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핵 억제력을 갖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핵무기를 가짐으로써 미국에 의해 침공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핵을 통해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을 할 수 있는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북한이 재래식 무기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자신을 지키는 가장 값싼 안보로 핵을 선택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핵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북한의 체제를 인정받으려는 전략이기도 한데 미국이 충분히 외교로 풀 수 있는 사안이었음에도 하지 못한 미국 외교의 실패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북한은 핵무기가 없으면 미국이 침공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라크와 리비아가 핵을 포기한 직후 미국이 침공한 걸 보고 굳게 확신했을 겁니다. 그래서 북한은 미국 본토까지 도달할 수 있는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과 거기에 장착할 핵탄두 소형화에 집착하고 있는 겁니다. 미국이 침공하면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는 겁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게 된 시기와 이유에 대해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미국이 6.25전쟁에서 신속한 승리를 위해 핵무기 사용을 거론한 이래 김일성은 핵무기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 1950년대 말, 평양 북쪽 영변에 핵 연구단지가 조성되었고, 1980년대 말까지 5메가와트급 원자로가 전면 가동되었다고 합니다.
북한이 처음으로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의혹을 받은 것이 1993년인데 그때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 시설을 공격할 전쟁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 전쟁이 일어날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직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가 대통령 특사로 북한을 방문하여 전쟁위기를 협상으로 전환시켰습니다. 그때 미국 국방부장관마저도 1시간만 늦었어도 전쟁이 났을 거라고 말할 정도의 위기였다고 합니다.
지미 카터가 평양을 방문할 때 남북정상회담을 약속했는데 김일성이 다음 해 사망하면서 정상회담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1994년 10월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 합의를 하게 됐는데 북한은 핵을 개발하지 않기로 하고, 대가로 북한에게 중유 50만 톤을 주기로 했으며,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가 북한 신포에 경수로를 지어주기로 합의했습니다. 2002년, 핵 전문가인 데이비드 올브라이트는 제네바 합의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동결시키지 않았더라면 북한은 2000년까지 60~80개의 핵무기를 만들기에 충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후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고부터 북한을 이른바 ‘악의 축’으로 지칭하면서 이란, 이라크와 함께 북한을 3대 테러국으로 지정하고, 경수로 지원을 중단하면서 제네바 합의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전 8년 동안 미국은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 어떠한 발표도 하지 않았고, 세계 메이저 언론 어디에서도 북한의 핵문제에 관한 기사를 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이 핵개발을 하고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고 이후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말았습니다. 2003년 당시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회의로 6자회담이 만들어졌는데 우리나라는 이 회담을 통해 핵문제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2005년 2월 북한이 핵보유선언을 하면서 6자회담을 중단하고 미국에게 북한을 적대시하는 정책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면서 전쟁위기까지 고조되었습니다. 그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 의장을 미국에 급히 보내 전쟁 위기를 진정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한에 200만 킬로와트의 전기를 제공하기로 하고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그 후 2005년 북한과 미국은 회담을 통해 9.19 공동성명에 합의했습니다. 주요내용을 보면,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 포기, 빠른 시일 내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와 국제원자력협정(IAEA) 안전 조치로 복귀하기로 했고, 미국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두지 않으며 북한을 공격, 침략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고 북한의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사용하는 권리를 존중하며 적당한 시점에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논의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공동성명 발표 다음 날 미국은 북한이 마카오에 있는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서 위조달러 지폐를 유통시키고 마약 등 불법 국제거래 대금을 세탁하여 자금조달과 유통을 해왔다고 발표하고 북한 계좌 2,500만 달러를 묶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마카오 정부 의뢰로 국제적인 회계회사인 언스트앤영이 수개월간 감사를 하고 작성한 보고서에는 미국 측 주장을 입증할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한 성명 합의 3일 후 미국이 기자회견을 통해 경수로 지원 약속을 사실상 파기하면서, 북한 대표단은 빈정이 상해 북한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미국도 협상파와 강경파가 있다고 합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 라이스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인 크리스토퍼 힐은 협상파였고, 부통령이던 딕 체니와 국방장관이었던 럼스펠드는 강경파였다고 합니다. 힐 차관보는 강경파들이 9.19 공동성명을 깨버린 거라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이후 북한은 2006년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에 사정거리 6,000킬로미터에 달하는 미사일을 발사했는데 미국 전문가들이 알래스카와 미국 본토에 대한 타격 잠재력을 가진 것으로 믿고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이었고 이때 처음으로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계(MD)가 가동 준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