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전문, 보성전문, 이화여전을 대표하는 유억겸, 백낙준, 김성수, 김활란 등은 서대문구 천연동 소재 김활란의 친구집에 모여 미국을 맞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여기에 김활란과 같이 컬럼비아 대학 교육학 박사를 거친 오천석이 참석했다.
"학제는 어떻게 할까요? 내 생각으로는 6·3·3·4제가 좋을 듯한데 …"
"예,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6·3·3·4제를 새로 실시하고 있는데 인기가 높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같이 가난한 형편에서는 중등교육과정이 6년이나 5년이 되면 학부모들의 부담이 커서 중도에 학업을 중단하는 일도 많으니까…"
김성수의 제안에 오천석은 이렇게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지금의 교육제도인 6·3·3·4제가 해방 후 처음 모인 이들 천연동 그룹에 의해 이미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었다.
한국교육위원회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하게 되는 이들이 이미 미군 진주 이전부터 모임을 갖고 한국 교육체제 전반에 대해 의견을 나누게 된 것은 교육배경이나 학문, 사회적인 영향력에 비춰 미군정과 스스로 상당한 관계가 맺어질 것을 확신한데서 나온 행동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은 친일 경력 등으로 떳떳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교육계를 이끄는 대표자 그룹이었으며 미군 교육담당관 락카드 대위를 만난 이후부터는 우리 교육계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세가 되었다.
이 당시 교육 단체는 유억겸, 김성수 등 11명이 참여한 한국교육위원회를 비롯해 오천석 등 60여명이 참여한 조선교육심의회와 이병도 윤일선 등 20여명이 참여한 조선학술원 등이 있었지만, 특히 한국교육위원회는 각 도의 학무국장 이하 읍 면의 교장인사까지 도맡아 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렇다면 미군정 3년간 한국교육계를 좌우했던 이들의 출신 성향이나 배경은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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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육위원들의 성향을 분석하려는 경향은 미군정을 재해석하려는 의식이 확산되면서 시작됐다. 그간 학계에서 나온 논문을 토대로 이들의 성향을 분석해보면 몇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유억겸, 김활란, 안재홍, 송석하, 장면 등 미군정 초기 교육 활동에 참여한 인사는 대부분 양반이나 관료, 중산층 이상의 계급에 속한 보수적 인사가 많았다.
또 이들의 학력은 미국이나 일본, 중국, 영국 등지에서 고등교육을 마친 고학력자가 대부분으로 특히 미국의 컬럼비아대학과 일본의 도쿄대학 및 와세다대학, 그리고 한국의 경성제대 졸업생 출신들이 인맥을 형성했으며 안재홍, 김활란, 정인보, 조병옥 등 기독교계 인사가 많았다.
이들은 특히 김성수, 유억겸, 김준연, 백남훈 등 한민당과 관련을 맺은 인사가 30여명, 흥사단에 관여한 인사가 30여명, 이와 유사한 우익계열의 족청 인사도 10여명에 달했다.
이밖에도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일제 시대 교직에 몸담으면서 친일 또는 부일 행각을 벌였다는 점 등을 주요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중산층 이상이라는 계급성과 친일, 한민당과의 관계 등은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것임을 짐작하게 된다.
사실 일제의 특성으로 볼 때 중산층 이상의 여유 있는 생활을 유지하려면 독립투사나 그 후원자로 계속 남아있기는 어려운 세상이었으며, 반대쪽에 더 가까운 인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로부터 미움을 샀던 중산층들은 대개 몰락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친일 인사가 적지 않았다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는 그들의 배경과 그리 무관할 수 없었다.
한민당이라는 것도 그렇다. 김성수, 유억겸, 안호상, 백낙준, 현상윤, 장지영 등 교육 위원 다수가 한민당에 관여했으며, 흥사단에 복수로 소속된 인사가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민당은 어떤 정당이었던가? 이승만을 대표로 하는 한민당은 친일인사들까지 모인 보수 우익 정당으로 그들이 어떤 역할을 해 나갔는지는 이미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참여 인사들의 이같은 색깔들이 교육을 주도해 나감으로써 미군정 초기부터 중앙집권적, 하향적, 보수주의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같이 경향이 뒷날 민족교육의 실패와 분단 고착화로 나타났으며, 민족 다수가 염원하던 친일 청산과 역사적 심판은 요원한 메아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처럼 나라를 잃고 살아남고 또 다시 강대국에 점령당한 민족으로서 올바른 민족적 자각보다 더 중요한 교육이 어디 있었을까? 그리고 이 당시 민족교육으로서 가장 시급한 실천적 과제의 하나는 분단 고착화를 막는 것이 아니었던가?
친일 청산과 역사적 심판 역시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친일 청산 없는 민족교육이 있을 수 있을까? 일본어 중심에서 한글교육으로 전환했다지만 이것만으로 마치 민족교육을 수행한 것으로 이해된다면 이는 헛 구호요 기만일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군정 3년이 지난 뒤 구성됐던 [반민특위]마저 경찰에 의한 백주의 태러로 무산되면서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심판은 이 땅에서 요원하게 되었다.
물론 이 같은 잘못을 교육계 인사들만의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이해가 당시 미국이 원했던 점령정책과 일치했기 때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미군정의 교육정책이나 이념의 큰 틀은 소련과의 대치상황을 고려해 그들의 이익이나 이해를 최우선으로 반영시키면서 교육계에 반공·보수·우익의 논리를 강요했던 것이다.
특히 미군정은 해방 후 한국사회가 일제 황민화 정책에 의해 교육계를 이끌 인재가 부족하다고 판단, 사회의 중요정책 중 하나인 교육정책도 한국사회에 대한 올바른 파악없이 수립, 실행함으로써 일본식 교육방법과 미국식 교육제도를 접목하는 기형을 낳게 되었다.
결국 미군정은 참여 인사 중 이해관계가 맞는 일부 교육 관료들과 중요한 일들을 처리함으로써 해방 후 당면 과제인 분단과 교육자 부일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으며 우리나라 교육에 있어서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