국인들 한테 매우 고마워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전의 리어엔진 후륜구동 방식에서 전방 엔진 후륜구동 방식으로 변경, 하역성, 적재성이 좋아졌고 적재함 타이어를 소형화에 더블 타이어 장착으로 적재함에 휠하우스가 침범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사실 이 아이디어는 이미 1974년에 시판된 이스즈 엘프 150 플랫 로우에 시현된 기술이지만 패스트 팔로워 전략으로 이 아이디어를 적용한 회사로는 두번째가 됩니다.
등장 당시 표준캡만 있었고 엔진은 2.2리터(2,209cc) S2 직렬 4기통 OHV 디젤 엔진을 적용, 연비와 성능을 경쟁자인 포터보다 높였습니다. 이 S2 엔진은 영국 퍼킨슨 회사의 4.135 디자인을 베이스로 한 공동 개발 디젤 엔진으로 타이탄에 올라간 XA, HA엔진과도 매우 유사한 엔진입니다. 일반 승용차와 동일한 방식인 클로스플로우(흡기 배기 벨브가 해드 좌우에 설치된 방식)에 캠 타이밍을 체인으로 작동해 정비성과 내구성을 향상시켰고 실린더 당 2벨브 OHV 방식에 비직분사 연료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출력은 70ps에 토크는 14.5kg*m을 발휘했으며 일본의 1979년 배출가스 규제를 만족시킨 엔진입니다.
위 엔진은 가솔린 기화기 엔진. S2 엔진과 헤드커버, 블록등 여러면에서 비슷하다
단단한 ㅁ형 단면 프레임, 전부동식 리어 엑슬, 3면 개페식 적재함이 특이점이였습니다. 최대 등판능력은 0.373 tan(rad)이고 진공 배력식의 유압 드럼 브레이크는 무게 감지 밸브 LSPV (Load Sensing Proportion Valve)가 장착되어 차량 중량에 관계 없이 적당한 제동력을 분배, 차가 돌아가거나 흔들리는 상황을 막았습니다. 폭은 1,620mm, 전고 1,850mm, 휠베이스 2,155mm에 길이 4,445mm이며 전륜 더블 위시본 서스팬션에 후륜 반타원형 판스프링을 장착했습니다. 3면 개패식 적재함은 길이 2,740mm에 폭 1,550mm 지상고 695mm으로 당시 넒고 낮은 적재함으로 홍보했습니다. 이후 봉고로 이름을 바뀌게 됩니다.
출시되자마자 높은 완성도와 저상 적재함으로 인해 구매자가 몰려 현대 포터, 새한 맥스디젤을 따돌리고 소형 화물차 판매량 1위를 달성하게됩니다. 1980년 11월 27일 발표된 한달 판매량을 보면 봉고가 900대, 포터가 350대, 맥스디젤이 450대로 봉고가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거기에 월간 1,200대의 생산량을 가진 기아였지만 마쯔다의 부품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1개월간 기다려야 해서 번호판 달린 봉고는 차값 450만원에 프리미엄만 30만원이 붙었다고 합니다.
봉고 코치의 신화
기아마스타 봉고 코치/루트밴 시판개시
기다려주신 고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국제기능올림픽4연패의 기술로 생산됩니다.
1톤 트럭은 봉고를 선택하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불황타개 숨은 일꾼 알고보니 기아봉고"
사용하면 할수록 봉고의 뛰어난 성능을 알게 됩니다
1981년 1월 일본에서 먼저 페이스리프트가 강행되어 원형에서 사각형 램프로 바뀌었고 이후 기아산업 또한 8월 페이스리프트를 시행, 원형 램프 디자인에서 사각형으로 변경되었지만 국산화를 토대로 기아 자체 페이스리프트으로 원본인 마쯔다와 방향등과 램프 자체가 상당히 다릅니다. 이때, 기아자동차는 이전에는 발매되지 않았던 코치 모델과 더블캡 모델도 도입하게 됩니다. 이차를 도입할때 기아산업 사내에서는 상당히 부정적이였다고 합니다. "1톤 트럭짜리 조금한 트럭이이 필요가 있나?", "사람을 10명 이상 태우는 미니버스 수요가 도대체 어디있나?"등 이전 아시아자동차가 출시한 AC076의 실패로 코치 출시를 별로 달가워하지는 않던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AC076은 당시 타이탄 트럭에 껍대기만 아시아 자동차가 설치한 비약한 차량이였지만 봉고는 비록 같은 트럭 베이스이나 마쯔다의 훨씬 진보한 기술을 들여와 생산한거이니 상품성이 높을수 밖에 없었죠. 또한 80년대는 대가족에 많았던 시대으로 제사나 친척이 모일 시기 아주 유용하게 이용할수 있어 봉고의 큰 셀링 포인트가 됩니다.
