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였던 김지은입니다. 현재는 안희정 성폭력 피해 생존자입니다. 불편하실지 모르지만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던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지 한달여 만에 고소인 김지은씨가 입을 열었다. 안 전 지사의 수행 비서를 지낸 김씨는 현재 항소심 재판을 진행 중이다.
김씨는 민주노총이 발행하는 기관지 ‘노동과 세계’에 “‘노동자 김지은’이고 싶습니다”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노동과 세계는 이 기고문을 20일 온라인 사이트에 공개했다. (바로 가기 : 김지은씨 기고문 )
김씨는 이 글에서 정부 부처 계약직 공무원으로 일하다 안 전 지사의 선거 캠프에 합류하고, 이후 별정직 공무원인 수행비서로 충남도청에서 일하게 된 과정을 소개했다.
그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선거 캠프에 합류했지만 “캠프 안의 분위기는 기대했던 것과 달랐다”고 썼다. “모두가 후보 앞에서 경직됐다. 후보의 말에 대들지 말고 심기를 잘 살펴야 한다는 이야기를 선배들로부터 수없이 들었다”고 했다.
이어 “도청에 들어와 가장 힘들었던 건 안희정 지사의 이중성이었다”며 “민주주의자이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지도자라는 이미지와 실제는 달랐다”고 말했다.
김씨는 “안희정의 수행비서는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휴일은 거의 대부분 보장받지 못했다. 메시지에 답이 잠깐이라도 늦으면 호된 꾸중을 들어야 했고 24시간 자신의 전화 착신, 아들과의 요트 강습 예약, 개인 기호품 구매, 안희정 부부가 음주했을 때 개인차량 대리운전 등 일반 노동자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주어졌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다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음에도 성폭력 피해를 당했고, 다음날 지사가 바로 사과하는 것을 듣고 잊으려고 했다. 아니 잊어야만 했다”며 “여러차례 피해가 이어졌지만 더 주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고 썼다.
김씨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눈밖에 벗어나지 않도록 더 일에 집중하는 것 뿐이었다”며 “비참하고 참담했지만 그게 살 길이었다. 지사의 덫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일만 했다. 노동권 침해와 성폭력 범죄 안에 갇혀 살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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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집회 중 참가자들이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내려진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러면서 “저는 최초의 여성 수행비서였기 때문에 이전 선배들이 겪었던 노동권 침해 뿐 아니라 성적 폭력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미투 운동’에 나서게 된 배경에 대해선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계속 안희정의 노예로 밖에 살 수 없겠구나 생각했고, 도망치고 싶었다.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막고 싶었다”고 했다.
김씨는 ‘업무상 위력이 존재했으나 행사하지 않았다’는 1심 재판부의 판결에 대해서도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느끼고 있는 일상적인 위력은 눈에 보이는 폭행과 협박 뿐만이 아니다. 침묵과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하는 것, 직장에서 술을 강요당하고, 달갑지 않은 농담을 듣는 것, 회식자리 추행도 노동자들이 겪는 위력의 문제이며 심하게는 ‘갑질’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김씨는 “재판 중 노동자로서 성실히 일했던 제 인생은 모두가 가해자의 논리를 뒷받침하는데 좋은 근거로 사용됐다. 피해자답지 않게 열심히 일을 해왔다는 이유였다”며 “그렇게 수년간의 제 노력은 일반적인 노동자의 삶으로 인정받기 이전에 ‘피해자다움’과 배치되는 인생으로 평가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끝으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부당한 지시를 하지 않는 상사와 함께하고 싶고, 어려움을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는 동료들과 일하고 싶다”며 “어쩌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언젠가 꼭 다시 불리고 싶다. 노동자 김지은이고 싶다”고 썼다.
한편 안 전 지사 사건 항소심은 서울고법 성폭력 전담부인 형사8부에 배당됐다. 항소심 재판은 이달 말이나 내달 초쯤 첫 기일이 잡힐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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