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한국역사학계 문제가 심각한것같아요~
~가짜 이순신검 국보 등재 해프닝~
그동안 문화재청으로부터 전해 받기를
이순신검으로 알려져 온 장도들에 대해 이번에 우리 운영진이 정밀 조사 한 결과
이 검들은
진검이 아니라 후대 만들어진 모조품으로 가품 된 것으로 운영진 전원일치 판단하
기에 이르러 이애 대한 결론을 내리고 회원여러분께 보고 드리게 되었습니다.
---------- 판단 과정 -------
그동안 운영진은 산님의 이 지시를 받고 3분야로 나누어 독립적 조사를 진행 한 바
"당시,이순신 사전사후 총상황,당시 전투 관련 총기록,당 제품에 대한 진위여부"입니다.
충격적인 점은
현재 우리나라 韓국사 내용 및 보관 유물 중 절반이상 이런 가품들이란 사실 입니다.
--- 이순신 검의 정의 및 관련 조사,판단 ----
산님의 특별 지시가 있었던바 운영진은 이번 이순신검에 관련해서는 학술적으로 좀
더 디테일한 연구조사가 진행되어야겠다고 생각하였고 관련 기록을 독립적으로 조사 한 바
지면상황을 고려해 그 중, 중요한 하나만 거론하자면
일제시대 만들어진 가짜이순신검
대표적인 이순신 검에 대한 역사학적 지식과 정의 입니다.
역사학적으로 "이순신 검" 이란 군 통례와 왕실의 법도 전례상황등을 종합하여 결정
되므로 통상적으로 임란 당시 李조선의 선조왕으로부터 전투왕명을 받아 받들 때
하사되은 왕검(왕으로부터 명을 받은 증거로 하사되는 증표가되는 검으로 이 검에는
인끈이란 왕이 직접 매어주는 왕의 권한을 의미하는 매듭과 보검으로 형성 된다.
현재 문화재청은 똑같은 두자루를 국보로 지정하겠다고 통보 한 바,지극히 무식한
부분입니다.제대로 된 역사,국사관이 만연한 韓국사학계 현실에서 바른 개념 없이
수박겉핡기 학자,가짜논문학위자들이 지배하다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는데, 그래도 5천만에 하나라도 개념 탑재된 학자라면 장군검은 똑같은 두자
루가 있을수 없다는데 동의할것 인 바, 이부분 유사,가짜학자외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할
수 없는부분으로 확신 합니다.
이부분은 몇백년 간 왕검,장군검만을 대대로 제작해온 모 달인에게도 자문받은 사항
이기도 합니다.
즉, 현재 청에서 국보지정하려는 그 검들은 모조품 가품 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
즉각적으로 학술적,상식적,전문적으로 재조사 실시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장군검이 아니라,일반 장교검일 가능성 포함)
--- 재질 부분 ---
이 검은 재질,형태등 전체적인 모습를 살펴 볼 때 일반적 형태,모습 인 바,총혁의 경우
즉,허리에 두르는 가죽벨트가 일반 장교용 단겹이 아니라 2겹(장군)이나 3겹(왕검)의
범례에 비추어도 이 검은 도장검형태이며 칼의 디자인도 본래의 고려도검 형태가 아닌
일본풍 도검 형태로써 일본풍에서도 중저급의 품질로 평가 된다는 전문회원의 최종 보
고 의견이고 보면,이순신이 현쟝에서 어명을 수행하며 늘 패용해야 할 장군검 아니다..
또한
당시,사전 사후 현장 조사 부분
이순신장군의 최후 상황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인데 마지막 출전 상황을 기록한 내용
李舜臣方戰 免?自中丸以死~,(전투모 전투복 모두를 버리고 돌진하여 죽었다)고 실
사 기록 된 바,장성출신으로 우리회 군사전문회원이기도 한 백산님은 전투 상황에서
이런 경우는,죽음을 무릎쓰고 홀로 돌격하는 모습으로써,"당시 전투에 임하는 생생한
목겸담의 기록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평가했습니다.이 부분에 무척 중요한 이유는
전투관례상 장군 전사경우 승전,무승전 경우,장군의 시신과 함께 왕검등 유품은 왕명
에 따른 부관들의 엄중힌 임무사항이기도 하므로 이런 군률이 있는데도 이순신장군의
부장품 관련 기록이 전혀없다는 점은 대단히 특이한 일이 아닐수 없다.(심지어 같이 출
전한 두 아들까지도)언급이 없는바,이는,당시 현장상황을 지시하는 중대한 대목이다.
즉, 이 자체가 대단한 진실을 증거하는 대목이 된다는 전문 의견 입니다.
(당시 벗어버린 화려한 갑옷과 인끈 장군검이 적에 포획되거나 사후 유실되거나 등)
(참고)
왕검,장군검의 경우 왕실의 특별주문에 의해 제작되며 그런 보검에는 황검,왕검
등의 글자외 문장을 기입하지 않는 사례로 볼때"三尺誓天山河動色一揮掃蕩血染山河등
의 문장은 장군검이 아니란 증거가 된다.
이 검에 대한 총체적으로 종합 결과
이순신 시신외 검등 부장품 일체는 현장에서 수거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많으므로 현재
전해지는 이순신검은 모두 이후에 가작된것으로 보기에 충분하다는 학술적 판단압니다.
