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에 경제 수석을 지낸 오원철씨의 기록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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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에는 3,117대를 생산해서 큰 재미를 보면서 신진자동차(현 GM대우의 전신)는 커져나갔다.
그러나 우리나라 자동차업계에는 아무런 혜택도 주지 못하였다. 새나라자동차 방식, 즉 SKD상태로 자동차 뭉치를 수입해다 간단히 조립만 해서 파는 데만 정신을 쏟았기 때문이다. 숫자로 표시하면, 1966년 당시 국산화율, 즉 국산부품을 쓰는 비율은 고작 21%였다. 타이어, 배터리, 그리고 소소한 부품만 국산품을 썼다. 상공부로서는 이대로 방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67년에는 최소 32%만이라도 국산화하라고 지시를 내렸으나, 신진자동차(주)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겨우 23.6%만 국산화했다. 참고로 얘기하자면 이때 버스 조립공장의 국산화율은 64%나 되었다. 망치로 두드려 만드는 수공업적 조립공장에서조차 64%를 국산화하고 있는데, 단일 모델인 "코로나" 승용차를 만들면서 겨우 23.6%를 국산화했던 것이다. 1966년에 21%의 국산화를 해서 1년 사이에 겨우 2.6%의 국산화 진전이 있었으니 결국 국산화는 외면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1967년에는 4,983대나 생산해서 판매했다.
<도표 9-8>을 보면 신진자동차의 국산화 비율과 판매대수가 나오는데, 국산화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돈벌기에만 열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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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수지 맞는 사업이 있다면 다른 사람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나주비료공장에서 손을 뗀 호남지방의 유지 이문환(李文換)씨는 다음 사업으로 자동차공장 설립에 나섰던 것이다. 상공부로 홍재한씨를 매일 찾아와서 졸라댔는데 홍재한 씨는 자동차공업 일원화의 신봉자이니 상대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문환씨는 진정서를 내기 시작했다. 청와대, 감사원, 국회, 검찰 등 여기저기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진정서 공격을 했다. 아예 책자로 만들어서 뿌리기까지 했다. 이런 진정서를 받은 기관은 상공부에 해명을 요구하게 된다. "내용을 검토하고 보고바람"이라는 공문이 오게 되는 것이다. 홍재한씨는 이 일로 정상적인 사무를 보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이런 상태로 끌어오다가 홍재한씨가 상공부를 떠난(1965. 3) 후, 이문환씨는 1965년 7월에 아세아자동차를 설립하게 되었다. 아세아자동차의 가장 큰 강점은 "호남 푸대접론"이었다. 호남지방에도 고용을 증대시키기 위해 자동차공장을 세워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이론에 대해 동조하는 세력도 생겨났다. 신진자동차(주)에게도 큰 책임이 있었다. 국산화를 정부 지시대로 시행하지 않으니 상공부나 국내 부품업계에서 미움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힘만 믿고 SKD로만 도입했으니, 신진에 대한 특혜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이규동(李奎東) (당시) 과장의 회고를 들어본다. 신진자동차는 한사코 국산화를 하지 않으려 했다. "신진에서 자동차 부품 수입 신청서를 가져온다. 그 중에는 국산가능품도 많이 들어 있다. 이것을 삭제하려 들면 야단이 났다. 장관실에 막바로 압력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래도 김 장관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실무자가 알아서 잘 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李 과장의 입장은 난처해지기만 했다. 신진에서는 회장(국회의원)까지 와서 서류를 재촉했다. 그리고 서류의 결재가 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사장과 회장이 함께 장관실로 들어가서 재촉하기도 했다. 김창원 사장은 다혈질이라 곱지 않은 언사도 나온다. 한번은 청와대 비서실장실에서 있었던 회의중, 김 사장이 상공장관에게 "자동차의 자字도 모르면서……"라는 심한 말까지 했다. 동석하였던 박충훈(朴忠勳) 부총리가 보다 못해 "김 사장! 말을 삼가하시오. 일국의 장관에게 그런 말투가 어디 있소. 장관한테 사과하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니 신진은 상공부로서는 골칫거리였던 시절이다.
상공부로서는 신진으로 하여금 국산화율을 향상시키기란 아주 곤란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였다. 신진자동차는 국가이익을 도외시하고 자기 잇속만 챙기는 업체였던 것이다. 상공부의 자동차공업 일원화 방침은 당초 목적이 국내수요가 적으니 당분간 자동차 조립공장을 독점시키자는 것이었다. 수요를 한곳에 모아줌으로써 부품공업 육성에 이바지하려고 했는데, 그 결과 자동차시장 독점만 시켜주었을 뿐, 국내 부품공장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즉 독점의 가장 나쁜 면만 노출된 것이다. 이렇게 될 바에는 오히려 국산화를 많이 하는 업체에 더 많은 혜택이 가도록 경쟁시키는 쪽이 국산화 내지는 자동차공업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강력히 대두되었다.
결국 아세아자동차(주)에 명분을 주게 된 것이다. 아세아자동차에 대한 외자도입 인가가 1966년 12월 외자도입심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로써 자동차공업 일원화의 뚝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도표 9-9>에서 보면, 아세아자동차는 명목이나마 도장공장도 있고 엔진공장, 차량공장, 보디공장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아세아자동차는 출발부터 부실했다. 자동차 생산에 들어가기도 전에 부실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청와대의 부실기업정비반(반장 張德鎭)은 1969년 8월 아세아자동차를 정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동년 12월 경영권이 동국제강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주인이 바뀌고 나서야 아세아자동차에서는 첫 번째 제품인 피아트(Fiat) 124 승용차를 생산하게 되었다. 첫해인 1970년에 1,467대가 생산되었다. 국산화율은 30%였다. 아세아자동차 출현으로 우리나라의 자동차공업은 이원화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원화(二元化)로만 끝나지 않았다. 자동차공업 일원화의 둑이 무너지니 너도나도 자동차공업에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3번 타자가 현대자동차였다.
[...] 중략
이런 대우차의 버릇은 아카디아에까지 이어왔다는.
현대차가 3번째 출발한 메이커란건 처음 알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