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인민혁명당
펌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50745
40여년전 인혁당 가입 당원의 양심선언
- 최종편집 2010.07.01 00:27:03
- 류근일 의 다른 기사 보기
2~3년 전 쯤 되었을까? 명지대학교 부설 연구소의 강규형, 이지수 교수가 연락을 해왔다.
박정희 시대 학생운동에 대해 세미나 주제 발표를 하라는 것이었다. 쾌히 수락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좀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페이퍼에 쓴대로 발표를 하자 그 다음 순서가 이어졌다.
박범진 전(前)의원의 ‘그 당시 체험’ 증언이었다. 페이퍼는 없는, 즉석 증언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멋는 듯한 놀라움이 가슴을 때렸다.
“1차 인혁당 사건은 실체가 있는 사건이었다,”
“북악산에 둘이서 올라가 입당 선서를 했다...”
명지대학교가 돈이 달려서였는지, 그것이 책으로 출판되는 데는 2~3년이 걸렸다.
어제(6/29) 아침 조선일보 1면에 그 날의 그의 고백이 활자화 됐다.
5인의 세포조직원(세포란 말은 나의 말이다) 중 하나와 함께 산에 올랐다고 한다. 그
리고 선서를 하고, 인혁당 강령이 적힌 특수 용지 문건을 보고,,,
나는 박범진 의원하고 평생을 사귀었다. 나보다 4년 후배 대학 동문이다. 양심을 속이지 못하는 열정의 사나이다. 그는 그로 인해 평생 지울 수 없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고 한다.
조선일보 기자로서 그 사건 때문에 4개 월을 출근하지 못했으면서도 당시 편집국장이던 선우휘 선생에게
“조작입니이다”라고 거짓말을 한 것을 그렇게 아파했다고, 한 사람은 전한다.
그의 발언을 두고 일부는 ‘물증 있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심선언은 물증 없어도 할 수 있다.
이 일이 아니더라도,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는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민주화 운동과,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운동이
만나고 섞이는 과정을 겪었다. 거기서 정신적 휴전선을 아차 하는 순간 넘었던 사람들이 꽤 있다.
오늘의 우리 사회의 혼란은 바로 그런 ‘휴전선 넘은 사람’들이 일으키고 있는 풍랑이다.
박범진 의원은 그 풍랑에 대해 “이건 안 된다‘라고 외쳤다.
그의 용기 있는 양심선언에 뭉클 하는 감동과 충격을 느낀다.
보도자료 및 기사제보 press@newdaily.co.kr
전"인혁당" 안병직 교수의 고백.
"박정희정권의 간첩수사는 진실"
좌익(진보)진영은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다.
월간조선(김정우기자)은
"통혁당"과 "인혁당"에 대한 안병직 교수의 주장을 보도했다.
“통혁당 관련자"들은 남한에선 처벌 됐지만,
북한에서는 영웅이 됐다.
김일성(金日成)은
사형당한 이문규와 통혁당 총책 김종태(金鍾泰)에게
영웅 칭호를 ‘하사’했고,
김종태의 이름을 딴 공장, 거리, 대학이 생겼다”고
보도한 월간조선은
“박정희 때에 수사기관의 발표는 사실”이라는
안병직 교수의 주장을 소개 했다.
통혁당의 ‘간첩’들은
"이재정"이라는 종북좌익분자가 총장으로 있는
"성공회대학"에 교수로 많이 재직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월간조선은
“김종태, 김질락(金瓆洛), 이문규 등과 함께
사형 선고 를 받았던 통혁당 간부 신영복(申榮福)은
1988년 8ㆍ15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해
이듬해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명숙(韓明淑) 前 총리의
남편 박성준(朴聖焌.前 성공회대 겸임교수)은
1967년 6월 신영복(申榮福)에게 포섭돼
통혁당 소조책(小組責)으로 활동하며 신영복 의 지도를 받았다”며
2006년 부인 한명숙이 총리에 지명되자
박성준은 “통혁당" 사건의 일부는 사실이나,
나는 통혁당과 관련이 없고,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라고 주장 했고,
신영복도 통혁당에서 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솔직하게 밝히지 않았다. 는 "안병직 교수"의 주장을 전했다.
