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로버를 타고 스키 점프대를 내려온다. 반대로 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보닛을 훌쩍 삼키는 깊은 수로를 통과하고, 넘어질 듯 요동치는 좌우 요철을 거뜬히 통과한다.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 구간도 거침없다. 그리고 동일한 구간을 레인지로버도 달린다. 랜드로버에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전천후 SUV'의 진가는 랜드로버와 레인지로버 모두에 해당되는 말일 게다. 차이가 있다면 성격과 디자인, 그리고 이름뿐이다. 이들의 공통 DNA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지난 11월, 랜드로버가 2014년형 전 차종 글로벌 미디어 시승회를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었다. 2014년형 랜드로버와 레인지로버, 그리고 9단 자동변속기가 탑재된 이보크까지 모든 제품을 내놓고 2014년을 야심차게 시작하겠다는 의지였다. 곡선이 많은 산악도로와 정글 주행에 버금가는 오프로드, 눈 덮인 숲을 지나 등판력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스키 점프대에 이르는 이틀 간의 시승은 랜드로버의 모든 것을 체험하기에 충분했다. 최근 소비 트렌드에 맞춰 특정 브랜드라도 다양한 성격으로 세분화되는 때에 랜드로버의 외길 인생은 오히려 오프로드 마니아들의 시선을 끌었고, 랜드로버는 이들의 기대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래서 랜드로버에게 2014년은 희망적이다. 물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디스커버리와 레인지로버 하이브리드
스위스 취리히 공항 인근에서 시작된 시승회의 첫 차종은 최고 256마력, 60㎏.m의 토크를 발휘하는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3.0ℓ SDV6 디젤이다. 보닛 위 당당했던 '랜드로버(Landrever)' 대신 '디스커버리(Discovery)' 배지가 위용을 드러낸다. 그만큼 개별 제품 브랜딩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다. 물론 디젤 외에 가솔린도 구비했다. 다운사이징에 따라 5.0ℓ 가솔린은 최고 340마력 V6 3.0ℓ 슈퍼차저로 갈아탔다. 이전과 별 다른 외형 차이는 없지만 그릴과 앞 범퍼, 헤드램프의 LED 주간 주행등의 형상이 미세하게 변경됐다. 디스커버리의 주요 디자인이 '직선'이라는 점에서 주간주행등 역할의 LED도 직선이 돋보이도록 했다.
스위스와 프랑스, 독일 국경을 넘나들며 진행된 시승은 국도, 고속도로, 험로 등으로 짜임새 있게 꾸며졌다. 독일 아우토반을 달릴 때는 2,570㎏의 육중한 중량이 믿기지 않을 만큼 힘이 넘친다. 효율도 소폭 향상됐는데, 이전 대비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점도 한 몫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엔진 토크 영역이 넓다는 게 이유로 꼽힌다. 나아가 8단 변속기는 충격이 거의 없을 만큼 부드럽다. 가속페달에 힘을 주면 밟는 대로 원하는 만큼 힘이 바퀴에 전달된다. 적어도 성능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전천후 SUV의 장점은 다양한 주행 모드의 선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일반 포장도로를 선택하면 지상고가 낮아지며 무게가 아래로 집중되는 반면 험로에 맞추면 지상고가 높아지고 거친 도로 진입 준비를 마친다. 그래서 국도와 고속도로를 달릴 때는 노멀 모드로 놓고 편한 승차감을 만끽했다. 굳이 별 다른 전자제어 장치의 조작도 필요 없다. 변속레버를 주행(D)’에 맞추고 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인공 장애물이 설치된 험로. 등판능력과 내리막 속도를 스스로 제어하는 HDC를 경험했다. 그리고 보닛을 덮는 수로 코스가 마련돼 있지만 비슷한 장애물은 국내에서도 많이 등장해 식상했다. 게다가 장애물의 노면도 타이어 접지력을 고려한 재질이 활용돼 자연스러운 흥미로움은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실전을 대비한 연습에 불과했고, 시승차는 디스커버리에서 레인지로버 디젤 하이브리드로 바뀌었다. 디스커버리에 탑재된 동일한 디젤 엔진에 35㎾급 전기모터와 8단 자동변속기를 탑재한 레인지로버 하이브리드는 전기모터 덕분에 최대 출력도 340마력에 달하고, 토크 또한 70㎏.m로 월등하다. 하지만 유럽 기준 100㎞를 달릴 때 필요한 연료는 6.4ℓ에 불과하다(국내 기준 18.75㎞/ℓ). 전기모터가 없는 디스커버리의 11.5ℓ에 비하면 효율이 거의 두 배 가량 높은 셈이다.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당 169g으로 디스커버리의 269g 대비 100g이나 낮다(유럽 기준). 기존 레인지로버의 안락함, 실용성에 0→100㎞ 도달 시간이 7초 미만일 정도로 강력한 성능까지 갖추고 있다. 하이브리드의 최대 강점인 효율을 높이기 위해 무게도 2,450㎏에 묶었다.
