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는 글을 보다가~
이승만(李承晩[1], 1875년 4월 18일 ~ 1965년 7월 19일)은 독립운동가이자, 조선과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의 계몽사상가, 언론인, 정치인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통령,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전주.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수감 시절 기독교로 개종하고(어린시절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개종 전까지 불교였다),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사면된 후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실패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 당시 이승만은 대한제국 정부나 황제의 대리인이 아니라 일진회의 대리인이라고 자칭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국제 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 한 것을 계기로,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되었다.[3]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4] 이후 1933년 11월에 다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고 1934년 4월 2일에는 임정 외교위원에 선임되었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1945년 12월부터 김구·조소앙·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반공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지지, 추진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대통령 임기중 의무교육으로 문맹율을 획기적으로 낮추었고, 농지개혁을 통해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으로 전환시켜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6.25전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침공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적화통일을 막아냈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이후 대한민국 번영의 발판을 마련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 따른 대통령직선제 발췌개헌과 1954년 대통령 연임제한 폐지와 국가주의경제조항을 시장경제조항으로 바꾸는 사사오입 개헌 등 민주적 절차를 흠결한 두 차례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을 3회 역임하였다. 1960년에 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에 의해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장례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장으로 집행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사망 후 다음과 같은 평을 받았다.
하와이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91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민중당 대변인 김영삼은 '적잖은 정치적 과오가 있으나 평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바쳐왔으며,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 국민과 더불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애도성명서를 발표하였다.[20] 작가 최인호는 그의 연재소설 《가족》에서 이승만의 죽음에 대해 '독재자다운 비참한 말로'라고 비평하였다.
다음은 카더라~
독립협회 활동과 수감, 미국 활동 등으로 아내와 친밀감을 가질 사이가 없었던 그는, 첫 아들인 이태산(이봉수)이 사망하면서 아내 박씨와 이혼하게 된다. 박씨부인과 이혼 후 오랫동안 혼자 살았으며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1930년 미국 워싱턴에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인 임영신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31년 이승만은 자신의 측근이며 임영신의 기전학교 은사인 이순길을 통해 임영신에게 청혼할 뜻을 밝혔으나 거절당하였다. 아내가 될 것인가 동지로 남을 것인가를 고민하던 임영신은 단독으로 이승만을 만나 거절하였다.[251]
"아마 이 밤이 박사님을 뵈옵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는 그날까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생각입니다...(이하 생략)...저는 이미 독립운동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선생님 곁을 떠나서나, 선생님 곁에 있을 때나 언제든지 동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251]"
이승만은 실망하였으나 임영신을 측근으로서 신뢰하였고, 임영신은 그의 가깝고 충실한 측근이 되었으며 자신의 호를 이승만의 이름에서 따 승당(承堂)이라 짓기도 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은 홀로 귀국했다. 33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이 박사는 돈암장에 거주했다. 이때 윤치영의 부인 이은혜와 대한여자국민당의 당수였던 임영신 등이 돈암장을 자주 드나들며 그를 도왔다.[252] 당시 이 박사는 71세, 임씨는 47세였는데, 두 사람이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이 소문은 이 박사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미국 캘리포니아대에 유학 중이던 임씨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확대 재생산됐다.[252] 남편에게서 한국에 들어오라는 전갈이 있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프란체스카 도너에게 먼저 날아든 소식은 이 박사와 임씨의 관계에 대한 낯 뜨거운 소문이었다. 소식을 접한 그는 대로(大怒)했고 한국행을 서둘렀다. 귀국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남편과 임씨를 떼놓은 것이었다.[252] 이승만이 돈암장에서 이주한 후 마포장에 머무를 무렵, 김구 외에 임영신과 윤치영만이 마포장을 통제받지 않고 출입하였다. 이때 이승만이 임영신과 동침한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프란체스카 도너는 임영신을 마포장에 출입금지 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 투쟁에 몸 받쳤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가 제 3공화국을 열어준 시발점 인데..
박정희 대통령은 만군에서 몸 받쳤다..
빨갱이 남로당과도 연을 맺었다.
시사게 키워및 벌레들이 유난히 빨아대는 두대통령은 사실 극과 극이다~
공통점이라고는 젊은 여자
시사게 키워및 벌레들 기준이 뭔지~ㅉㅉㅉ
쫑미니 영감이 키워야? 벌레야?
왜 그러셔~^^:
저거보고 졸 빡쳐서 이불킥 해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처럼 북한놈들도 땡삼이 개대징 노구리 욕은 안한다는것이 아이러니해 ㅋㅋ
제네야 너처럼 북한 놈들도 밥은 처 먹는단다~ 아이러니 하지??^^:
니가 키워냐? 일베충이냐?
중요한것은 키워나 일베충이 빨아대는 대통령의 기준이 뭐냐는 거다~
제~~~~~에발~ 게시글 내용 파악 좀 하자~ ^^:
댓글 수정은 니가 존경하는 중고차 딜러한테 배웠냐? ㅉㅉㅉ
모질한 넘~ 쪽팔린 줄은 아나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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