2011년 1월 1일, 중앙일보는
“책은 먼 곳에서 찾아온 벗입니다”란 제목으로
신영복 교수의 새해 특별기고를 게재 하면서
신영복 교수에 대해 “그는 통혁당에 가입한 적이 없었으나,
‘통혁당 지도간부’로 "기소"됐다고 한다”라고 설명 했고,
같은 달 15일 신영복 교수를 직접 인터뷰한 객원기자인
영화배우 이혜영(李慧英)씨가
“통일혁명당 사건이 뭐냐”고 질문을 던지자
“제가 구속된 1968년은 김신조 사건이 나고,
미(美) 정보함 푸에블로호(號)가 북한에 나포되고,
예비군 동원법이 만들어지고, 3선개헌이 추진되고,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치열하게 벌어지던 해 예요.
이런 시기에 "간첩단 사건"이 터졌는데,
거기에 "청년학생운동"이 동일 사건으로 엮인 거죠.
그 접점에 제가 있었고요”라는
신영복의 대답을 월간조선은 보도했다.
안병직(安秉直) 서울대 명예교수(시대정신 이사장)는
이날 기사를 읽은 후
자신의 비공개 증언록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고
월간조선은 전했다.
2010년 9월 3일 명지대 정기학술포럼에서
비(非)보도를 전제로 발표한 내용으로,
그가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던
1960~70년대 좌익(左翼)운동의 실체와 실상을
"소상하게 밝힌 자료"라고 한다.
강연 직후 월간조선은
안 교수 측에 수차례 증언록 공개를 요청했지만,
안 교수 측은
“친구, 선후배, 제자 등이 거론돼 곤란하다”며 고사했는데,
그의 증언은
지난 5월 말 출간된
‘보수가 이끌다-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란 책에
수록됐다고 월간조선은 전했다.
안병직 교수는 좌익세력을 밝히는 데에
다음과 같이 조심 스러워 했다 한다.
월간조선은
“안 교수는 박정희 정권 시대의 ‘민주화 운동’을
‘야당을 중심으로 한 자생조직(인혁당) 등 민주화 운동’과
"좌익사회주의 운동을 중심으로 한
통혁당 등의 민주화 운동 으로 구분 하며 .
좌익세력은 표면적으론 민주화를 내걸었지만,
핵심사상은 북한과 같은 인민민주주의나 신민주주의였다.
당시 사회주의 운동은
‘민주화’란 명분을 내걸고 운동했지만,
그 사상과 내용은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고 보도했다.
좌익의 계보를
"좌익이었던 안병직 교수"가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다.
안 교수는
인혁당 (인민혁명당) 사건,
통혁당 사건, 제2차 인혁당 사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
김정강(金正剛) 그룹 등 5대(大) 좌익운동 사건에 대해
듣고 경험했던 일들을
김수행(金秀行現성공회대석좌교수), 신영복, 박성준 등
관련자의 실명과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해 가며 공개했다.고
월간조선은 보도했다.
안 교수는
당시 수사기관에 발각돼 조사. 발표된 보도내용 들은
기본적으로 대개 사실이다.
한 다섯 번 정도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으며
얻어맞기도 하고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수사기관이 가능하면 법적 테두리를 지키려고
애쓰는 것으로 느껴졌다. 는 증언을 했다고
월간조선은 전했다.
안 교수의 증언을
글로 정리한 강규형(姜圭炯) 명지대 교수는
강연 내용을 그대로 기록한 증언록 원본엔
훨씬 충격적이고 깊은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일부 관련 인사의 이름을 익명 처리하는 등 상당히 조절을 했음에도,
사실 그대로의 경험을 공개해 그 파장이 컸다.고
설명했다고 월간조선은 전했다.
