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역사이야기 두번째는...
병자호란에 잠깐 까메오 출연하신 이순신 장군 이야기입니다.
이순신 장군이야 뭐 모르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긴 한데,
그래도 조금은 살짝 다른 시각으로 써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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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작하기 전에.. 쪼크 하나.. ㅎㅎ
우리나라 지폐를 보면.. 조상 중에 위대한 분들은 다 있는데,
왜 이순신장군은 꼴랑 100원짜리 동전에만 있을까요?
지폐 디자인한 사람이 성균관대 출신이라는 믿거나 말거나.. ㅋㅋㅋ
부언설명을 하자면..
이황: 성균관 졸업생 및 대사성(국립대 총장급. 정3품 당상관) 역임
이이: 성균관 졸업생 및 직강(교수급. 종5품)
세종(이도): 대통령이니 국립대 이사장급
신사임당: 이이의 모친으로 성균관 학부모
이순신: 검정고시 출신의 부사관후보생 출신
...이라네요. --;;
쉰소리 집어치고 조금 진지해져 봅시다..
먼저 임진왜란의 발발 배경(원인)을 잠깐 살펴볼께요.
일본.. 이넘들은 정말 침략본능이 온몸에 충만한 종족들입니다.
(나중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까지 나오면 100% 이해하실겁니다.)
1590년 일본은 전국시대라 일본 내에서 땅따먹기가 한창이었고,
거기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시키가 짱 먹습니다.
짱 먹어서 겁나 기쁜것도 잠시..
1~2년 지나니까 아래 사무라이 넘들이 몸이 근질근질한거죠.
늘 쌈질과 칼춤만 추던 놈들이 놀고 먹으려니 엄청 답답했겠죠.
(해서 여기저기서 패악질도 했을 것이고..)
얼마 전에 최첨단(?) 무기인 조총도 생겼겠다...
집안싸움 하다가 남아도는 힘을 세계정복의 첫번째로 중국(당시 명나라)을 따먹기로 합니다.
이놈들.. 정말 간뎅이가 부었죠.
자기 섬나라보다 몇십배는 더 큰 나라를 따먹으려고 하다니..
(하긴 뭐 고구려 때도 간이 부은 으르신들이 많긴 했죠. 광개토대왕이나 대조영 등등..)
그런데.. 섬나라다보니 바다 건너서 명나라와 싸우려면 병참기지가 필요합니다.
조선을 그 병참기지로 삼으려고 한거죠.
이놈들, 당시 조선을 엄청 얕보았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조선은 200년간 큰 전쟁이 없어서 전쟁에 대한 위기의식이 별로 없는데다
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4대 사화를 비롯해 세력간에 계속된 집안(당파)싸움으로
외세침략에 대한 방비보다는 그저 제밥그릇 지키기만 급급했던 터라
정상적인 나라 운영도 안되는 시기인 반면,
사무라이 이놈들은 그동안 갈고 닦은 쌈 실력으로 에너지가 마구 넘쳐났었으니까요.
그러니.. 잽싸게 조선을 장악하고 조선 왕을 인질로 삼아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고 식량과 군사(조선인)를 조달하려고 했던겁니다.
한마디로 조선을 개 jot으로 본거죠. --;;
일단 일본 20만 대군은 700척의 배에 나눠 타고 부산 동래성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한양까지 속도전으로 밀어부치는데까지는 성공했습니다.
이 와중에 당시 조선의 사령관으로 추앙받던 신립 장군이 나서지만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의 대군 앞에서는 제대로 힘도 못써보고 깨갱~~
나름 장렬한 자결, 아니 -강물에-투신을 하지만.. 별로 장렬하지도 못앴습니다.
이제 조선은 바람 앞의 불티나 라이타불...
그런데 여기서 일본놈들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안되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바로 우리의 찌질 끝판왕 선조께서 의주로 도망을 가버린겁니다.
어? 이거 뭐지?
어떻게 한 나라의 왕이란 넘이 왕궁을 버리고 도망을 가?
