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나리씨(가명)는 최근에 열린 레이싱 모델 선발대회에서 입상하고도 수상 상금을 받지 못했다. 피켓에 적힌 수상금이 전액 현금으로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대회가 끝난 뒤에 알았다. 상금의 20~30%만 현금으로 지급되고 나머지는 식사권, 와인·지갑 세트, 피부 관리·성형 수술 상품권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최씨는 “당연히 현금으로 지급되는 줄 알았다고 주최측에 말하자 갑자기 반말을 하며 ‘언제 그렇게 말한 적 있었느냐’라고 큰소리 치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내가 더 당황했다”라고 말했다.
상금 지급이 늦어지는 이유에 대해 주최측 관련자는 "행사 진행 비용이 예상 금액을 넘어섰고, 협찬사들의 업무 협조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예산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다. 상금 부분은 당초 약속한 대로 이미 지급된 부분도 일부 있고, 빠른 시일 내에 모두 지급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 대회 수상 상금을 협찬한 협찬사는 "지급이 늦어지고 있는지 몰랐다. 당초 주최측과 계약한 금액은 지급을 완료하였다"라고 말했다.
주최측 한 관계자는 이번 사태와 관련해 "상금 지급과 관련하여 리허설시 참가 모델들에게 고지하였고 관련 부상이나 상금도 지급했거나 조만간에 지급할 예정이다"라고 해명했다.
대회 상금 못 받고 모델 에이전시 눈치만 살펴
사실 이 정도 논란은 애교에 지나지 않는다. 최씨는 2년 전에도 레이싱 모델 선발대회에서 1등을 하고 수상 상금을 받지 못했다. 몇 번이나 요구하고 따진 뒤에야 겨우 받을 수 있었다. 모델 에이전시를 운영하는 김 아무개 실장은 “관행이다. 따지는 수상자한테나 생색내듯이 주지 웬만해서는 상금을 주지 않는다. 협찬사도 자동차 부품회사나 성형외과 등으로 규모가 크지 않아 행사 후 감사 활동을 펼치지 않는다. 악순환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라고 말했다.
김실장은 지난 1월에 열린 ‘2008 CJ 슈퍼레이스 종합 시상식’ 부대 행사로 열린 ‘2009 아레나 코리아 레이싱 모델 선발대회’가 제대로 상금이 지급된 유일한 대회였다는 놀랄 만한 이야기도 아무렇지 않게 전했다. 최씨 역시 “선발대회 참가자들끼리 ‘수상해도 돈을 못 받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라고 증언했다.
레이싱 모델들은 이런 피해를 당하고도 쉬쉬하며 넘어가기 일쑤이다. CJ가 주관하는 대회를 제외하고는 모델 에이전시 매니저들이 몇몇 업체로부터 협찬을 받아 선발대회를 여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런 문제점을 떠벌리고 다니다가 매니저에게 찍히면 향후 활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레이싱 모델 이미경씨(가명)는 “문제의 매니저와 일을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에이전시와 일을 하는 것까지 막는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국내 모델 에이전시는 영세한 곳까지 합치면 50여 군데 정도이다. 하지만 대규모의 행사를 진행할 만큼 레이싱 모델 동원력을 가진 에이전시는 열 손가락에 꼽는다. 이런 이유로 모터쇼나 신차 발표회를 여는 업체들은 대형 에이전시를 주로 찾게 되고 결국, 몇몇 매니저가 막강한 입김을 가지는 구조를 탄생시켰다.
연예인들도 대형 기획사의 횡포에 몸살을 앓지만 레이싱 모델들의 상황은 이보다 더욱 열악하다. 소속사도 없이 프리랜서로 활동하기 때문에 모델 에이전시로부터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도 하소연할 곳조차 없다. 협회가 없어 조직의 힘을 빌릴 수도 없다. 선발대회 수상금만 하더라도 개인이 민사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선발대회는 규약도 없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사기죄로 형사 처벌하는 것조차 어렵다.
선발대회가 열리는 지자체에서도 감시할 권한이 없다며 손을 놓고 있다. 서울시 행정과 김기택 사무관은 “단체가 시의 지원금을 받아 행사를 진행했다면 사후 감사를 벌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내부 활동까지 시가 일일이 감시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모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레이싱모델 협회를 만들려는 움직임은 진작부터 있었다. 하지만 레이싱 모델의 일이 대부분 혼자하거나 2~3명이 팀을 이루어 하는 것이어서 뭉치기가 쉽지 않다. 아시아모델협회 조우상 회장은 “레이싱 모델은 패션모델처럼 정통성 있는 선발대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수도 없다. 선두에 나서서 조직을 만들만큼 성공한 선배도 없다. 현실적으로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협회를 만들려다 그만둔 한 대학 모델과 교수는 “2010년 10월, 한국에서 국제자동차경주대회인 ‘F1 코리아 그랑프리’가 열린다. 이를 대비해 레이싱 모델들의 역량도 강화하고 전문적인 직업군으로 격상시킬 수 있는 교육을 실시하고자 협회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모델 에이전시들이 싫어하더라. 협회가 생기면 모델들의 초상권 문제, 모델료 담합 행위 등 모델들의 권익 향상을 위한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으니 경계하는 것이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전문적인 정보 전달자로서 활동 폭 넓히려 애써야”
2006년 한국모델협회 내에 레이싱 모델 분과위원회가 생겼지만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분과가 생기면서 레이싱 ‘걸’에서 ‘모델’로 명칭이 바뀐 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과위원회 운영위원인 박 아무개 씨도 “이제 시작 단계이다”라고 말한다. 박씨는 “운영위원 13명 모두 본업이 따로 있다. 자신의 일을 하면서 협회 일을 적극적으로 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해에는 레이싱 모델에 대한 이미지 쇄신 작업으로 자선 행사를 주로 열었다. 앞으로는 좀 더 적극적으로 다양한 행사들을 진행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레이싱 분과위원회는 남발하는 레이싱 모델 선발대회를 교통정리할 만한 권한도 없다. 이사들이 업계 관련 일을 하기 때문에 다른 모델 에이전시가 주최하는 선발대회를 하지 말라고 하게 되면 이권 다툼으로 밖에 비치지 않아서이다. 대안은 패션모델처럼 ‘SBS 슈퍼모델’ ‘아시아 슈퍼모델’ 등 정통성 있는 레이싱 모델 선발대회를 만드는 것. 하지만 돈이 없어 이마저도 어렵다.
차선책으로 레이싱 분과위원회는 올해 1월에 열린 ‘CJ 슈퍼레이스 종합 시상식’ 부대 행사로 레이싱 모델 선발대회를 개최했다. 박씨는 “한국모델협회(KMA) 이름을 달고 선발대회를 진행하는 조건으로 수상자들에게 정확한 상금 수여는 물론 향후 레이싱 팀에 소속해 지속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대회가 레이싱 모델의 등용문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조심스럽게 입장을 밝혔다.
업계 관계자들은 좀더 장기적인 안목에서 레이싱 모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할 때라고 조언한다. 한 대학 모델과 김 아무개 교수는 “레이싱 하면 차만 생각한다. 자전거, 보트, 비행기 레이싱 등 범위가 넓다. 레이싱 모델은 차 옆에 서 있기만 하는 인형 같은 존재가 아니다. 레이싱 전반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정보를 전달하는 전달자이다. 레이싱 모델들이 활동 폭을 넓히게 되면 선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전문 직업군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할 수 있다”라고 충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