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자동차산업의 중심지 스투트가르트 인근에는 아담한 도시 뵈블링겐이 자리잡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진델핑겐 공장이 인접한 이 지역은 언뜻 한산한 중소도시로 보이지만 독일 내에서도 자동차와 IT산업이 발달한 첨단 공업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아우토반을 달려 고속도로 출구로 나와 10분 남짓 지나면 신식 건물들의 공사 현장이 보인다. 그 사이로 운동장을 연상케 하는 널찍한 공간에 한 눈에 봐도 역사가 깊어 보이는 낮고 기다란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이른 아침 숙소를 찾아 나선 길,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잘못 입력했는지 확인하게 된다. 정문에 도착해 간판을 확인하고서야 불안한 마음을 추스렸다. 이름부터 특이한 V8호텔이다.
다소 고색창연한(?) 외부와 달리 실내는 4성급 호텔에 걸맞게 꽤나 화려하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니 대형 바이크와 클래식카 한 대가 여행객을 맞이한다. 예약 확인을 하는 동안 차를 찬찬히 살펴봤다. 모터사이클 엔진에 바퀴는 세 개다. '모건 쓰리휠러'라는 이름의 이 차는 525㎏의 가벼운 차체에 최고 출력 100마력 이상의 성능으로 빠른 속도감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단순한 전시품이 아니라 실제로 타 볼수도 있고 구매까지 가능하다니 흥미롭다.
좁은 복도를 지나 배정된 방의 문을 열자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이 펼쳐진다. 널찍한 방 한켠에 차가 한 대 놓여있다. 1940년대 영국을 주름잡던 모리스 마이너다. 차체를 잘라 침대를 만들었다. 개인 차고지를 주제로 꾸민 방이란다. 낡은 벽면에는 오래된 용품 포스터가 붙어있어 진짜 차고지에 온 것 같다. 자동차 엔진과 드럼통은 탁자로 쓰인다. 업무용 책상은 실제 쓰이던 작업대를 가져다 놓은 느낌이다. 장식장에는 각종 자동차 부품과 미니어처 등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일행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래된 벤츠 한 대가 헤드램프를 켜고 세차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앞을 바라보니 먼저 세차장에 들어간 차의 꽁무니가 보인다. TV장식장을 자동세차기 입구와 클래식카 뒷부분으로 꾸민 발상이 놀랍다. 커다란 세차용 솔과 빨간 매트. 철제 테이블과 의자가 영락없이 실제 세차장과 똑같다.
자동차마니아라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기보다 방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만져보다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다. 녹물이 흐르는 벽면까지 표현한 세밀함에 집요함까지 느껴진다. 무심코 창문을 열었더니 생각지도 못한 장관이 펼쳐져있다. 클래식카의 대향연이다. 호텔과 같은 건물을 쓰는 전시관 겸 자동차 판매단지 '모터월드'의 전경이다. 박물관으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저 많은 클래식카는 모두 사고파는 상품이다.
널찍한 공항 건물에 각종 클래식카가 빼곡히 들어찼다. BMW, 포르쉐, 람보르기니, 롤스로이스도 보이지만 역시 벤츠가 압도적으로 많다. 벤츠의 역사상 길이 남을 걸윙도어 스포츠카 300SL의 동생뻘인 190SL이 눈에 들어왔다. 도색은 물론 실내, 동력계까지 복원을 완벽히 마친 차다. 1955년형의 가격이 14만9,500유로(한화 약 2억2,200만 원)다. 1966년에 판매됐던 벤츠 250 SE W111 카브리오는 9만4,900유로(약 1억4,100만 원)에 주인을 찾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이곳에는 필시 어떤 사연이 숨어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날 아침 킨들 브로드벡(Kindl Brodbeck) V8호텔 총괄 매니저를 만났다. 호텔의 역사부터 물었다.
"본격적인 호텔 영업은 2009년부터 시작했습니다. 건물의 전신은 공항이에요. 1915년 지어진 뵈블링겐 비행장 건물이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까지 비행선이 이착륙하던 곳입니다. 연합군이 점령한 이후 1992년에 이르러서야 반납됐고, 호텔이 들어서기 전까지 방치돼 있었습니다"
독일은 오래된 건물을 함부로 개조하거나 재개발할 수 없도록 법률로 정해져있다, 2만7,000㎡ 이상의 넓은 공간에 추가로 건물을 짓기 어렵다니 선뜻 개발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지역 특성을 살려 자동차에 특화된 공간으로 재구성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 지역은 물론 전세계에서도 명물이 된 V8 호텔의 시작이었다.
이름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는 게 브로드벡 매니저의 설명이다. 창업자가 자동차와 관련된 이름을 짓기 위해 고심하는 걸 보고 아내가 제안한 아이디어라고. V8 엔진의 강력한 성능처럼 호텔도 번창하라는 기원을 담았으리라.
앞서 말한 것처럼 V8 호텔은 기존 공항의 원형을 최대한 해치지 않으면서 지어졌다. 대지면적에 비해 객실수는 35개로 무척 적다. 이 중 25개가 자동차 주제로 꾸민 방이다. 우리가 묵었던 주차장이나 세차장은 물론 모터스포츠 시상대(포디엄), 자동차 극장, 오토 캠핑 등 주제만도 10여 개에 달한다. 각 방들은 테마에 맞춰 집요할 정도로 세밀하게 꾸며졌다. 객실수는 적지만 방 하나하나의 공간이 여유로운 점도 인상적이다.
벤츠 공장과 가까운 만큼 비즈니스 파트너십도 공고하다. 벤츠와 연계해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재작년 한국 기자들을 초청해 열린 A클래스 미디어 시승행사도 이곳에서 치러졌다. 무엇보다 벤츠를 출고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주말에 묶는 경우가 많다. 이들에겐 호텔에서 공장까지 택시 서비스를 제공한다. 물론 돌아올 땐 새 벤츠를 타고 나타날 것이다.
이밖에 어떤 손님들이 이 호텔을 찾을까. 전 세계의 자동차 마니아들이 성지순례하듯 찾아오는 곳일까? 매니저의 대답은 의외로 평범했다.
"주중에는 비즈니스 이용객이 대부분입니다. 주말에는 가족단위 방문객이 많이 찾죠. 객실을 흥미롭게 꾸몄지만 기본적으로 이 지역 비즈니스 호텔의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벤츠는 물론 자동차 및 IT업체들이 숙박 및 컨퍼런스 공간으로 우리 호텔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브랜드화 할 법도 한데 해외는 물론 다른 지역으로 진출할 계획이 전혀 없다는 전언이다. 총괄 매니저가 '한국에서 같은 아이템으로 사업을 해도 좋다'며 농담까지 할 정도다. 이유가 꽤나 마니아적이다.
"가장 중요한 건 각 지역 또는 국가별로 자동차를 즐기는 문화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V8 호텔의 컨셉트를 그대로 가져간다고 각자 다른 자동차 문화를 정확히 반영할지는 의문이네요. 중요한 건 자동차를 즐기는 사람들의 눈높이가 무척 높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수준의 퀄리티가 성공의 열쇠 아닐까요." V8 호텔에 걸맞는 자신감이다.
안효문 기자 yomun@autotimes.co.kr
출처-오토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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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건설사 배불리려고 용쓰고 있는데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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