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글을 쓰는 이유는 저를 자랑하기위해서가 아니고 "이런사람도 있구나" 하고 혹 제경험이 도움이되어 살아가시는데
방향을 잡으실수 있는분이 한분이라도 있어서 도움이 될수있을까 하는 마음에 올려봅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때 어머니께서 택시타고 가시다가 트럭에 치이셔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언니가 중학교 1학년, 남동생이 7살이었어요. 저도 어려서 잘 기억은 안나지만 언니랑 엄마찾겠다고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실종되신줄만 알고 한참 찾다가 외삼촌이 경찰에 연락받고 영안실에서 찾았어요. 전 나이가 어려서 영안실에서 엄마얼굴도 못보고
언니는 직접 보았는데 엄마 얼굴 형태도 잘 알아보지 못할정도로 심하게 다치셨다고 하시더라구요.
지금생각해보면 직접 보았던 언니도 얼마나 큰충격이었을까 생각합니다. 아빠는 초등학교도 겨우 다녔던지라 매일 술만드셨고
괴로워 하셨어요.
엄마는 그때당시 하숙집을 운영하셨었고, 아빠는 대한통운에서 막노동 하셨었어요. 외삼촌이 좀 사셨던지라 엄마한테
하숙집하라고 집을 얻어주셨다고 하시더라구요. 하지만 돌아가신후 하숙집을 처분하셨었어요. 그때는 어려서 그런지 몰랐는데
커서 보니 제가 친척이면 좀 도와주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아직 남아있어요.
엄마가 여장부 스타일이시라 엄마가 없는 빈자리는 정말 컸답니다.
엄마 사고후 시골로 이사가서 아빠는 농사지으시고 저희는 학교다니면서 자랐어요.
그때 엄마 사고보상금 받은건 적금들어놨었는데, 엄마 묻힌 산소가 큰아버지가 아빠랑 같이 일하면서 번돈으로 사신거라서
따로 명의변경을 안해놓으셨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큰아버지도 사고로 돌아가시고 큰아버지 아들인 사촌오빠가
사업하다가 돈필요해서 큰엄마가 산소 이전하라고 저희집와서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난리였었어요.
그래서 적금 들어놓은돈으로 엄마산소자리를 그냥 다시 샀어요. 지금생각해보면 분묘기지권으로 산소 옮기지 않고
버텨도 된거였는데 이것도 지금생각해보면 큰엄마가 너무한것 같네요. 아빠는 속상해서 술만드시고,,, 못배우신탓이죠.
그래도 명절때 엄마 산소다녀오면서 김이라도 한병 주고옵니다. 아들들은 다 나가고 땅 다 팔아먹고 간신히
혼자 농사일하면서 겨우 사시고 계시거든요. 사람은 시간차이일뿐이지 못된짓한건 언제가 다 돌려받는것 같아요.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시골이라서 아침에 사람이 많아서 버스가 그냥 지나치는 날도 많았어요.
정말 열심히 뛰어서 학교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까지 걸어가면 1시간 뛰면 40분정도 걸렸던것 같아요. 그때당시 지각하면 선도부한테 혼났거든요.
뭐도 없는게 자존심은 강했던터라 누구한테 혼나는게 싫었었어요. 그리고 그때당시는 선생님이 가정형편 조사서같은거
요구하시고, 엄마없는사람 손들라구하고, 정말 그때는 왜그렇게 창피했는지 몰라요. 엄마없는게 제가 잘못한건 아닌데 말이죠.
그리고 그때당시 선생님들은 가정형편 어려운 학생들과 집안형편 좋은아이들과 편애도 많이했었어요.
그래서 더 없는티 안낼려고 했던것 같아요.
새벽에 일어나서 아빠 밥을 차려드리고, 도시락싸서 학교에 다녔어요. 한번은 중학교때 김밥을 싸갔는데 오이랑 당근을 볶지않고
넣어서 너무 맛이 없었던 기억이 나요. 지금도 아침형인간이되어 새벽 5시에 일어나는것도 그때 습관때문에 그런것같네요.
지금도 김밥보면 그때생각나서 좀 울컥 하긴 한답니다.그때 친구들이 달라고 할까봐
몰래 숨어서 먹었었던것 같아요. 언니는 빨래당번이어서 주말마다 손빨래 했구요.
아빠가 남녀차별이 심하셨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사달라고 했던 세탁기도 안사주셔서 맨날 손빨래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나 싶을정도입니다. 겨울에 물이 얼어서 안나와서 개울가 가서 손빨래 했다고하면 믿으시겠어요?
