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한국군은 미군이 영변을 폭격하면 북한은 반드시 보복할 것이며, 이로써 전면전으로 확전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걱정했다. 가장 위협적인 것은 북한의 장사정포인데, 갱도 안에 있는 장사정포를 무력화하려면 우리 특수부대를 투입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북한 장사정포 중 170밀리 포는 거리가 멀어서 우리 포가 미치지 못하고, 갱도진지나 산의 뒤쪽에 있는 포는 더더욱 찾기 어려웠다. 그러니 특수부대가 가서 일일이 제압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개전 초 2~3일 이내에 우리 군사력의 37퍼센트가 손실되고 서울에서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한다는 것이 우리 측 결론이었다.
김종대, 『위기의 장군들』, 83
1994년 북핵 위기가 고조되고 4월 북한 대표가 판문점에서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하자 6월에는 전쟁이 기정사실화되었다. 한미연합사 작전부장인 토미 프랭크스 소장은 텍사스 카우보이 스타일의 장군으로 이미 전쟁을 받아들이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걸프 전쟁에서 이라크군을 완벽하게 제압했던 프랭크스에게 북한은 며칠이면 붕괴시킬 수 있는 원시국가처럼 보였다(81)."
이 당시 김영삼 정부는 대북 강경책을 펴고 있었는데 막상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겁이 나기 시작했다. 군에서도 전쟁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전쟁 준비 실태를 점검했는데 곳곳에서 허점이 드러났고, 실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우리 측의 피해를 최소화 할 방법도 없었다. 특히 170mm 자주포와 240mm 방사포 등으로 구성된 북한의 장사정포가 우리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이 포들이 서울을 일제히 타격하면 남한 시민들이 입을 피해는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군에서 생각해낸 것은 미7공군사령부의 F-16을 동원해 북한 장사정포를 제압하는 방안이었다(83). 하지만 한국군의 주장(이라기보다는 요청)을 들은 7공군은 경악했다. "저공비행으로 방공망이 조밀한 북한 장사정포를 타격할 경우 생존확률은 50퍼센트에 불과했다(84)." 이 때문에 미 7공군은 극렬히 반대를 표명했지만 수십 번의 요청 끝에 한국군의 간곡한 요청이 받아들여졌다(84).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국군의 요청을 미군 측에 전달하던 정경영 중령은 미군 커밍스 대령으로부터 쌍욕을 들어야 했다.
서울 인근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이에 대해 우리 의견을 당당히 말하지 못하고 통사정하는 한국군과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호통 치는 미군 고위 장교. 모두가 전쟁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시점에 한국 정부는 미국의 일방적 행동을 제지할 능력과 의지도 없이 오직 미군 고위 장성들 간의 합리적 결정을 구하며 사정하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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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카터 미국 전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합의를 하면서 1차 북핵 위기는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고 고조되던 전쟁 위기도 사그라 들었다. 카터가 이끌어 낸 북과의 합의 사항도 위기를 극복하는 데 중요했지만 한편으로는 북한이 서울을 향해 집중시켜 놓은 포병 전력이 미국으로 하여금 전쟁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전략적으로 보면 포병을 집중 배치해놓는 것은 비합리적이었지만, 북한은 대부분의 포병 전력을 서울 타격을 위해 배치해, "서울 시민을 인질로 한 강한 전쟁 억지력을 구축함으로써 자신들의 안전이 도모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전략은 주효했다(86)."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한국 민간인 피해만큼이나 미국에게 해결이 어렵던 문제는 한국 내 미국인 8만 명을 어떻게 대피시키는가였는데,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서울의 미국인들을 신속하게 대피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YS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이 클린턴에게 전화를 걸어서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는 후에 거짓으로 판명이 났다. 당시 통역관이 그런 말을 미국 측에 전달한 사실이 없다는 증언이 나왔고 미국 측에서도 통화기록까지 제시하면서 YS에게 그런 전화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큰 배포로 하나회 척결 등 숙군을 주도한 YS였지만 정작 전쟁 위기 앞에서는 별로 한 일이 없었다. 그간 강경한 입장을 표명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전쟁에 직면하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수가 안보에는 유능하다는 생각이 한낱 선입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제 2 한국전쟁의 위기가 지난 후 8년인 2002년, 리언 러포트 연합사령관이 이남신 합참의장의 방에 찾아와 럼스펠드 국방부 장관의 지시로 구상된 미국의 새로운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그는 "미국의 현대화된 항공력으로 북한의 장사정포 포탄이 서울에 단 한 발도 떨어지지 않도록 하면서 북한의 핵시설을 정밀하게 폭격할 수 있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이른바 작전계획 5026이었다. "이 계획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로 위협하려는 징후가 있을 때 이를 선제행동으로 제거하면서 서울의 안전을 도모하는 각종 군사적 방책을 담고 있었다(86~87)."
