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영남비(平嶺南碑)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4년) 3월에 일어났다. 이 난으로 영남은 반역향으로 낙인찍히고 이 지역인들의 출사가 좌절되었다.
이인좌 난의 원인은 1717년의 정유독대에서부터 비롯된다. 조선의 19대 왕인 숙종은 희빈 장씨의 아들 세자 균(경종)이 병약한 점을 이유로 왕위가 불안해질 것을 염려하여 노론 당수 이익명과 독대하여 연잉군(영조)으로 하여금 경종의 대를 이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숙종이 죽고 나서 노론측은 그의 명을 받들어 연잉군을 세자에 책봉한다. 그리고 경종이 죽자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영조였다.
조선의 20대 임금 영종과 21대 영조때에는 서인에서 분당한 노론과 소론의 정쟁이 치열하였다. 특히 경종 때는 경종을 지지한 소론과 연잉군(영조)을 지지한 노론의 다툼이 격렬해 왕세자인 연잉군에게 정권을 넘기려던 노론 사대신이 사형당하는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어쨌든 경종이 갑작스레 죽고 영종이 왕위에 오르자 소론은 정치적 기반을 위협받게 되었다. 때문에 박필현, 이유익, 심유현 등의 과격 소론 세력은 숙종대의 갑술환국(인현왕후 민씨의 복위문제로 남인이 축출당하고 서인이 집권한 사건)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 세력을 포섭하여 영조와 노론측 대신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에 독살의혹이 있다는 것과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이를 명분으로 영조를 폐하고 소현세자(인조의 맏아들)의 증손인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여 모반을 도모한다.
그러나 이 모반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영조가 탕평책으로 소론에 대해 정치적 보복을 하려는 노론측 인사를 파면시킨 사건)으로 소론 정권이 들어서면서 약화되었다. 동조자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급기야 최규서에 의해 모반계획이 고변되기에 이르렀다. 또 김중만 등은 역모 세력들의 취군 동태를 파악해 고발하기도 했다. 모반계획이 발설되었음을 안 반역세력은 먼저 선수를 쳤다. 이인좌는 반역의 중심인물이었다.
이인좌의 패배와 차별의 시작
1728년 3월15일, 이인좌는 스스로를 대원수로 자칭하고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성에 진입해 충청병사 이봉상, 군관 홍림, 영장 남연년 등을 살해하고 청주성을 점령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호남과 영남의 일부지역에서도 호응하였다.
호남에서는 태인 현감 박필현이 유배중인 박필몽 등과 연결해 전라감사를 연결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이인좌의 동생 이응보와 함께 안음과 거창을 점령했고, 이어 정희량의 인척인 조성좌와 함께 합천과 함양을 점령해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북상하던 주력 이인좌군이 안성과 죽산에서 도순무사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게 대패하고 청주성의 신천영은 창의사 박민응 등에 의해 청주성에서 밀려나 상당성에서 패하였다. 결국 반란을 주도했던 이인좌를 비롯해 권서봉, 목함경 등이 생포되면서 이인좌 난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에 분개한 영조는 대구 입구에 ‘영남을 평정한 비"란 뜻의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워 이 사건을 영남지역의 반란으로 규정지었다. 나아가 영남을 반역향으로 지목해 일체의 과거 응시를 중지시키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
영조 10년 이조판서 송인명은 “영남 사람은 비록 추천되더라도 낙점을 받지 못하는 자가 많습니다"라고 해 영남차별에 문제가 있음을 제기했다. 또한 영조13년에 좌의정 김재로는 “조정에서 영남인에 대한 대우를 다른 도와 다르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지역차별은 정쟁대립서 비롯
이처럼 이인좌의 난 이후 영남인은 철저한 차별을 받았다. 그러나 이인좌가 영남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지역(영남)차별"에는 처음부터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이인좌는 영의정을 지낸바 있는 준경의 후손으로 청주 송면 출신이다. 그리고 그가 난을 일으킨 지역도 충청도 청주였다. 영남의 여러 현들은 청주에서 비롯된 반란에 호응한 동조지역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영조는 이인좌난을 영남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단정지었다.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바로 이 지역이 남인지역이기 때문이다. 이인좌의 당색이 소론 강경파이긴 하지만 그는 남인 강경파인 윤휴의 손자사위이기도 했다.
영조는 영남 각 지방에서 일어난 호응도 이곳이 남인 고장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난 이후 남인의 등용은 제한되었고, 비록 이 난과 직접 관련이 없다 해도 영남인은 출사나 진급에 제한을 받았다. 영조 13년 병조판서 민응수가 좌의정 김재로와의 대담에서 “영남의 풍속이 벌써 한층 변하였습니다. 옛날의 경우는 모두 남인이었는데, 지금은 그중에 더러 갈리어 나가 다른 자가 있습니다"라고 말해 영조 정권이 남인을 적으로 보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결국 영조간에는 영남인들의 출사가 막혔으며 조선후기의 지역차별은 영남에 행하여졌다.
계속 과메기까세요
과메기가 뭡니까?
신라시대전 이들이 몽골에서 중국변방 노예로 여기저기 팔려 다닐때 부터
남 시기하고 질투하는'DNA'가 박혔었음,, 그리고 한반도로 이주
또 임진왜란때 7년동안 약15만 왜구들에게 무참히 집단 살인,강간,(경상도지역)도 당하였고
전쟁 끝난후 먹을것도 없고 나중에 호남,충청 지방사람들이 쌀 가져다줬고
또 경상민들 데려와 노비로 쓰고 그랬음 또 호남,충청 사람들이 경상 지방가서 터줏대감 노릇도 하였고(쌀부자)
아 귀찮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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