언니도 몹시 그게 힘들었는지 고등학교 취업나가자마자 세탁기부터 구입하더라구요. 전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취업해서 면허 따고 차부터 구매했었습니다. 너무 많이 걸어다녀서 정말 걷기 싫었거든요.
아빠는 거의 저희를 방목하다 싶이 하셨기때문에 뭐든 결정을 스스로 해야했어요. 대학교 보내줄돈은 없고, 여자니까 그냥
고등학교 졸업만하고 취업해라 하셨었어요. 저도 그땐 아빠가 말을 안해도 빨리 돈벌어서 쓰고 싶었던기억밖에 없었어요.
아빠는 술로 계속 달래면서 사셨고, 놀음도 하셔서 돈도 잃어보시고, 술드시면 주정도 하시고 다음날 기억도 없으시고,
그래도 다행인건 때리지는 않으셨어요. 아빠가 가진것이 없고 나이드셔서 새엄마도 없었구요. 지금 아버지는 뇌출혈로
치매판정 받으셔서 제가 누군지도 모르시고 요양병원에 계세요. 언니가 가까이있어서 돌봐드리고 있어요.
언니를 보면 다른 존경인물이 떠오르지 않아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공무원시험공부해서 지금 행정공무원 하고있어요.
가끔 고지식해서 답답할때도 있지만 정말 열심히 사는것 같아요.
그래서 전 고등학교 졸업후 회사경리로 취업해서 2년정도 공부하다가 그렇게 있다가는 계속 경리만 하게 생긴거에요.
대학나왔다는 과장 차장은 회사돈 빼돌리기에 바빴고, 그래도 진급하는거 보면 대학은 나와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게 된거에요.
돈벌은건 차사서 없었고, 언니한테 염치없지만 등록금만 보태달라고 했었어요. 그때 제형편에 4년제 갈 돈은 없었고, 2년제 대학에
겨우 갈수있었던터라 제 상황에 맞게 진학했어요. 실무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학교수업이 이해가 잘되더라구요.
언니한테 등록금과 집 전세금만 보태달라고 했던터라 푸세식 화장실이 있는 전세집 얻어서 최대한 생활비 아끼려고
김치만 먹고살았던것 같아요. 전세금은 나중에 돌려받으니까 월세보다 저렴했거든요.
알바하고 공부해서 전액등록금 받는거랑 비교할때 전액등록금 받는게 나을것 같아서
공부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2년내 전과목 A+였구요, 아 한과목만 교수님 일 도와주던거 사정생겨서 못도와준걸 섭섭해
하셨는지 A 제로 맞았어요. 나중에 졸업하고 교수님께 섭섭하다고하니 기억 잘 못하시더라구요. ㅎㅎ
다행이 과톱이라 전액등록금 받고 졸업했답니다.
4년제로 충분히 편입할수있었지만 안했어요. 배고프게 살기 싫더라구요 고기도 실컷 먹고싶고요.
그래서 취업했어요. 아빠 집근처로 얻어서 밥이라도 해드리자 해서 시골에 직장을 얻었는데 국내기업을 큰 외국기업이 M&A
한거였더라구요. 통역하는 몇명 빼고 기존 근무자들도 영어를 잘못해서 회사에서도 영어교육 많이 시켰었던것 같아요.
그 직장에서 9년 있었네요.
열등감인지 우리팀에 이화여대 나온 여직원이 입사했었는데, 영어만 잘했던기억이나요. 재경부에 입사하면서 부가세가
뭐냐고 물어봤던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내가 경력도 더 많은데 왜 그 여직원이 돈을 더 받아야 하는지 자존심 상하더라구요.
그래서 영어공부 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영어는 지속적 ,반복적으로 해야 느는거 알고있었고, 단기간에 안느는거 아니까
그렇게 부지런하지 않은 저에게는 장벽이었어요. 그래도 영어는 하자.. 그리고 4년제 대학과 2년제 대학의 차별이 또 있구나.
그래서 직장다니면서 방통대에 다녔어요. 학교만 다닐때보다 직장일하고 공부랑 병행하려니까 정말 힘들더라구요.
범위도 너무 광범위하고요, 방통대 다니는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그때 회사도 밤 10시 -11시에 끝났거든요. 외국계 기업으로 시작한지 얼마 안되서 그런지 외국계 시스템으로 전부 바꾸는
과정이라 일이 많았어요.
결국 그 회사에서 방통대 졸업하고 과장까지 진급한후 회사에서 평가받는 한국최고 점수를 받았었어요. 그런데 인사팀에서
불합리한 평가조건을 하는바람에 이 회사는 이제 내가 있을곳이 아닌가 보다 라고 하고 다른곳으로 이직했어요.