만일 봉고가 성공하지 않았다면 승용차 생산이 불가능해진 기아는 승용차 라인 정리해고, 각종 빚으로 인해 재기 불능에 빠저 회사가 부도 났을것이며 지금의 기아차는 보기 어려웠을수도 있습니다. 1톤 트럭의 수요도 굉장히 많았는데 이전에 소상공인이 주로 사용하던 삼륜차나 픽업트럭에 비해 훨씬 무겁고 많은 짐을 실을수 있으면서 크기도 크지 않은 장점에 경쟁자까지 없는 상황이라 기아차 한테는 엄청난 대박이 터질수 있었던것이죠. 또한 소득이 증가하면서 가족끼리 나들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난탓에 RV 수요까지 즐길수 있었습니다.
또한 전사원의 판매력을 봉고 한 차종에만 집중시킨 탓에 작업복 명찰 위에 봉고의 상표를 붙이고 아침인사도 ‘봉고를 팝시다’로 대신했습니다. 그동안 팔린 봉고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조사해 그것을 모두 사진 찍어 앨범으로 만들고 사원들에게 나눠줬는데 이는 소비자들을 상대로 봉고의 다양한 용도를 설명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봉고 확판 운동으로 1982년부터 1984년까지 3년 동안 자동차 총 판매대수는 내수 17만5662대였는데, 이중 봉고류가 전체 65.95%에 해당하는 11만7416대이란 엄청난 수치를 달성했습니다. 봉고코치의 판매가격은 81년 기준 6,387,000원으로 책정되었습니다. 연평균 약 4만대 공급 기록을 세운 것인데, 언론은 이를 ‘봉고의 신화’라고 불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기아는 1년 만에 2년 동안의 누적적자 504억원을 39억원의 흑자로 역전시키며 위기를 타파했고 다음해는 291억 원의 순이익을 올려 국내 100대 상장기업 중 순이익 1위의 기업으로 부상했습니다. 1980년과 1981년에 각각 237억 원과 266억원 적자였던 당기순수익은 1982년부터 흑자로 돌아서 1985년까지 3년 동안의 누계흑자는 564억원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아쉬운점은 국산화율이 47.7%으로 현대 포니의 84.4%에 비해 크게 떨어졌습니다. 마쯔다에서 들여온 VE형 연료펌프도 장착했으며 오토초크도 장착해 시동성 향상도 하였습니다. 기아는 이어 1982년에는 3인승, 6인승 봉고밴을 출시하였고, 1983년에는 2종보통 운전면허로도 운전할 수 있는 9인승의 봉고나인이 출시되었으며, 1985년 9인승의 봉고 타운이 라인업에 추가되었습니다. 또한 전차 역진제어 장치를 탑제, 경사에서 출발할때 차가 뒤로 밀리는걸 방지하였습니다.
두가족이 함께타는 9인승 페밀리카 봉고나인
SuperDeluxe 봉고9나인
승용차 2대 몫을 하는-
봉고타운 탄생☆
수출 전략형으로 출시한 봉고 타운이 같은 9인승인 봉고 나인과의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엔진이 디젤이 아닌 가솔린이고 뒷바퀴의 크기로서 봉고 타운은 우리가 익히 아는 봉고차들 처럼 앞뒤 바퀴가 동일하고 전륜에 디스크 브레이크를 적용했지만, 봉고나인은 1톤차와 같이 복륜 형태에 드럼 브레이크를 장착했습니다. 봉고 타운의 경우 브리사 1.3리터 TC형 가솔린 엔진에서 보어만 늘린 1.4리터 90마력 TX1400 가솔린 엔진을 탑재했습니다. 봉고타운은 또 가벼운 재질의 FRP를 범퍼에 사용하고 중앙 집중식 계기판과 도난 방지용 스티어링 잠금 장치도 탑재합니다.
1톤 파워의 챔피언
파워 봉고 誕生!
