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진영의 남로당은 1946년부터 제주도에서 공작을 시작했다. 남로당은 5.10 총선거 실시가 확실해지자 활동을 강화하고 특수 공작원을 본토에서 제주도로 파견했다. 남로당을 조직하기 위해 본토에서 보낸 훈련받은 선동가 및 조직가는 6명에 불과했으나, 곧바로 500~700 명의 동조자가 합류했다. 제주 4.3 사건 발생 당시 제주도민 60,000~70,000명이 남로당에 가입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들 대부분은 당시 전쟁과 전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남로당의 반미사상에 동조했었다
1947년 제주북초등학교에 열린 3.1절 기념식을 마친 30,000여 군중은 가두 시위에 들어갔는데, 이때에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여 작은 소란이 발생하였다. 기마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모른 채 하자 주변에 있던 3만여 군중들이 몰려들어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그런데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판단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5] 사상자 가운데는 시위대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반 구경꾼도 여러 명이 포함돼 있어서 민심을 자극시켰다. 남로당은 이런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면서 도지사는 원희룡이...,
공산진영의 남로당은 1946년부터 제주도에서 공작을 시작했다. 남로당은 5.10 총선거 실시가 확실해지자 활동을 강화하고 특수 공작원을 본토에서 제주도로 파견했다. 남로당을 조직하기 위해 본토에서 보낸 훈련받은 선동가 및 조직가는 6명에 불과했으나, 곧바로 500~700 명의 동조자가 합류했다. 제주 4.3 사건 발생 당시 제주도민 60,000~70,000명이 남로당에 가입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들 대부분은 당시 전쟁과 전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남로당의 반미사상에 동조했었다
1947년 제주북초등학교에 열린 3.1절 기념식을 마친 30,000여 군중은 가두 시위에 들어갔는데, 이때에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여 작은 소란이 발생하였다. 기마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모른 채 하자 주변에 있던 3만여 군중들이 몰려들어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그런데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판단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5] 사상자 가운데는 시위대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반 구경꾼도 여러 명이 포함돼 있어서 민심을 자극시켰다. 남로당은 이런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