사실 그때 결혼하고 아들두 2명인데 이직은 사실 힘들었죠. 사람들이 다 말렸어요. 본사 상무님도 연봉 더 올려주고 할테니
그만두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근데 이직했어요. 이직후 스트레스가 그렇게 큰줄 몰랐어요. 이직한 회사도 국내기업+외국인 짬뽕된 기업이었는데요 조치원에 있었어요.
사무실에서 맨날 소리지르기 일쑤였고, 회식은 상사 집근처에서만 해야하고, 사장님 어머님 돌아가셨는데
각 팀장들 모두 장지까지 따라가서 시중들어야하고,, 그래서 그곳도 그만뒀어요. 그런데 거기서도 느낀거지만 그때
원가담당팀장이었는데 현장에서 살다 싶이 했어요. 그래야 많이 알수있으니까요. 그랬더니 상무님도
절 잘보셨는지 그만두시는거 서운해 하셨어요.
다행히 큰 외국계기업에 재취업이 되었어요. 여긴 너무 편한거에요. 월급도 많이주고, 금요일은 거의 일안하고
그래서 나이드신분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외국계기업이라 그런가 실적위주이고 구조조정도 자주 하더라구요.
나이드신분이 나가게 되어 제가 젊으니 제가 나가겠다고 하고 또 그만뒀어요. 그래도 여긴 1년 6개월 다녔네요.
그동안 일을 너무 열심히한 저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어요. 좀 쉬엄쉬엄 하니 좋더라구요. 하지만 이곳도
각 사업부 많아서 서로사업부끼리 공통비용가지고 더 배부못받네, 마네 해서 의견조합이 한번도 되지않았었다고 하는데
합의한것이 제가 있을때 처음이라고 하더라구요. 나름 뿌듯한 성과였어요. 그 결과 거기 공장장님이랑 친하게되었어요.
그리고 지금 제가 근무하는 이곳에서 근무한지 6년차입니다. 여긴 중소기업 외국계에요. 전체로는 1500명정도 되는데
한국공장은 40명정도에요. 큰회사있을때는 업무폭이 작았는데, 여기오니 여러가지 일을 해야 되더라구요
그래서 그동안 궁금해했던 전체 기업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떻게 평가하고 실적이 나는지, 어떻게 하면
성과가 배가 되는지 알게 되더라구요. 지금 제가 대표를 맡고있지만, 전 대표로 입사된건 아니구요. 하다보니
대표가 회사 매출액 떨어지고 더이상 비젼이 없다 판단해서 그만둔거에요. 그래서 그 자리를 제가 하고있는거구요.
그때 맨날 저에게 저직원은 저래서 못하고 이래서 못하고 맨날 직원핑계만 대고, 본인은 제일 잘한다고 했던것 같아요.
결국 좋은회사로 이직했지만 1년인가 지나고 또 다른곳으로 이직했다고 하더라구요.
사실 밤마다 본사랑 영어로 미팅에, 매출액 걱정에 직원들과 오래 근무할수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싶고,
모두 평등하게 일에만 집중할수있는 그런 문화를 만들고 유지하는게 제 지금 숙제이지만 자동차 경제환경이 좋지못해서
자동차 협력업체인 저희회사는 당장 내년에 매출액 급감에 어떻게 운영할까 고민중이랍니다.
미국계는 확실히 실적위주라서 폐업안될라면 머리 많이 굴려야 해요.
제가 왜 보배를 보게되었냐면 옆에 제가 의지하는 친구가 이런것도 있더라 하고 보라고해서 보게되었는데,
도움주는 의로운 분들이 많아서 제가 할수있는선에서 글로 사회활동 해보자 하고 쓰고있답니다.
무당하는 친구 잘못만나서 열심히 사는거 보고 없는돈 카드대출까지 받아서 빌려줬는데 아직 반도 못받고있어요.
아마 전 큰돈 생기면 회사일 안할것 같으니 계속 일하라고 하는 신의 뜻인가 하고.... ㅠ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탓인지 어려운데 열심히 살라고 하는사람 보면 도와주고 싶었던 쓸데없는 오지랖.
예전에 한번 빌려줬다가 5년걸려서 받았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또 그랬네요. 이제는 안그럴거에요. ㅎ
주식투자도 해보고 ELS했다가 망해도 보고 작년에 가상화폐 제일 높은가격에 사놨다가 지금은 거의 뭐..
그래서 10년보고 묻어두자. 하는맘으로 마이너스 대출갚으면서 살고있습니다.