실제로 안병직 교수의
남한 좌익 세력이나 인사에 대한 고백은
"거짓말로써 간첩이 국가유공자가 되는
지난 좌익정권의 역사조작"에
하나의 쐐기를 박는 역할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조사는 거의 진실"
이라는 주장은
좌익들에게는 폭탄선언 이었다.
안 교수는 1962년 서울대 대학원 재학 시절,
빨치산 출신으로
소설가 조정래(趙廷來)의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빨치산 전사 ‘조원제’의 실제 모델로서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박현채(朴玄埰.前 조선대 교수)를
처음 만났다고 고백했다.
당시 안병직은 박현채의 가르침을 받고 사회주의자가 되어,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毛澤東)을 탐독했고,
한용운과 신채호 사상을 배웠고,
박현채는 안병직을 인혁당에 끌어들이려 했다고 한다.
안병직은 인혁당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인혁당이 발각될 무렵
후보위원쯤 될 정도로 개입했다"고 했다.
안병직의 솔직한 좌익전력 고백이다.
안병직 교수는
인혁당의 2인자인
정도영(鄭道永.前 합동통신 조사부장)씨와도 가깝게 지냈는데,
사건 이후 10년 이상 지속한 두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인혁당의 실체"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됐다고 월간조선은 전했다.
2005년 12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위원장 오충일"은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부장 김형욱)가
한일 국교정상화 추진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북한의 지령을 받는 인혁당을 만들어
학생운동과 연계 됐다고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 했지만,
"오충일"은
과거사를 날조한 자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패당의
역사와 진실 조작은 강력 하고도 치밀했다.
2007년 10월 공개된 과거사위의 최종 보고서도
“대통령이나 중앙정보부장의 발표에서 규정된
인혁당이나 민청학련의 성격은 그대로 수사지침이 되어
짜맞추기가 진행돼 이들 단체를 무리하게
반국가단체로 만들어간 것”이라고 규정 했지만,
사실은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새빨간 거짓말을 조작한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좌익정권의 "과거사 위원회"는
대부분 역사를 날조하는 ‘거짓말 생산 공장’으로 보면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온갖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했다.
김대중-노무현 좌익정권 하에서
‘과거사 진상 규명위원회’는
‘과거사 진상 조작 위원회’ 였다고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2010년 6월
박범진(朴範珍) 전 의원의 증언으로
“인혁당은 짜맞추기”란 과거사위의 조사결과에 대한
논란이 재점화 됐다고 월간조선은 평가 했다.
1963년 봄 "인혁당"에 입당해 활동했던
"박범진 전 의원"은
제1차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 아닌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실존했던 지하당(地下黨)이다.
정부 당국이 물증을 확보하지 못하는 등
객관화 하는데 실패해서 조작사건처럼 계속 논란이 됐다. 며
과거사위의 조사발표를 정면으로 뒤집었다고
월간조선은 전했다.
과거 군사정권은 정직 했는데,
김대중-노무현 좌익정권 하에서
역사조작이 만연 했다는 주장이다.
자생적 조직인 인혁당과 달리
통혁당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결성된 혁명조직이었다고 한다.
안 교수는 신영복, 박성준, 김수행 등
통혁당 주요 관련자와의 일화를 자세하게 설명 했는데,
신영복이 박성준(한명숙의남편)을 통해
‘경제복지회’란 기독교 학생단체를 지도했고,
신영복은 통혁당의 2인자인 김질락의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1968년 초여름, 서울대 상과대학 조교였던 김수행이
안병직에게 자신의 연구실에 가득한 북한 서적을 보여줬는데,
모두 신영복 쪽에서 받은 책들이었다고 한다.
안병직은 며칠 후 신영복을 찾아가
상과대학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으니
선배인 우리가 수습하자.고 했지만
신영복은. 왜 그러한 일을 자기와 상의하느냐.며
항의 했다고 한다.
몇 달 후 통혁당 사건이 터지자,
제일 먼저 헐레벌떡 달려온 박성준(한명숙의남편)에게
안병직은 자수를 하든지 종적을 끊고
최소한 10년 이상 지방도시에 가서 숨어 지내라.
