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째 5월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오늘을 기리며 많은 사람이 애도하는 가운데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한 사람이 여기 있다.
바로 故 안병하 전라남도 경찰 국장이다.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령을 내린 신군부는 경찰만으로는 치안 유지가 어려워지자, 안병하 국장에게 군 병력을 투입한 강제진압과 발포명령을 지시했다.
그러나 그는 군이 투입될 경우 시민들을 자극하여 오히려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며 이를 거부했다.
오히려 "우리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시민인데 경찰이 어떻게 총을 들 수 있느냐"며 경찰의 무기를 회수했다.
안병하 국장은 자기의 신념은 냉철하게 지켰지만, 시민 앞에서는 더 없이 따뜻한 경찰이었다.
부상당한 시민을 치료해주고 식사를 대접했고 옷을 갈아 입히는 등 편의를 봐주었다.
이러한 안병하 국장의 노력으로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과 경찰은 큰 충돌 없이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신군부 세력의 눈 밖에 난 안병하 국장은 경찰복을 벗어야 했고, 보안사로 끌려가 10여 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다 그 후유증으로 1988년 10월 10일 생을 마감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신군부 세력에 협조하면 탄탄대로의 출셋길을 걸을 수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마다하고 가족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다.
안병하 국장은 사망 이후에도 순직으로 인정 받지 못해 2005년에야 국립현충원에 안장됐고, 1년 뒤 국가 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
36년 전 오늘, 광주 시민들의 편에 서서 부당한 권력과 싸웠고 민주화를 지키기 위해 순직한 안병하라는 또 한 사람의 이름이 국민들의 가슴에 깊이 기억되길 바란다.
강원도 양양군 출생. 육군사관학교 8기 출신으로 1961년 경찰에 들어와서 강원도 경찰국장(현 지방경찰청장 개념), 경기도 경찰국장 등의 직책을 거쳐 1979년 2월에 전라남도 경찰국장에 임명되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했을 때 신군부 세력의 강경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학생 및 시민들의 시위에 온건하게 대처할 것을 일선 경찰들에게 명령하였다. 특히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오히려 일선 경찰들로부터 총기를 회수할 것을 명령해 1960년 4.19 혁명 때처럼 경찰에 의한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았다. 이로 인해 민주화운동 기간 내내 전남 및 광주 지역의 경찰들은 시민들과 큰 충돌 없이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후 안병하는 신군부 세력에게 '직무유기 및 지휘 포기'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동반한 고강도의 심문을 받았고, 이로 인해 자진 사직이란 명목으로 경찰 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때의 충격으로 건강을 해치고 생활고까지 겹쳐서 어려움을 겪다가 1988년 신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6월 항쟁 이후 신군부 세력이 물러나면서 5.18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고, 안병하에 대한 조사 또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5.18 당시 피해를 줄인 공이 인정되어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로 인정받았으며 2005년에는 국립현충원에
존경합니다
강원도 양양군 출생. 육군사관학교 8기 출신으로 1961년 경찰에 들어와서 강원도 경찰국장(현 지방경찰청장 개념), 경기도 경찰국장 등의 직책을 거쳐 1979년 2월에 전라남도 경찰국장에 임명되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했을 때 신군부 세력의 강경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학생 및 시민들의 시위에 온건하게 대처할 것을 일선 경찰들에게 명령하였다. 특히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오히려 일선 경찰들로부터 총기를 회수할 것을 명령해 1960년 4.19 혁명 때처럼 경찰에 의한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았다. 이로 인해 민주화운동 기간 내내 전남 및 광주 지역의 경찰들은 시민들과 큰 충돌 없이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후 안병하는 신군부 세력에게 '직무유기 및 지휘 포기'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동반한 고강도의 심문을 받았고, 이로 인해 자진 사직이란 명목으로 경찰 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때의 충격으로 건강을 해치고 생활고까지 겹쳐서 어려움을 겪다가 1988년 신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6월 항쟁 이후 신군부 세력이 물러나면서 5.18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고, 안병하에 대한 조사 또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5.18 당시 피해를 줄인 공이 인정되어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로 인정받았으며 2005년에는 국립현충원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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