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이전까지 유관순은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명확한 기록도 없어서 허구의 인물이라는 설까지 나왔는데 무엇이 진실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대부분 증거가 없고 증언으로 전해졌고 소설에 가까운 기사가 나가면서 마치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퍼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목적이 있을텐데 누가? 왜? 그랬을까요?
3.1운동은 그것을 기획하고 실행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민족대표33인은 그저 허울만 좋을 뿐이고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상당히 드뭅니다. 대신 3.1운동 하면 무조건 유관순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옵니다. 1919년 3월 1일 당시에 유관순은 요즘으로 따지면 단순가담자였습니다. 휴교령이 떨어지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아우네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체포 돼 1심은 공주에서 5년형을 받았고 상고하여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됐다고 알려집니다.
그런데 유관순은 고문을 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심문과 재판도 끝났고 캐낼 것도 없는데 구태어 고문을 할 이유가 있었을지 의문이 듭니다. 다만 고분고분하지 않고 만세를 부르고 소란스럽게 한다고 하여서 많이 맞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유관순의 시신을 손수레에 싣고 돌아와서 살펴봤을 때 직접적인 사인은 구타를 당해서 장기가 파열된 것이었고 다른 고문의 흔적은 없고 전반적으로 몸이 부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심한 구타를 당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팩트가 말해주는 것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흔히 알려진 사후 시신을 토막 내 페인트 깡통에 담아서 전해졌다는 것과 모진 고문을 당했고 성고문까지 당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습니다. 설령 고문을 당했다고 하여도 그것을 확인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는 예상을 할수는 있지만 확정지어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1947년에 엄청나게 과장이 되면서 눈덩이 처럼 살이 붙어서 유관순은 신화가 돼 버린 것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종교는 불교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천주교였고 개신교가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개신교가 크게 번성하게 된 시기가 이승만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승만은 개신교를 장려했고 개신교 발전을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다했습니다. 그러다가 개신교 계열의 3.1운동 유공자를 발굴하라고 합니다. 이때 친일행각을 벌이던 이화학당의 인물들이 유관순을 추천했고 극적인 인물로 대중들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도록 각색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1947년 당시에는 천주교 신문이었던 경향신문에 개신교신자였던 기자가 쓴 '순국의 처녀(1947년 2월 28일 경향신문 3면)'는 팩트와 픽션이 뒤범이 된 진실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처음 나온 것이 유관순을 모진 고문으로 죽인 후 여섯 토막을 내 석유 궤짝에 담아 몰래 묻어 버리려던 것을 미국에 보고가 돼 미국을 두려워한 나머지 시신을 내주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완벽하게 허구입니다. 시신은 온전한 상태로 이화학당에 다니던 친구에게 전해졌고 그것을 손수레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때 확인 된 것이 사인은 장파열이고 몸이 붓고 온몸에 구타당한 흔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승만의 개신교계 3.1운동 유공자를 발굴하라는 말에 일제부역자들이 내세운 유관순은 신화적인 인물까지 됩니다. 조선의 잔다르크이며 신의 계시를 받아서 3.1운동에 참가하게 됐고 신의 뜻으로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이끌었다는 내용의 글들이 나옵니다. 아주 대대적인 선전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대중들에게 강력하게 각인 됐습니다.
▲ 1947년 2월 28일 경향신문 '순국의 처녀'
그러나 이승만이 4.19로 물러나고 장면, 윤보선이 정권을 잡았으나 일본군 장교 일제부역자 다카키 마사오 즉 박정희가 구테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유관순에 대한 것도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종교적인 부분은 모두 삭제해버리고 드라마틱한 부분만 남겨두면서 3.1절의 아이콘으로서 역할을 그대로 이어나간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졌고 3.1절 하면 유관순이 반사적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 글은 유관순 열사를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관순 열사가 자신을 종교적으로 이용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일제부역자들의 일제에 부역한 행각을 가리기 위해 이용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통탄스럽겠습니까. 그리고 유관순 열사를 이용하여 3.1절의 모든 것을 유관순 열사와 민족대표33인에게 집중 시키고 정작 3.1 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직접 이끌었던 사람들을 잊혀지게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3.1운동으로 인하여 정말로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순국하신 분들과 현장에서 죽임을 당했던 분들도 기억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너무나 아쉬운 것입니다.
유관순 열사에 대한 올바른 사실을 다시 써서 재조명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이 아닌 직접적으로 3.1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분들도 부각이 되고 마저 발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가운데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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