도망갈 땐 모든 연락망을 완전히 단절해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안병직, 신영복, 박성준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수사기관에 검거됐다고 한다.
안 교수의 증언록은 통혁당 역공작 검거작전에 대해
김질락과 이문규를 통해 얻은 정보를 토대로
그들의 협조를 받으면서
우리 수사기관이 역공작으로 공작선을 유인해
제주도 서귀포에서 일망타진했다”고
간략히 정리했지만,
실제 증언에선 자세한 정황을 설명했다고 한다.
간첩이 간첩을 잡히게 만드는 사례다.
다음은 안 교수의 증언록에 수록되지 않은
비공개 원문 중 일부는
이문규는 북한과 숫자 하나를 더 넣고 뺌에 따라서
의미가 전혀 거꾸로 읽히도록 서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난수표를 조직해서 넘겼는데,
그걸 믿을 리 없는 중정이 (이미 전향한) 김질락에게
보여주고 고백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김질락이 난수표를 보고 숫자가 하나 빠졌다면서
보충해 버렸어요. 그렇게 북한에 타전을 하니,
북쪽에서 1968년 8월 20일 무장간첩선을 제주도로 파견해
이쪽 멤버들을 다 싣고 올라가려다 일망타진 됐습니다. 라는
내용이 있다고 월간조선은 전했다.
안병직 교수는
1974년 제2차 인혁당 사건(인혁당 재건위)때
중앙정보부는
유신반대 투쟁을 벌였던 민청학련과
그 배후 세력인 인혁당재건위를 수사 하여
두 조직 관련자 1024명을 검거 조사해
수십 명에 대해 사형,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했다.며
"1976년 2월에 결성된 남민전"은
처음부터 북한과의 연합전선 구축을 시도한 단체.였는데
중심인물인 이재문(李在汶)과 신향식(申香植)은
각자 인혁당과 통혁당 관련자였다고 한다.
안 교수는
“통혁당, 청와대 습격, 울진 삼척 무장공비 등
연속된 무장투쟁 실패에
북한은
남민전의 애걸에 가까운 충성맹세와
연합전선 구축 제의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 때문에
"남민전은 심각한 자금난"을 극복하기 위해
"강도행각"을 벌인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고
월간조선은 전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에 구성돼 ‘좌파의 범죄경력 세탁소’로 비판받은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민주화보상위)는
2006년 “남민전의 총기 취득과 강도행위&39;는
유신 탄압에 대한 항거. 라며
관련자 38명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명예회복’시켜 줬다.고
월간조선은 지적했다.
다른 사건의 주인공인 김정강은
1980년경 전향 하여
월간조선 1994년 9월호 인터뷰에서
“20년간 사회주의 실험 후 마르크스주의의 인간관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교훈을 깨달았다.
사회주의를 버리니
인생이 그렇게 풍요롭게 보일 수가 없었다”고
증언했다고 월간조선이 전했다.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가 쓴
‘박정희’에 따르면,
김강정은 1964년 초
한국 최초의 대학 내(內) 자생(自生) 친북조직인
‘불꽃회’를 만들 당시를
세상을 마르크스 이론에 맞춰
도식화하는 데만 골몰한 나머지
현실감을 잃었던 시절이다.
그래도 박 정권 때 법치주의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나의 법정투쟁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회고 했다고
월간조선은 전했다.
박정희가 무지막지한 독재자가 전혀 아니라
법에 따른 통치를 했다는 "좌익골수분자"의 평가였다.
지난 6월 5일 안병직 교수를
월간조선의 김정우 기자가 서울대병원에서 만났는데,
안병직 교수는 ‘이수병 평전’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안병직 교수는
“현재 ‘진보진영’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들은 보수진영이 정권을 잡으면
무조건 민주주의가 아니라며
‘민주 대 반민주’ 구도로 몰고 간다.
진보진영은 스스로 민주주의 모델이 없다는 것을
통렬히 반성해야 한다. 는 주장을 했다고
월간조선은 전했다.