(사무라이 입장에서는 왕이 도망을 간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일본군이 황당함에 얼떨떨해서 잠시 지체하는 사이
드디어 우리의 영웅 순신 LEE 께서 출동하십니다. 출또옹~~~~!
(참고로 이순신께서는 해군이 아닌 육군 출신입니다. ^^)
이순신께서 3도 수군통제인 총사령관을 맡기까지 스토리도 꽤나 심란하지만
여기서 그 스토리까지 얘기하면 다들 Back Space 누를 듯 하여 생략합니다.
그래도 이거 하난 짚고 넘어가죠.
원균이 경상우수사 자릴 차고 있었지만 거의 총사령관 급이었는데,
당시 조선 수군에 보유하고 있던 250여척의 군함(?) 중 1/3 이상을
원균 이 아새끼가 말아먹습니다.
(이 시키의 만행은 정유재란 때 또 나옵니다. 아~ 열받아!)
암튼.. 일본의 1차 군대가 한양까지 치고 올라갔지만,
당장은 조선에서 식량을 조달하기 어려워 본국에서 공수.. 아니 배로 쉬핑? 해와야 합니다.
이걸 간파한 순신 LEE께서
그 전쟁물자를 실어오는 배들을 아작내 버리기 시작합니다.
물론 일본 전함에는 식량 뿐 아니라 전투병들이 대부분이었죠.
이순신호 1차 출동이 율포,옥포,합진포 해전입니다.
이 때 전과를 보면 일본전함 37척이나 깨 버리는데,
조선 수군의 피해는 몇바늘만 꿰메면 되는 전치 3주의 경상 1명.
2차 출동인 사천,당포,당항포,율포 4차례의 해전에서도 조선군함 51척으로
일본군함 72척을 수장시키고, 88명을 포로로 잡습니다.
이 때 조선군의 피해도 제법 있었는데, 전사 11명, 전치 2주 이상 부상이 26명.
일본 군에 비하면 경미했지만 그래도... ㅠ.ㅠ
그리고 3차 출동은 조선 전함 90여척이 출동합니다.
이 때도 1,2차와 마찬가지로 원균과 이억기도 같이 합세합니다만
거의 순신리께서 하드캐리 해버립니다.(1,2차도 거의 마찬가지만 하지만.. ㅋ)
이 3차 출동이 바로 학익진으로 유명한 한산대첩인데...
이 때의 전과를 보면 일본 군함 100여척 격파, 일본 포로 250마리.
조선 수군의 피해는 전사 6명, 부상 25명.
축구로 따지면 거의 뭐 73:1 정도의 대승이죠. ㅋㅋ
아, 여기서 잠깐 우리의 순신 LEE의 전투 스타일을 짚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라는 명대사로 인해
적은 군함으로 대군단을 맞아 싸운 전쟁의 신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순신 LEE께서는 다구리 놓는 스타일입니다. ㅋㅋ
무슨 얘기냐?
임진년에 싸운 남해안 전투에서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대부분 원거리 포격으로 선빵 놓는걸로 시작해서..
다량의 조선 판옥선으로 소량의 일본전함을 잽싸게 깨 부시고 튀는 스타일이란 얘깁니다.
조선 판옥선은 일본 군함과 비교했을 때 높이가 높아서
배들끼리 부딪쳐도 일본놈들이 조선 군함에 오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크기도 더 크고 튼튼해서 양 나라 배가 부딪치면 거의 일본놈들 배가 부서지는 편이었죠.
어? 일본전함 수가 훨씬 더 많은데 어떻게??
네.. 전체적으로는 일본 전함의 수가 많은건 맞지만,
일본 전함들이 모두 떼거리로 몰려나와 싸우는건 아니었지요.
30척, 5척, 13척, 20척.. 이렇게 소량으로 몰려다닐 때
그보다 2배 정도 많은 조선 군함으로 기습적으로 몰려 가서 다구리를 놓은겁니다.
즉, 이길 싸움만 했다는거죠.
나중에 정유재란 때 싸운 명량해전에서는
12척의 군함으로 300척을 맞아서 싸운 순신LEE 답지 않은 굉장히 특이한 경우인데..
