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의에 빠진 수꼴영감은 터덜터덜 걸어서
고시원 건물 계단으로 들어선다.
근처 공원에서 두시간이나 죽치고 기다렸건만
정자에서 소주를 마시는 영감들은 한팀도 보이지 않았다.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면서
공원 정자 가장자리에 엉덩이만 걸치면
소주 한두잔 얻어마시는건 문제가 없었을텐데,
요즘 코로나인지 우한폐렴인지가 대유행이라
영감들도 몸을 사리는것 같았다.
'이게 다 문재인 때문이다!
진작에 내가 보배에 글쓴대로 나라를 운영했으면
이꼴은 나지않았을것 아니냔 말이다. 허.. 참..
왜 문재인은 내말을 안들어가지고!"
수꼴영감은 이런 같잖은 생각을 하며
이를 부득부득 갈아댄다.
수꼴영감이 계단을 터벅터벅 올라가서
2층 고시원 입구에 들어서는데
고시원 입구에
조선족 김씨와 베트남 노동자 구엔 뽕따이가
서서 이야기를 하고있다.
이럴땐 눈을 마주치지 않고
슬그머니 지나가는게 살길이다.
괜히 어정거렸다가는 또 무슨일을 당할지 모르는일.
수꼴영감은 긴장했지만
다행히도 조선족 김씨는
수꼴영감을 아래위로 한번 훝어봤을뿐
구엔 뽕따이와의 대화에 집중한다.
혹시라도
조선족 김씨의 심기를 건드릴 뭔가가 있을까 싶어서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걸어서
복도 모퉁이를 돌아선 수꼴영감은
안심하고 깊이 숨을 들이마신뒤
모퉁이에 가려 보이지 않는 김씨에게
손으로 퍽큐를 날린다.
그러고 나니 뭔가 자존감이 채워지는것 같아서
수꼴영감은 기분이 좋아진다.
지금은 저녁식사시간 두시간전.
그때까지 고시원 공용컴퓨터실에서
보배드림에 글이나 쓰겠다고 마음먹은 수꼴영감이
컴퓨터실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가 복도를 걸어온다.
역시 눈을 마주쳐봐야 좋을일은 아무것도 없을터.
수꼴영감은 슬쩍 눈길을 내려깐다.
그런데 이게 무슨일인가?
다가오는 이가 머리를 숙여
수꼴영감에게 인사를 하는게 아닌가?
이 에덴고시원에 산지 일주일만 지나도
수꼴영감을 무시할줄 알게된다.
일주일 이상 거주한자중에
수꼴영감을 존중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렇게 수꼴영감에게 인사를 한다는것은
분명히 신입이라는 뜻!
그것을 깨달은 순간
수꼴영감의 눈빛이 번쩍 하고 빛난다.
먹잇감을 찾은것이다.
수꼴영감은 돌아서서
스쳐지나간 외국인 노동자를
짐짓 꾸민 거만한 목소리로 불러세운다.
"새로왔어? 어느나라 사람이야?"
"네 새로 와씀미다. 캄보디아에서 온 쏙 썸밧 임미다"
"응 환영해. 내가 이 고시원 최고연장자야. 한국사람이고."
일단 이렇게 신입을 붙잡은 수꼴영감은
말이 잘통하지 않는 신입에게
손짓발짓을 다 동원해가며
한국의 연장자 대우문화를 강조하고는
고시원에서 잘지내려면 자신과 잘지내야 한다며
고시원 길건너 맞은편 1층 편의점에서
자신을 접대할것을
신입에게 강요하기 시작한다.
돈이 아까운지 망설이던 신입은
수꼴영감의 회유와 겁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접대에 동의하고만다.
고시원 입구에 있는 조선족 김씨의 눈에 띄지않기위해
5분뒤 편의점으로 오라고 신입에게 단단히 일러둔뒤
먼저 살짝 고시원을 빠져나온 수꼴영감은
편의점 바깥 테이블에 앉아서
뭘사게 만들지를 고민하며 한껏 행복감에 빠져든다.
정확하게 5분뒤.
시간을 지켜 나타난 신입을 앞세우고
편의점에 개선장군처럼 들어선 수꼴영감은
이것저것 먹고싶은걸 고르기 시작한다.
고향만두 한봉지, 비엔나 소세지 한봉지,
제육 도시락, 맥주 큰캔으로 하나.
아참 그리고 담배도 한갑. 아니 두갑.
계산하려면 제법 큰돈이 필요할테지만
어차피 상관없다. 수꼴영감이 계산할것도 아니니까.
신입이 비엔나 소세지에 그려진 돼지 그림을 보고
자기는 무슬림이라며 자신은 못먹는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상관없다. 수꼴영감 자신만 먹으면 되니까.
고른것들을 바구니에 다 담아 신입 손에 들려서
계산대 앞에 세우고는 눈짓으로 지갑을 꺼내라고
겁박하는 수꼴영감
신입은 주춤주춤 지갑을 꺼내기 시작한다.
"잠깐만요"
그순간 편의점 알바가 신입을 제지하며
수꼴영감에게 말한다.
"저기요. 김씨 아저씨가 아까전에 와서요.
혹시 나중에 두분이 편의점에 오면
자기한테 전화하라고 하셨거든요?
두분 오시자 마자 전화드렸는데
만약 외국인 노동자분이 계산하려고 하시면
계산해드리지 말고 기다리래요. 지금 오는중이시라구요."
수꼴영감의 눈이 촛점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한다.
급하게 고개를 돌려
편의점 유리창 바깥을 바라보는 수꼴영감.
길건너 횡단 보도에
나무빗자루를 들고 숨을 헐떡이며 서있는
조선족 김씨가 보인다.
구르듯이 편의점 문을 박차고 나오는 수꼴영감.
그는 횡단보도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수꼴영감은 오늘밤
공원 화장실의 장애인칸에서 자야할것 같다.
모기한테 좀 뜯기겠지만 그래도 쳐맞지 않는게 어디냐?
열심히 달려가며
내일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마음먹는 수꼴영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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