최강의 파워-80마력
트럭의 경우 뒷 공간이 있는 킹캡이 1984년 8월 출시되었습니다. 킹캡의 경우 램프류가 봉고나인과 같은 형태로 변경되었지만 일반캡은 그대로 유지되게됩니다. 1987년 11월에는 1988년형 모델로 파워봉고가 출시되면서 프런트 마스크의 대대적인 페이스리프트 및 배기량을 늘린 80마력 2367cc SF엔진이 적용되었으며 1989년 1월에 와이드 봉고가 출시된 이후에도 1993년 까지 저가형 모델로 병행판매 되었습니다. 93년 단종으로 인해 오리지널 봉고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맺는 말
세상에는 수많은 자동차가 있습니다. 그중 인기가 않좋아 빨리 단명한 차도 있고 고의적으로 한정생산한 차도 있으며 베스트셀러에 등극해 수많은 유저에게 사랑 받은 차도 있지요. 그러나 봉고는 다릅니다. 베스트셀러로 볼수 있겠지만 쓰러저가는 회사, 마쯔다와 기아산업 이 2회사를 살린 대단한 모델입니다.
비록 슈퍼카와 스포츠카와 같은 운전의 재미나 S 클래스나 롤스로이스와 같은 승차감은 제공하지 못하지만 그 업적을 생각한다면 그 어떤차에 비교하더라도 딸리지 않는 가치를 가진 차량입니다. 모든 승합차를 봉고로 불리게 만든 차, 지금 기아라는 브랜드가 존재할수 있게한 차량, 기아 봉고는 단순히 기아차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역사에 있어 엄청난 가치를 지닌 차량입니다. 봉고 신화를 쓴 오리지널 봉고는 보기 어렵지만 아직도 생산되며 달리는 수많은 봉고들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속에서 또 다른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예전 봉고디럭스는 2,3열을 서로 마주보게도 가능했군요..
전두환 정권 들어 자동차 제조사 한 업체에 단일 제품군만 생산하도록 나눠버리려는 의도가 있었는데
(표면적으로는 과열 경쟁을 막겠다는 의도로 시행한 정책인데...(마치 단통법처럼) 사실 행정 관리의 편의를 위함이 더 컸던걸로 추측됩니다)
모든 자동차 업체들이 반발을 했음은 당연한것이고
이와중에 거의 반 강제적으로 총을 갖다 들이대니 하는수없이 모든 업체가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새한자동차의 지분을 가지고 있던 GM과 미국상공부와 대사관이 직접 나서서 크게 반발을 하게 되죠
(이 당시는 산업은행과 정부가 가졌던 새한자동차 지분에 대해 모두 대우가 인수한 상황이었습니다..나머지 지분은 지엠 소유였죠)
당시 전두환이 미국으로부터 정치적 정통성에 대해 인정을 해주지 않는점에 대해 굉장히 불편해 하던 상황이었는데
미국 정부에서 나서서까지 이 정책에 대해 반발을 하던 탓에
전두환은 미국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하던 입장이었기에
이 압력에 대해 지엠의 요구대로 응하게 된것이고
대우자동차는 어부지리로 대형트럭과 승용차 버스 모두 지켜 낼수 있게 되었고
이걸 빌미로 현대까지 반발을 하게 되버리자...저렇게 되어버린것이죠;;;
(대신 현대그룹은 이때를 계기로 자동차사업을 지키는 대신 현대양행을 대우에 넘겨버리게 됩니다)
당시 가장 힘이 없었던 기아 신진(거화) 아시아자동차 동아자동차만 합리화조치대로 이행 되버리고 만것이죠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대우그룹에선 현대그룹이 자동차 사업을 포기하고 현대양행을 지킬것이라고 예상을 했고 그에 따른 준비를 미리 해왔다고 전해집니다..하지만 정주영 회장이 대우의 예상과 다르게 당시 잘나가던 현대양행을 포기 해버리고 자동차 사업을 유지해버린 탓에 계획이 굉장히 틀어져버렸다고...
21세기에 들어 주력업종 변경에 매진하던 두산에 인수돼서 두산중공업이 됨
1톤틸팅캡도 있었는데 7년동안 승용차 개발못한게 현대에 뒤쳐진 결과 아닌가 싶네요.
그바람에 20여년전 IMF때 현대에 인수되고.
국민세금 어쩔꺼여?
배터네 이넘들아 차값이나 싸게해주던가
하지만...
검버섯 덕지덕지 붙은 몽ㄱ할배가 먹고 아들한테 넘기고... 독과점...
흥미롭네요
NB1이 승합차 베스타, NB3가 그 유명한 원조 프라이드였슴. NB5는 세피아, NB7이 원조 스포티지, NB9이 승합차 프레지오 였슴.
결국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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