운영진은
이러한 3방향에서의 위 이순신 검에 대한 학술적 조사 및 판단을 산님께 말씀드렸는데
"이정도면 진품이 아닌것이 99%이상이므로 사실이 아닌것을 사실로 기록 할수 없드시
진품이 아닌데 진품으로 처리 할 수는 없는 일 이므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씀 하셔서
운영진은 오늘, 이 사실을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결론,
현재 국보로 지정될 이순신 검은 진품이 아니므로
국보로 지정 될 수 없다.
(이 조사결과가 무시되고 국보지정 강행 경우.국보지정 취소소송 실시 예정 입니다)
아울러 드릴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순신 검 뿐아니라,韓국사 내용 절반 이상의 내용이 이딴식으로 기술된 심각한 내용 문제)
강단, 재야 모든 韓국사학자 및 문화재청등 정부관련 관리들에게 강력 요청 합니다.
우리 고려역사 관련 해 이런 저급 저질적인 수준에서의 생각과 운영을 즉시 중단하고
현재 교육되는 모든 국사 역사 관련 내용에 대한 전수조사(재조사)를 실시 할 것 을
강력히 촉구 합니다.
현재,가르치는 국사 내용은 일국의 국사가 아니라,완전 사이비종교집단 내용입니다.
(현재 韓국사 내용 절반이상이 이런식으로 마구 조작된 내용 상태이기때문에 이런 사실은 우리
참역사회에서만 의문을 제기할수있고 객관적 학술적인 조사,연구가 가능하다는 사실,현실!!)
운영진 공저 내용입니다.
KHAN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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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휘둘러 쓸어버린다’ 이순신 결기 담긴 2m 칼, 국보 된다
입력2023.06.22. 오후 4:19
문화재청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인 ‘이순신 유물 일괄’ 가운데 칼 한쌍을 ‘이순신 장도’라는 명칭으로 국보로 지정할 예정이라고 22일 예고했다. 이순신 장도는 길이가 약 2m로 크기와 형태가 거의 같은 한쌍의 칼이다. 문화재청 제공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고금의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불패의 장군이었다. 16세기 말 조선 바다를 침략한 일본 수군과 40차례 넘게 싸워 단 한번도 지지 않았다.
8년 전란 시기의 험한 세월을 불패신화를 세우며 나라를 지킨 장군의 결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이 지금도 전한다. 1598년 노량해전에서 흉탄에 맞아 절명하기 전까지 항상 좌우명처럼 살펴보며 전의를 가다듬었던 두 자루의 긴칼(장검)이다.
1594년 경상도 통영 한산도의 수군 진영에서 두 장인을 시켜 만든 두 칼은 이른바 ‘충무공 장검’ 혹은 ‘이순신 장도’로 불리운다. 무엇보다도 장군이 지어 각각의 은빛 칼날 위쪽에 새긴 저 유명한 두 시구들 덕분에 후대에 그의 분신과도 같은 유품이 됐다.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떤다’는 뜻의 ‘三尺誓天山河動色(삼척서천산하동색)’과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는 뜻의 ‘一揮掃蕩血染山河(일휘소탕혈염산하)’란 시구가 그것으로, 충무공의 무인 정신을 표상하는 경구로 추앙받는다.
충무공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이순신 장도’가 나라의 국보가 된다. 충무공 종가의 유산으로 전하다가 1963년 장군의 유품인 옥로(갓 위를 장식하는 옥 공예품)와 허리띠(요대), 잔과 받침 등과 함께 ‘이순신 유물 일괄’이란 통합명칭으로 국가보물에 지정됐고, 2000년대 이후로 충무공 사당인 충남 아산 현충사에 기탁돼 보관 중이던 두 자루의 칼에 대해 문화재청이 22일 단독 국보 지정을 예고했다. 문화재청은 이와 더불어 국가보물인 ‘이순신 유물 일괄’에는 허리띠를 보관했던 원형 나무함(요대함)을 목록에 추가시켜 지정 예고했고, 원래 포함됐던 ‘잔과 받침’ 유물은 ‘도배구대’란 한자 이름 대신 ‘복숭아모양 잔과 받침’으로 공식명칭을 바꾸기로 했다.
‘이순신 장도’는 각각의 길이가 약 2m에 달하며 칼과 칼집의 크기와 모양새가 거의 같은 한쌍의 갖춤을 이뤄 <이 충무공전서>(1795)의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칼자루 슴베에 갑오년(1594) 4월에 장인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었다는 뜻의 ‘甲午四月日造太貴連李茂生作(갑오사월일조태귀련이무생작)’이란 글귀가 새겨져 제작 시기와 제작자를 일러준다. 칼날에 새긴 명문과 물결무늬 선각장식, 칼자루·칼집의 테와 고리를 장식한 은입사기법, 가죽?금속?칠 등 다양한 전통공예 기법 등이 조화롭게 활용돼 조형적 완성도와 예술성이 뛰어난 명품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은 칼날의 시구와 칼자루의 제작 명문 등에서 충무공의 역사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뿐 아니라 조선 도검의 전통 제작기법에 일본의 제작기법이 유입돼 적용된 양상도 보여줘 군사사 측면의 가치도 높다고 지정 사유를 밝혔다. 청 쪽은 30일간의 예고 기간에 각계의 의견을 들은 뒤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보와 보물 추가 지정을 확정할 예정이다.
문화재청은 이와 함께 고려·조선시대 불교혁신운동 ‘결사’의 거점이었고 19세기 실학자 정약용이 유배와서 인연을 맺은 고찰인 전남 강진 백련사의 대웅보전도 이날 국가보물로 지정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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