1994년과 달리 2002년에는 미국의 항공 작전 능력이 눈부시게 발전해 있었다. 스텔스 기술이 적용된 폭격기(B-2)와 전투기(F-22), 스마트 폭탄인 합동직격탄(JDAM), 여기에 지하시설을 타격할 수 있는 벙커버스터까지 예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신무기들을 사용하면 단기간에 전방의 북한 포병을 제압하고 북한의 전쟁 능력을 마비시키는 게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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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인 주장이다. 신무기 덕에 북한 포병 공격을 막을 수 있으니 전쟁이 나도 서울이 안전하다는 주장이었다. 과연 그러한가는 인류 역사상 민간인들에게 안전한 전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쉽게 나올 것이다.
당연히 미국의 전력은 북한을 몇 번이고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반면 북한은 지금껏 포병 전력을 이용해 서울 시민들을 인질로 잡고 전쟁 억지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핵 전략 중 하나인 맥나라마의 상호확증파괴의 축소판이 그간 한반도에서는 통용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전의 다른 글에서 정리를 했듯 상호확증파괴는 일방의 방어 능력이 향상되어 다른 측의 확증파괴 능력이 손실되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미국이 북한 포병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되는 순간, 전쟁의 억지력은 상실된다.
반 에바라의 공격방어우위론에 따르는 경우, 공격이 더 우세하고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전쟁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정밀 항공 타격으로 북한의 포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된다면 미국은 언제든 북한에 대한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이라크에서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상대로 군사적 조치를 취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흔히 논의되었던 북한 핵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적인 타격은 물론이고, 선제공격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된다면 어차피 전면전을 할 바에는 우리가 먼저 공격을 하자는 심산으로 선제공격론이 득세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럼스펠드의 말을 우리가 얼마나 신뢰를 할 수 있을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럼스펠드는 미국 미사일 방어체계(MD) 사업의 핵심 인물이었다. '요격'을 통한 미사일 방어 체계는 레이건 행정부 당시 처음(?) 제시되었고(당시에는 이 계획을 별들의 전쟁, 즉 스터워즈라고 불리었다) 이것이 현대화·현실화된 것을 MD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MD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의문을 표한다. 천문학적 비용에 비해 현실 적용의 가능성이 무척 낮다는 것. 다른 사람이 아니라 럼스펠드가 저런 주장을 했다니까 영 신뢰가 가지를 않는다. 네오콘 텍사스 카우보이들의 허세에 불과한 것일까?
1994년 6월 전쟁 위기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전쟁은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 대통령이나 군 수뇌부들의 판단에 의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안에서 우리 군과 우리 국민들은 그저 장기판의 졸처럼 취급될 뿐이다.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국이 가져가라고 해도 과거 선조 때처럼 '제발 좀 예전처럼 그냥 맡아주십시오'라고 구걸하는 우리 군이니 그런 취급을 받는 것도 별로 이상할 건 없다. 스스로를 책임질 능력도, 의지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무엇을 바랄 수 있을 것인가? 그저 모욕을 하면 모욕을 받고, 필요하면 구걸이라도 하면서 살아남는 수밖에는.
김종대 의원의 『위기의 장군들』을 읽다가 인상 깊은 부분이 있어서 메모를 하고 생각을 덧붙여 보았다. 가볍게 기분 전환 하려고 읽고 있는 책이다. 『서해전쟁』보다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인데 군 내부의 에피소드들이나 군인들 간의 권력 투쟁들이 담겨 있어서 흥미롭다. 한편으로는 이런 군대를 우리가 과연 믿을 수 있는지 하는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또 한 가지 인상이 깊었던 건 YS의 하나회 숙청 에피소드. YS가 이룬 몇 안 되는 업적 중 가장 높게 평가받을 만한 부분이다. 아마 DJ였다면 YS처럼 숙군 사업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단순무식한 YS의 성격이 숙군 사업을 성공할 수 있게 한 요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YS 덕에 한국군이 이 정도나마 문민 통제에 들어가게 된 것은 아닌지.
사족: 군사학에 관심이 더 깊어지다 보니 이제는 무기체계도 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월급 받으면 무기체계론 입문서를 하나 주문하려고 한다. 가끔 밀덕 친구들을 보면 일부 무기 신봉론자들이 더러 있기도 한데, 국방과 안보에 있어 무기 외에도 다양한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무기는 역시 국방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무선의 화약 개발과 그 아들 최해산의 화약 기술 개량이 없었다면 아마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전쟁에서 무기와 군사기술은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 좀 여유가 있을 때 입문이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족2: 군사학 공부가 최근에 여러 분야의 학문에 영향을 주고 있다. 예를 들어 국제정치 이론 중 스웰러의 이론을 공부하는데 2차 세계대전을 공부한 덕에 이해가 더 풍부해짐을 느낀다. 전략이나 전쟁사에 대한 이해가 역사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해주는 면도 있다. 심지어 어제 영화를 보는데도 전쟁사 지식이 유익하게 쓰이는 것 같더라고. 역시 공부해서 남 주는 게 아닌 것 같다. 배워두면 어딘가 쓸 데가 꼭 생기기 마련이다.
[참고서적]
김종대, 『위기의 장군들』, 메디치(2015)
[출처] 전쟁으로 가는 길: 1994년 6월|작성자 mor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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