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면 현해탄을 헤엄쳐서 건너오겠다고 약속하자 출국을 허락, 2경기를 모두 원정에서 치르는 악조건에도 일본을 1승 1무로 제치고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는 쾌거를 이룬다. [3] 참고로 이 1954년 스위스 월드컵도 원래는 서울과 도쿄 두 곳에서 예선전을 할 예정이었는데, 이승만 본인이 일본 대표팀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한국 땅에 들어올 수 없다고 강력히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도쿄에서 두 번의 예선전을 모두 치러야 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외교에 임할 때 약해빠진 한국이 숙여봤자 깔끔하게 무시당하고 즈려밟힐 뿐이라는 생각으로 없는 살림에도 대단히 공세적인 방식을 선호했다.[4]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남한 전역을 빼앗겼을 때조차, "대한민국 정부를 돕기 위해 일본군이 지원된다면 어떤가?"라는 미군의 질문에[5] "일본군이 상륙한다면 일본군부터 물리치고 볼 것"(왜관 발언)이라고 일말의 타협도 내비치지 않은 인물이었다. 부산으로 피난을 간 절박한 상황에서도, 1033호 각서의 철폐는 이승만에게 심각하게 인식되었다.
1033호 각서 철폐를 부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서명은 1951년 9월이었고 이듬해 4월 발효될 예정이었다. 이에 이승만은 발효를 석 달 앞 둔 1952년 1월, "한일간 평화유지를 위해"라는 명목으로 평화선의 설정을 선포한다.
당시 국제법상 영해의 기준은 3해리였으나, 20배인 60해리를 안전선로 선포했고 이는 당대 통용되던 국제법을 어긴 조치였다. 전쟁 중이지만 미국으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조치였기에, 선포 한달 뒤인 2월 12일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했으나 이승만은 미국의 통보를 무시했다.
물론 일본 정부도 대응하려 했으나, 주권이 회복되려면 석 달이나 남았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1월 24일 "영해는 공동으로 논의해야 하는 것", 1월 28일 "독도를 평화선 내에 포함한 것은 영토 침략"이라는 먼 산 메아리스런 성명만을 내놓았을 뿐이다.
그해 4월, 드디어 일본의 주권이 회복되자 일본 역시 대응에 나선다. 그러나 일본의 대응은 상당히 소극적인 것이었는데, 어업 지도선이 독도에 들어와 독도의 일본 주소(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를 적은 나무 팻말을 꽂아두고 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일본측이 지난 1948년 미 공군의 독도 오폭으로 숨진 조선인 어민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위령비를 바다에 던져 버리자[6] 격분한 이승만은 이를 중대한 도발로 간주하여, 독도에 꽂힌 팻말을 뽑아 바다에 던져버리고 10월부터는 전시 긴급명령으로 포획심판령을 제정하고 일본에 대해 본격적인 실력 행사를 감행한다. 해군 등 가용한 모든 해상 전력을 동원해 평화선 내 해역에서 조업하는 일본 선박들을 나포하기 시작한 것이다.[7] 전쟁 중인 국가의 영토에 들어와서 일본령이라고 적힌 팻말을 적어놓고 가는 불난 집에 와서 도적질을 하는 파렴치한 망동에 대한 당연한 귀결이었다.[8]
이는 나포 시 선내의 모든 물건과 장비를 몰수하고, 선원들은 모두 구속해 재판에 회부하며, 정선명령을 거부하거나 도주를 시도하면 바로 전투배치에 돌입해 총격을 가하고 심지어는 충각으로 배를 격침시킬 정도로 강경한 대처였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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