종북좌익진영에 무슨 민주나 자유의 모델이 있는가?
안병직 교수는
민주화 운동에 의해서
한국 민주화가 실현됐다고 보는 것은 잘못됐다.
한국 민주주의의 기반은 이미 제헌헌법에 기록돼 있다.
경제발전 덕분에 두꺼운 중산층이 형성됐고,
이들의 요구로 대통령 직선제 등이 실현된 것이다.
책 제목 그대로 한국 민주주의는 보수가 이끌어왔고
지금도 이끌고 있다.고 말 하면서
해방 직후 혁신계열이 남한에 많았다.
인혁당을 순수하게 보면 그들의 사상을 물려받아
남한에 발생한 자생적 공산주의자들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남한에서 민주화는 좌익세력의 전유물일 것이다.
안병직 교수는
"김정강 평전에 대해" 내가 읽어본 것 중엔 거짓이 없었다.
그는 1980년 사상 전향한 후
그의 평생 이력을 정리하기 위해 증언했다.며
4ㆍ19가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6ㆍ25전쟁 이후 상대적으로 취약한 남한이
국가로서 존립하기 위해선 반공과 한미동맹이 필수였고,
반공권위주의가 지배할 수밖에 없었다.며
한국에선 사회의 질적 변화를 한꺼번에 가져온
정치.경제적 사건이 없었다.며
한국에서 혁명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박사의 건국이
이미 대한민국에 완전한 혁명이었음을
안병직 교수는 시사한 것이다.
건국 때 이미 선진국의 제도를 다 들여왔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변칙적으로 권위주의를 활용했을 뿐이다”라고 주장한
안병직 교수는 혁명이란 게 반드시 있어야 하나.
한국인은 ‘혁명’이라 하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는데,
프랑스 등 많은 나라가
혁명이라 하면 무책임한 극단주의자를 떠올릴 정도로
그렇게 좋아하지만은 않는다.
혁명이 반드시 발전을 불러오진 않는다.
오히려 진화.개선하고, 조금 과격하면 개혁 정도가 더 발전한다.
혁명은 기존 질서를 완전히 파괴한다.며 혁명에 부정적이었다.
경제적 종속과 착취로 미래가 없다던 나라가
산업화에 성공한 역사적 경험을 우리는 갖고 있다.
과거 반체제운동가들은
대한민국은 희망이 없다.
정치ㆍ경제적으로 끌어 엎어야 한다.
그러면 통일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한국을 희망 없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나.라고 말한
안병직 교수는
과거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 모두의 사상적 전환은 할 수도 없고,
필요도 없다.며
과거 인식에서 틀렸던 부분을 솔직히 인정하고,
우리 현실에 맞는 새로운 이념을 창출하자는 의미다.
즉 반성할 것을 반성하자는 뜻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안병직 교수는
사람이 사상을 바꾸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자신을 만드는,
피눈물 나고 기나긴 고통이 필요하다.
그러한 아픔 없이 말로만 변했다고 하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
온몸으로 변해야 하고, 엄청난 고통을 감수 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고통을 감수하기 쉽겠나.라며
그들은 이념으로 축적된 여러 형태의 ‘자산’이 있다.
바꾸면 포기해야 한다.
형제 같던 사람이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하고,
가졌던 사회적 권위도 잃어버린다.
모든 사회적 관계도 포기해야 하는데, 그 부담이 크다.
말은 쉽지만, 굉장히 어렵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안병직 교수는
지난 정권 여러 "과거사위원회와보상위원회"에서
실체가 분명한 사건을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라며
조작으로 판단 내리려 했다.는 질문에...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 검증 하는 데
당사자의 진술에 의해서만 판단해선 안 된다.
과거사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기록을 면밀하게 검토하면 사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란 주장은
한국 좌익운동이 과거부터 해온 입에 발린 소리다.라고
일축하면서
2차 인혁당을 주제로한
이수병의 평전이 상당 부분 사실이라고 평했다
[펌=올인코리아]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