돈많이 벌어도 마이너스 인생이네요.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래도 학자금대출받아서 대학원 졸업햇습니다.
이것도 직장다니면서 2년 반동안 다녔네요. 그결과 좋은 교수님들과 교류하게되었고.
부족한 실력이지만 학생들한테 가끔 특강하면서 외국계기업의 조직이나 필요한부분 리얼하게 강의해줄수 있게되었답니다.
자살충동 느끼시는분보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바쁘게 일하고 곁에 사랑하는 사람과
믿는사람이 있으면 좀 그런마음이 덜하려나요..멘탈좀 키워주세요.
그리고 내가 선택한 길이 옳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해보라고 하고싶어요. 자신을 믿으시구요.
이것때문에 안돼, 내상황때문에 안돼, 난 금수저가 아니야, 하지마시구요,
전 제가 주인이고 금수저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일에서 인정받았던 이유는 항상 내 돈이라면 내 회사라면
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일했던것 같아요. 누가시켜서 하면 노예인데, 내가 하지뭐 하면 내가 주인이잖아요.
저도 영어 잘못하지만 외국임원들도 똑같아요. 똑같이 사람이니까요. 문제 생기면 각 부서 책임 떠 넘기기 바빠요.
말을 더 자유롭게 하는 문화라 그런지 몰라도 핑계가 더 쩔어요.
그럼 저는 문제해결방법으로 가닥을 잡아요. 이렇게 이렇게 하자.. 서로 어떻게 하면 윈윈할수있는지 좋은방향으로요.
그러다 보면 누구 책임따지기전에 해결하려고 하는게 목적이니까, 구지 언어가 본인들만큼 능숙하지 않아도 의미는 알아듣더라구요.
본심을 안다고 해야할까요?
사물을 볼때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듯이 내가 보는 관점이 맞다고 생각할수도 있고,
다른사람이 다른관점에서 봐도 맞다고 볼수있어요. 본인들이 가지고있는 인식차이인거지
진짜 세상에 "정답" 이라고 할만한것이 얼마나 될까요.
저도 제가 살아온 과거를 아이들한테 어떻게 살아라 강요하고 싶지않아요. 왜냐하면 그때 제 상황이랑
지금 그리고 미래에는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까요. 저도 지금 구글이 없었다면 영작하고 번역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거에요. 영어는 살아가기 위한, 일을하기위한 하나의 도구이지 영어에 목메달고 싶진않거든요.
미국인하고 회의할때 제가 원어가 영어가 아니라 제가 하고싶은얘기 한국말처럼 빨리 말은 못해도
정확하게 요점 얘기하면 다 알아들어요. 그정도면 스스로 만족하고 삽니다. 회의끝나고 그러죠.
너희들은 한국어 못하는데 우리는 영어 하는게 어디야.. 그리고 사실 외국인이 시스템에는 강한데
돌발상황에 문제해결능력은 떨어져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창의적이고 똑똑한것 같아요. ㅎ
개인적 경험이니 다 그렇다는건 아닙니다. 우리 회사 직원들만 그런거일수도 있어요.
지금은 해야할일이있고, 듬직한 아들들이 있고, 믿을만한사람이 곁에있어서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맨날 일상이 반복같지만 밥먹는것도 반복인데 맨날 똑같으면 어때요.맨날 밥은 똑같아도 반찬은 조금씩 다르잖아요.
이렇게 글쓰면서 제 동기부여도 올리고요, 혹시 취업준비생이신분들 조직에 대해 궁금하신분
원가절감활동, 경영활동 외국계시스템 궁금하신 중소기업 사장님들 연락주시면 아는선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은시간에 두서없이 써서 글이 좀 이상할지 모르겟네요. 혹시 오타있으면 너그럽게 이해해주세요
오늘도 열심히 다양한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시는분들 화이팅하세요.!!
제 나이를 안밝혔네요. 40대초반 여성이며 두아들 엄마입니다.
회사에 있을때는 대표직원이지만 집에가면 엄마이고, 교수님한테 가면 학생이고 대학원동기 만나면 같은 원우입니다.
딱딱해서 안뿌러지도록 더 유연하게 사세염~
비티코인은 팔았고 이오스 개발단계부터 계속 지켜본지라
애착같고 갖고있는데 10년 더 가지고 있어야 될까봐요
오늘시세가 ㅠㅠ 상속으로 남겨 주는거 굿아이디어네요 ㅎ
입사부탁드립니다.
40넘어가니 받아주는데가 없네요.
뭐든 성실함이 무기라면 무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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