사실 이것 때문에 전 세계 해군에서 순신LEE의 전법을 교과서로 쓰고있다는...-.-
암튼.. 계속해서..
이후 4~8차까지의 출전에서도 적군 피해는 165척 격침, 4천명 이상 전사이지만,
조선수군의 피해는 전함 격침은 제로, 전사자 6명, 부상자 25명에 불과합니다.
암튼.. 일본 입장에서는
전쟁물자 조달도 안되고, 바다에서는 계속해서 순신님에게 깨지고,
명나라 이여송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에게 평양성이 탈환당하고..
권율의 행주대첩과 김시민의 진주대첩 등 여기저기서 깨지니..
더 이상 승리에 대한 자신이 없어져서 임진년 다음해 3월에 휴전을 하게 되죠.
(이 휴전도 조선과 한게 아니라 명나라와 하게 됩니다만.. --;)
그런데.. 그 휴전은 5년도 못가고
이 쪽바리 시키들이 1597년에 또 쳐들어옵니다. 이게 정유재란.
아~ 징한 놈들...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전부터
우리의 찌질 끝판왕 선조께서는 순신님을 굉장히 싫어하고 질투했습니다.
이걸 보면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과 계백장군과의 사이처럼 비슷한 점이 있는데,
백제의 영웅인 계백을 의자왕이 굉장히 질투했다죠.
암튼.. 뭐..
백성들이 이순신 장군 곁에만 있으면 안전할거라 믿고 잔뜩 모여드니까
이거 이러다 쿠데타 일어나는거 아냐? 하는 불안감도 생기고...
선조 입장에서 꼬투리 잡을게 없나~ 하고 잔뜩 벼르고 있던 와중에
다시 쪽바리들이 쳐들어온겁니다.
순신님에게 바로 명령을 내리죠.
빨리 나가서 쪽바리들을 쳐부셔라~ 하고..
근데.. 순신님께서는 뭔가 자신이 없었는지(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보가 정확지 않다는 이유로 황명을 거부합니다.
황명 거부는 바로 처형입니다.
순신님을 일단 옥에 가두기는 했으나 워낙에 영웅으로 추앙받던 이순신이라(폭동이 일어날까봐?)
차마 처형하지는 못하고, 말단직으로 강등시켜 백의종군을 하게 만듭니다.
('백의종군'이란 군복 대신 흰 옷을 입고 국방의 의무를 지키는 거 -.-)
하여 어부지리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17,000명의 군사와 134척을 이끌고 나가지만
칠천량에서 무참하게 대패를 당하고 꼴랑 12척만 겨우 남기고 퇴각을 하죠.
아니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원균 이 아새끼가 바다에서 일본과 싸우다가 패한게 아니라..
가덕도에서 일본에게 기습을 당해서 혼자 도망나왔다가
다시 조선수군 본거지인 칠천량으로 갔지만, 잔뜩 쫄아서 술만 퍼마시다가
1597년 8월 일본군의 야습으로 인해 그 많던 조선 전함 134척 중 꼴랑 12척만 남기고 대패.
또 다시 도망을 가다가 사무라이에게 칼 맞고 뒈지는데...
아우~~ dog baby~ 또 욕나오네..
암튼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선조 입장에서는 '미워도 다시한번' 이라고...
그래.. '조선 수군이 강한게 아니라 이순신이 강했다~' 라고 GG 치면서...
이순신 장군에게 또 간청을 하는 수밖에 없었죠.
제발 한번만 더 장군이 나서 주시오~ 라고...
하여 17:1이 아니라 330:12의 전무후무한 전설이 시작되게 되는겁니다.
명랑대첩은.. 뭐 영화로도 나왔고 워낙에 유명한 전투라 두말할 필요도 없고
여기서 자세하게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전과 기록을 보면
조선군 피해는 부상자 2명이 다고..
일본군 피해는 전함 31척 침몰, 사망 18,000명, 장군급 3명 전사 또는 부상
그리고 순신님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는
조선군 전사자 10명, 부상자 300여명
일본군 전함 200여척 격침, 150척 반파, 100여척 나포, 전사자는 2~3만명 추정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통털어(작은 전투까지 해서) 총 45번의 전투가 있었는데,
45전 전승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전세계 기록상으로도 역대급 기록이 아닐까 합니다.
