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을 목격. 보도한 세계 각국의 평가
당시의 5.18을 목격한 세계의 외신들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5월18일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시위와 이에 대한 포악한 군사적 대응은 광주에서 거의 2백명의 생명을 앗아갔고 사실상의 봉기를 야기했다"
-1980년 5월 대한민국 인권상황에 대한 美정부 보고서
"한국 남부의 대도시 광주에서 19일 오전 일어난 반정부 가두 데모는 학생외 시민도 가담하여 약 1만 5천명으로 불어나고 완전무장한 군대와 격력하게 충돌하였다......(중략)......병사들은 총검을 휘두르며 데모대를 진압, 학생들을 차례로 연행했다."
- 도쿄신문 1980년 5월 20일 <광주의 데모 폭동화, 군이 총검으로 진압>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한 20년전 4. 19혁명 이래 그 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정부, 군당국과 학생,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는 한국의 광주에는 22일 공수부대와 수도경비 사령부의 병력이 시 주변에 배치되어 총공격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며, 시내에 진을 치고 있는 학생, 시민의 데모대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 아사히신문, 1980년 5월 23일 <광주사태 긴장계속, 군은 시주변 완전포위>
"광주항거 4일째인 수요일, 최소한 24명이 사망하고 시민은 야만군대와 경찰을 추방하고 통제권을 장악했다. 수요일에 시작된 학생시위에 대하여 전두환이 지휘하는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구타, 연행, 결딴냈으며 이로 인하여 항거는 도시 전체로 확산, 한국전쟁 이래 가장 거대한 봉기로 인하여 공수부대 출신이며 박정희의 맹신자인 전두환의 장래에 불안이 확대.."
- 뉴욕타임즈, 1980년 5월 23일 <광주시민들, 군대와 경찰을 추방>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다. 한국 군부의 야수적 잔인성은 라오스, 캄보디아를 능가한다."
- AFP통신, 1980년 5월 24일 <민주주의란 대의에 움직이는 광주>
"일반 시민들은 데모대에 동조하고 있으며 18일의 평화적 시위에 대한 공수부대의 야수적 만행을 규탄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검에 찔리고 구타당했으며, 수요일에는 군대의 발포로 최소한 11명 사망, 여기의 상황은 한국의 타 지역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 뉴욕타임즈, 1980년 5월 25일 <고립된 광주에서의 참상>
"민중은 결코 잊지 않으며 광주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민중의 불만은 총으로 억압되어지지 않으며 20년 전으로 후퇴시키려는 전두환 일당의 음모는 실패할 것이다."
- 뉴스위크, ?년 6월 13일
"광주 투쟁은 약탈과 난동이 아니며 시민들은 민주실현이라는 대의로 움직였다. 독일의 '슈피겔' 지는 적어도 3백 명 사망, 2~3천 명 부상이라는 사실을 보도하면서 전두환을 가리켜 월남전쟁의 야만인 한국의 독재자라고 했다."
- AFP
"5·18은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민주화운동의 본보기" "모든 이들이 자유평화·민주주의를 위해 숨진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 당시 독일 제1국영방송 ARD의 일본특파원,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첫째 5월18일 이전까지 학생시위는 평화적이었다......(중략)......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살상과 가혹행위가 저질러졌기 때문에 시민들은 극도로 동요하고 있었다......(중략)......발포는 5월 21일이 아니라 5월 20일 오후부터 빈번하게 일어났다. 나는 5월 21일 아침 도청에서 두 구역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나는 총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시민대원들은 5월 21일 오후 1시 30분 경에는 총으로 무장하고 있지 않았다......(중략)......데이브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떠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지만 밝힐 수 없는 어떤 사실에 대해 불길한 어조로 말했다. 후에 나는 그로부터 한국 공군이 광주에 폭탄을 떨어뜨릴 계획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미군측은 분명 한국군이 그 계획을 변경하도록 압력을 가했던 것 같다......(중략)......군사정부가 너무나 거짓말을 잘 퍼뜨려 놓은 탓인지 우리 얘기를 믿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중략)......그는 항쟁기간에 광주에 있었던 군인 친구 얘기에 따르면 당국에서 사망자 수를 8백 32명으로 확인했다고 한다. 희생자의 수가 8백 32명이건 혹은 2백명 이하건, 아니면 2천명 이상이건 간에 5 · 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잔혹행위를 영구화하는 데 관여한 모든 사람들의 삶에 수치를 남기는 사건이 되고 있다. 또한 광주 민주화운동은 희생된 모든 사람들의 삶에 씻을 수 없는 비극적 상징물이 돼 있다. 비록 10년이 지났지만 광주 민주화운동은 군사 독재시대와 종말을 고하는 종소리요, 자유의 불길로 타올라 민주의 시대를 연 기념비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 75년부터 81년까지 광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5.18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한 미국인 아놀드 피터슨 목사.
나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모두 들었다. 너무 슬퍼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기록했다. 한국언론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 필름에 기록된 모든 것은 내 눈앞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 피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2003년 5월18일 KBS 일요스페셜 '푸른 눈의 목격자' 중 위르겐 힌츠페터의 증언.
"그 잔혹한 광주는 나를 정치적으로 성숙시켰다. 한국에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희생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서구사람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던 자유, 그러나 이를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신문과방송> 2004년 1월호 중,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광주에서 군사정권의 총칼앞에 이름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숭고함과 순수함을 상징하는 흰꽃을 준비했습니다."
- 광주를 방문한 ARD방송의 전 일본특파원 유르겐 힌츠페터
나는 70년대부터 일본에서 김대중·김지하씨 구명운동을 하며 한국 민주화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내 전공이 소련사였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는 한국과 친하지 않았다. 1년간 소련 생활 후 79년 10월23일 일본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대중씨 등이 정치활동을 재개한 것에 대해 무척 기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듬해 5월17일 전두환의 쿠데타가 일어나 계엄령이 선포됐다. 광주 소식을 들은 것은 5월20일이었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쿠데타군에 저항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큰 충격을 받았다. 오에 겐자부로 등 일본 내 동지들과 함께 지식인 15명이 쿠데타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5월27일 자유 광주는 무참하게 진압당했다. 5월 광주를 지켜본 소감을 자유 광주라는 주제로 세카이(世界) 7월호에 썼다. 그걸 계기로 한국 관련 논문을 쓰기 시작했으며 나의 연구는 한국 현대사로 본격 전환됐다. 5월 광주는 내 공부의 물줄기를 바꿨다.
- 일본 사학자 와다 하루키
"미국은 최종적으로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을 종합하기에 이르렀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특전사부대의 과잉반응이 비극의 기본원인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에서 발생한 제반사건에 대한 미정부의 성명
작년 5.18기념일 때, 한나라당은 5.18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하여 한나라당 홈페이지에 들려보니 다행히도 '군부의 폭압과 부당한 권력에 항거해 피로써 민주주의를 지켜낸 날' 등으로 평가하고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