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전히 한나라당의 정권탈환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이는 가운데 이회창씨의 출마가 약간의 흥미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많은 국민들은 정치에 조건반사적 혐오감을 그러내고 있군요. 여론조사의 응답률이 10%안밖에 머무는 것을 보면 정치혐오증은 제법 심각한 수준인 듯 합니다.
이러한 국민의 정치혐오는 누구에게 유리할지 생각해 볼까요? 당연히 한나라당에 유리할 겁니다. 고정적인 지지층을 가졌으며, 그 지지층의 투표율이 매우 높습니다. 지금 여론조사에서 적극적으로 의사를 밝힌 사람들의 대부분이 한나라당이나 한나라당 출신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여론조사는 또 다음의 여론조사에 영향을 미칩니다. 지지율이 높게 나온 후보를 지지하는 대세추종형 유권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여론조사가 지속적으로 비슷한 추세를 보이면 투표장에서의 투표도 그렇게 나올 것입니다. 여론조사가 역으로 여론을 형성하고 그 것이 투표까지 지배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여론조사의 병폐만으로 지금의 판세가 형성된 것은 아닙니다. 여러가지 다른 요소들이 작용하고 있겠죠. 여러가지 요소중에 특별히 관심이 가는 몇가지 구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주 간명하게 국민의 뇌리에 박혀서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언론들의 적극적인 부각노력이 더하여 위력은 배가됩니다. 종종 잘 조직된 구전홍보단의 활약도 의심할만한 일이니다. 종종 택시를 타면 거의 똑같은 어조로 열심히 주장하는 기사들을 보게 됩니다. 어떤 구호들인지 살펴봅시다.
첫째, 가장 강력한 구호는 '무능한 정권'입니다. 구체적인 사실관계의 이해는 없어도 그냥 무능하다고 뭉뚱거려서 비난할 수 있습니다. 꽤나 널리 퍼져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부패가 무능보다 낫다'는 구호로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수 많은 비리의혹이 제기되어도 끄떡하지 않는 지지율이 바로 이러한 구호가 먹히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둘째, 막연한 적개심을 유행시킵니다. 정권이 출범한 지 불과 얼마안된 시점에서는 정권을 비판할만한 소재가 빈곤하였습니다. 그 때 술자리에서 슬그머니 '노시개'라는 건배구호가 유행하였습니다. 차마 풀어서 쓰기 민망한 내용입니다만 현정권을 비난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보았습니다. 정권초기 기득권층의 불안감을 타고 여기저기서 그러한 저질구호가 난무하였습니다.
셋째, '경제파탄론' 입니다. 지난 정권이 외환위기를 극복하는데 조급한 나머지 무리한 정책을 구사하였던 것이 부동산 문제와 카드대란입니다. 부동산에 대한 규제정책을 모두 풀어버린 탓에 현정권이 부동산 시장에 효과적인 대응을 하기는 어려웠고, 카드대란으로 금융기관들의 부실이 심각하였습니다. 거기에 수구언론들의 연일 이어지는 경제위기론과 파탄론은 실제로 경제를 더욱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경제는 심리적인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기에 효과는 상상한 것보다 컸습니다.
넷째, '대북 퍼주기' 논란입니다. 연일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을 지속하면서 실제로 현정권의 대북정책이 문제가 있는 것처럼 인식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사실 김영삼 정권이 했던 퍼주기에 비해서 별로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규모가 커진 것은 있지만 과거와 달리 일방적인 퍼주기가 아니라 차관이나 지하자원을 대가로 받는 것도 상당히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지난 10년간의 대북지원이 없었다면 북핵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처럼 호도하고 있습니다.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북한은 우리의 지원이 없었어도 핵개발을 했을 것입니다.
다섯째, '한미동맹의 균열'에 대한 것입니다. 항상 한미관계를 수직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상호 동등한 관계로의 지향조차 한미동맹의 균열이라며 자뭇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 하였습니다. 사실상 한미관계는 그리 악화된 것이 없으며, 여전히 우리의 미국에 대한 의존도와 미국눈치보기는 오히려 보기 싫을 정도입니다. 미국의 침략전쟁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내고 지금까지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나빠진 것은 아무리 봐도 없습니다.
여섯째, '좌측 깜박이를 켜고 우회전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 정권은 아예 좌측 깜박이를 켠 일조차 없습니다. 처음부터 우측깜박이를 켜고 열심히 우회전하였습니다. 정치적 프로파겐다로 복지를 말하거나 종종 양극화같은 화두를 부각시킨 일은 있으나 사실상 시작부터 우측으로 통행한 정권입니다. 고건씨가 총리였으며, 이헌재씨가 경제수장이었습니다.
일곱째, 위의 모든 것을 압축한 '무능한 좌파정권'이라는 용어입니다. 온건한 좌파가 웃다가 배꼽빠질 일입니다. 이 정권이 좌파라면 전세계에 좌파아닌 정권이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미국의 공화당 네오콘도 좌파정권일 것입니다. 좌파가 신자유주의를 신봉하고, 자유무역협정에 그렇게 적극적일 수는 없습니다. 정권이 유능했는지 무능했는지를 논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종 우측으로 달려간 정권을 무능한 좌파라고 규정한 것은 매우 교활한 술책입니다.
아뭏튼 정권을 탈환하기 위하여 고안된 압축적인 구호들은 섬짓할 정도로 국민의 마음에 다가서 있습니다. 전혀 사실관계와 부합하지 않아도 별로 이의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금의 대선구도는 이러한 구호들의 성공을 토대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현정권의 주요 인물들도 역으로 그러한 구호에 항복하고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선거를 위하여 효과적은 구호들을 만들고 그 것으로 득표하는 것을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그러한 것들이 누군가의 의도에 의하여 악의적으로 만들어져 조직적으로 유포된 것이라면 그 악의는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또 사실을 부각시켜서 그 것으로 국민이 판단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할 일입니다. 문제는 사실이 아닌 것도 다수가 주장하면 사실처럼 왜곡되어 버린다는 문제입니다.
지금 곳곳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구호들이 오금저릴 정도로 무서운 것은 바로 사실관계와 괴리가 크기 때문입니다. 교활한 선거전략으로 왜곡된 정보가 구호로 만들어지고 유포되는 현상은 확실히 대의 민주주의의 위기입니다. 국민의 여론을 겸허히 받아서 정치를 해야 옳은데, 정치권이 하향식으로 엉터리 여론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반민주적인 것입니다. 여기에 수구언론들의 역할을 실로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지금 수구세력의 손에 의하여 무력화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 부화뇌동하고 있는 국민의 저렴한 정치의식도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제 정권은 다시 기득권층이 만들고 나누어 가질 것입니다. 부패가 깨끗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근거없는 적개심은 안됩니다. 대세가 경제파탄을 말하면 진짜 파탄이 옵니다. 평화는 억만금을 주고도 살 가치가 있습니다. 우파정권의 실패는 오히려 좌파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동맹은 맹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에 좌파정권은 역사상 한번도 없었습니다. 교묘한 구호에 속아서는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