한마디로 사기 캐릭터죠. ㅎㅎ
순신LEE의 전승 이유를 간략하게 정리를 해 보자면..
조선 수군의 장점인 강력한 하드웨어(강력한 화포를 갖춘 튼튼하고 큰 배)와 잘 훈련된 수군,
그리고 iOS 같은 뛰어난 소프트웨어(이순신의 지략),
이 3박자가 잘 맞아떨어진게 대승의 결과를 가져온게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추적60분 모드)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이건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말이죠.
여기서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많이 생깁니다.
이건 예전부터 쭈욱 생각했던 것으로서 그에 대한 자료를 찾다보니
몇가지 그럴싸~한 자료들이 있어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일단 노량해전은 충분히 피해도 될 싸움이었습니다.
왜놈들은 더 이상 승세가 없다고 판단을 하고(히데요시의 죽음이 더 큰 이유였지만)
일본으로 철군을 하는 상황이었고,
가만히 놔두면 그냘 물러가는데 왜 위험을 무릅쓰고 쫓아가서 뒤통수를 때렸을까요?
여기서 저는 개인적으로 2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이순신 장군께서는 자살을 하셨다. (가설1 - 자살설)
- 대부분의 해전에서 기함은 늘 중간이나 뒤에서 지휘를 합니다.(명량해전만 빼고는 거의 그랬죠.)
- 그런데 맨 앞에서.. 게다가 갑옷도 벗고 너무 노골적으로 몸을 드러냈습니다.
- 왜 그랬을까요?
- 그리고 45번 전승을 거둔 마당에 다 이긴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를??
- 아마도... 전쟁이 끝나고 논공행상을 할 때 본인은 분명히 음해를 당할걸 알고 계셨을겁니다.
- 어차피 선조에 의해 억울한 일을 당할걸 알고 있었기에
- 전쟁 중에 전사하는게 훨씬 위대한 죽음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 자살설에 크게 무게를 두진 않고 오히려 아래 은둔설에 더 무게를 둡니다.
2. 이순신 장군께서는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 (가설2 - 은둔설)
- 일단 조선 수군은 원거리 포격을 주로 구사했기 때문에, 야간보다는 주간에 주로 싸웠는데,
- 유독 노량해전 만큼은 야간에 이루어졌습니다.
- 이것은 야음을 틈타 장군을 도피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 그리고 사망 당시 이순신의 조카가 기록한 행록에는 이순신이 적의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을 당시
- 그 사실을 알았던 인물은 아들 회와 조카 완, 그리고 몸종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 그리고 이순신이 사망한 뒤 임시로 함대의 지휘를 맡은 이 역시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 참모들과 부하 장수들로 가득한 기함 지휘소에서 사령관이 죽자 그 지휘권이 고참 부하 장수가 아닌
- 신출내기인 아들과 조카에게 돌아갔다는 점은
- 결국 이것은 장군의 은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는 것을 의심케 하는 것들입니다.
- 아, 또 하나 있습니다.
- 1598년 11월 19일에 사망했으나 국가가 장례비용을 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80일 후에 장례가 치러집니다.
- 그리고 그로부터 15년 뒤인 1614년에 묘지가 이장되는데, 이것은 장군이 노량해전 이후 은둔하여
-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잘 살고 계시다가, 1614년에 실제로 사망하여 장례를 치렀음을
- 보여 주는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위의 2가지 설은 명확한 증거가 없는... 어디까지나 썰일 뿐입니다. ㅎㅎ
저도 자료를 찾다가 찾은 의혹일 뿐.... -.-
암튼.. 2번 은둔설이 사실이라면 좋겠습니다.
오래도록 더 행복하게 살아 계셨더라면.. 정말 좋겠습니다.
음.. 오늘은 글이 좀 길었네요.
그래도 다 읽어주셨을걸로 미~~씁눼다. ^^;
맞나요?ㅋ
재미있습니다
임진년에 많았던 의병들도 모두 사라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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