고효율이 가능한 배경은 힘이 추가로 필요할 때 전기모터가 역할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이외 승차감이나 기타 편안함은 예외가 없다. 국내 시승 때도 느낀 것이지만 레인지로버의 강력한 성능은 하이브리드 전기모터를 탑재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하다. 여기에 단점으로 지적돼 왔던 효율을 개선한 것이니 반향은 뜨거울 것 같다. 동승한 재규어랜드로버코리아 관계자도 "고효율 디젤 하이브리드를 앞세워 실속 부유층을 겨냥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레인지로버 하이브리드의 포장도로 주행감은 고성능의 편안함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오프로드의 명성은 하이브리드라고 결코 예외가 아니다. 진흙과 물웅덩이, 좌우 요철 등이 마치 밀림처럼 조성된 코스에서의 체험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전천후 SUV의 핵심 기능인 '터레인 리스폰스(terrain response)'를 작동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프로드라고 운전자가 달리 할 것은 없다. 오로지 레버를 진흙 등의 험로에 맞출 뿐이고, 이외는 가속과 감속, 그리고 스티어링 휠만 움직이면 된다. 급하강 때 스스로 속도를 제어하는 HDC 기능도 활성화 시켰다.
자연 지형을 인공으로 조성한 것이지만 험로의 난이도를 평가하면 상중하 가운데 상급에 해당된다. 보닛을 훌쩍 넘기는 수로는 물론 가파른 진흙 언덕과 HDC 작동에 따른 내리막까지 정통 오프로더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런데 험한 코스를 디스커버리 뿐 아니라 레인지로버와 중형 SUV 이보크까지 거침없이 통과한다. 이른바 창업 이후 결코 놓지 않은 험로 DNA의 진가를 보는 것 같다.
▲2014년형 레인지로버 이보크
2014년형 레인지로버 가운데 이보크는 변화가 가장 큰 차종이다. 새롭게 설계된 9단 자동변속기가 채택됐기 때문이다. 최고 150마력의 2.2ℓ디젤 엔진과 240마력의 2.0ℓ 가솔린 엔진이 각각 탑재됐지만 시승차는 디젤로 준비됐다.
지난 3월 제네바 모터쇼에 첫 선을 보인 9단 자동변속기 ZF-9HP는 승용차로선 세계 최초로 이보크에 장착됐다. 2.2ℓ 엔진에 9단 변속기는 사치라는 주장도 있지만 랜드로버는 고효율 추구 차원에서 과감하게 9단 변속기를 채택했다. 랜드로버 차종 가운데 배기량이 가장 낮은 엔진에 9단 변속기를 적용해야 성능과 효율 향상 효과가 가장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속할 때 변속이 상당히 재빠르다. 또한 속도 영역이 세분화 된 만큼 변속 충격은 느끼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그만큼 주행 중 진동소음도 억제돼 있다. 부드러운 주행 감성을 위해 다단변속기를 넣었음에도 진동소음이 크다면 최초 적용 의미가 반감될 수 있음을 고려한 듯하다.
유럽의 구불구불한 좁은 포장도로를 주행할 때는 '액티브 드라이브라인(Active Driveline)' 시스템이 제 역할을 한다. 시속 35㎞ 이상의 안전 주행 때는 앞바퀴만 구동하지만 역동적 주행으로 바꾸면 재빨리 네바퀴 굴림으로 자동 전환한다. '전자 디퍼렌셜(e-Diff)'은 뒷바퀴 회전력을 분배해 안정성을 최적화 하고, 네바퀴 각각의 회전력을 조절해 코너링 중 언더 스티어를 억제한다. 하지만 운전자는 수시로 변하는 구동방식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모든 게 자동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느낄 수 있는 것은 코너링이 뛰어나고, 스티어링 휠에 반응하는 차체의 응답 속도가 빠르다는 것뿐이다.
이보크 9단 변속기 시승의 하이라이트는 스키 점프대 내리막 코스다. HDC를 시속 5㎞에 맞추고, 30도가 넘는 경사면으로 진입하되 브레이크 페달 조작은 일체 없다. 오로지 이보크 스스로 경사각을 읽고, 정해진 속도로 내려올 뿐이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이다. 때로는 내려오다 후진으로 다시 오르는 모습도 보였다. 디스커버리 또는 레인지로버 대비 이보크의 험로 기능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건 오산이다. 노면이 눈으로 뒤덮인 유럽의 깊은 숲 속에서도 이보크의 구동력은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며
사실 랜드로버에게 2013년은 즐거운 해다. 지난 9월까지 글로벌 시장에서 3만4,719대가 판매돼 지난해 대비 13% 증가했고, 한국도 질세라 11월까지 2,770대를 달성했다. 전년 대비 32.2% 늘어난 기록이다. 덕분에 생산이 공급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덕분에 한 때 정통 오프로더의 미래를 비관하던 사람들의 시선도 확연히 달라졌다. 그래서 이제는 랜드로버의 오프로드 DNA에 시비를 거는 사람을 찾기도 어렵다.
물론 랜드로버 2014년형은 어디까지나 미세한 변화일 수 있다. 그러나 해가 지날수록 진화하는 비포장도로와 포장도로 주행 능력의 동시 상승은 편안함을 원하는 수요층과 험로를 찾는 이들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낙관적이다. 스키 점프대를 오르내리며 극도의 흥분을 느끼고, 거친 험로를 지나며 전천후 SUV의 성격을 유감없이 체감했다면 포장도로는 편안함의 복귀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랜드로버가 자신들의 고유 DNA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용주 기자 soo4195@autotimes.co.kr
출처-오토타임즈
<본 기사의 저작권은 오토타임즈에 있으며,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현실은...ㅠㅠ.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