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요 10조는 누군가가 정치적 목적으로 조작했다...
'차현이남(車峴以南)과 공주강외(公州江外)는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였으니 인심도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에 있는 주나 군의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고 왕후·국척과 혼인하여 권력에 결탁하게 되면 국가에 변란을 초래하거나 통합당한 원망을 품고 임금이 거동하는 길을 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며 (중략) 비록 선량한 백성일지라도 마땅히 벼슬자리에 두어 권력의 길에 들지 말게 하라 ' - 훈요10조
고려 태조 왕건은 서기 943년, 눈을 감기 직전 가까운 신하였던 박술희를 불러 훈요십조를 전하면서 그 8조에서 "내가 죽은 후, 차현이남 과 금강 외의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려사 태조 26년 4월 조).
위 글에 따르면 정말 전라도 사람들은 고려시대 때부터 이어진 개호로 종자들의 온상이 아닐 수 없다. 근데 뭔가 좀 이상하다.
태조왕건의 가까운 신하라는 박술희는 충남태생으로 후백제 인사인 차현이남 사람이다.
차현이남 사람을 불러 차현이남 인재를 쓰지 말라고 적게 한다?
왠지 시작부터 무언가가 어긋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그들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분석해보자.
1. 태조는 물론 그 이후에도 오히려 전라도 인사를 많이 기용, 중용했다.
태조의 왕후인 장화왕후 오씨는 전라남도 나주 사람으로 2대왕 혜종을 낳았다. 그리고 동산원부인 박씨는 전라남도 순천 사람이고, 고려의 개국1등 공신인 신숭겸은 전라남도 곡성 사람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왕건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중신 최지몽도 전라남도 영암 출신이었고, 동산 원부인 박씨의 아버지인 박영규는 전라남도 순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견훤의 사위이기까지 했다. 전라북도 전주 사람인 유방헌은 4대 광종부터 8대 헌종까지 제왕들을 보필한 충신이며, 풍수도참의 시조로 꼽히는 도선을 비롯하여 형미, 윤다, 경보, 경유등의 전라도 출신 승려들은 고려왕조에서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왕건 이후에도 이처럼 호남 출신의 중신들이 적지 않았고, 11세기 초 현종이 여요전쟁으로 피난갔을 때, 몸을 피해 거처했던 곳도 전라도 나주였다. 즉, 왕건도 마찬가지였지만 왕건 이후에도 왕들은 전라도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역사서를 통해 알 수 있다.
2. 해석부터가 글러먹었다.
태조 왕건은 고려를 세운 뒤에 건국에 반대했던 지역과 반란을 일으킨 지역들을 따로 색출해 철저히 차별하려 했다. 당시 가장 왕건을 괴롭혔던 세력은 후백제의 근거지였던, 백제유민이 살던 지역이었다. 지금의 충청도, 전라도다. 그래서 백제 유민에 대한 감정이 특히 좋지 못했다.
이건 당연한 결과다. 조선이 고려를 멸했을 때 고려인들은 어떠했는지를 보면 된다.
또 태조의 고려인들에 대한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보면 된다.
차현이남과 공주강외는 현대말로 바꾼다 치면, 보통 차령이남과 공주강외로 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공주강외의 외(外)를 바깥이라는 뜻 말고도 위(上)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봐야한다. 만약 차령이남과 공주강위라 해석한다면 그 지역의 범위가 홍성, 보령, 부여, 공주, 연기, 청주 일대로 제한되는데 이 지역이 상당히 의미 있는 지역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위에서 언급한 충청일대의 소규모지방에선 두 차례의 모반사건이 있었는데 하나는 환선길,이흔암의 모반사건이다. 왕건이 고려를 개국한 지 5일 만에 논공행상에 불만이 있던 공주 출신의 환선길과 이흔암이 모반을 일으킨 것이다. 물론 이 두 사람은 정식적으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더군다나 공주지방은 궁예 추종세력들의 입김이 강한 지역이라서 모반사건이 실패로 끝난 뒤 2개월 만에, 공주, 홍성 등 10개 주, 현이 후백제로 투항하는 일이 발생한다.
두 번째는 청주에서의 반란이다. 청주 지역의 호족세력은 대부분이 몰락한 신라 진골귀족 계열이었다. 이들은 마찬가지로 신라에 적대적이었던 궁예와 협력하여 그의 강력한 지지기반이 되어주었는데, 청주 인근 지역이 잇따라 후백제에 투항하자 청주지역의 민심도 크게 동요하였다. 왕건의 도읍지인 철원에선 청주인 임춘길이 모반을 일으켰고, 청주 호족세력인 진선이 동생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왕건이 송악으로 천도한 이유도 이와 같은 연이은 반란사건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사건들을 보아할 때 공주강외라는 단어를 위(上)로 해석하는 게 실로 바람직한 것이라는 건 생각 있는 독자들이라면 쉽게 수긍할 것이다. 거기다 청주 사람 현율을 왕건이 관직에 임명하려하자 개국공신들의 반대로 본래 임명하려던 관직보다 낮은 계열의 관직을 임명한 것을 보면 모반지역 사람의 관직임명에 제한을 둔 것을 찾아볼 수 있고, 이는 왕건이 훈요10조에서 말했던 점과 일맥상통한다.
위 두 가지 역사적 사실들을 보면 차현이남과 공주강외라는 단어는 차령이남과 공주강위라고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더 올바른 일이며 역사적 사건도 이와 같은 해석에서 유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호남지방 사람들은 훈요10조를 통한 그들의 절라디언 공세에서 아무런 하등의 연관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신라흉노의 후예로서 친일빨갱이 반인반수 닭군의 노예로서 벌이는 조작선동을 보아하니 그들의 혀를 뽑아 발설지옥에서 좋은 비료로나 쓰게 하는 것이 실로 타당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것이 위든 밖이든 변하는 것은 없다. 왕건과 왕건 이후 왕들은 전라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전라도 인사들을 신용해 중용했으며 왕후까지 배출할 정도로 어느 지역보다 신뢰를 주었음에 틀림없다.
오히려 경상도지역을 조심하라는 경고일 수가 있다.
풍수지리설로 보면 금강(공주강)이남은 개성에 배산역수지역이 아니다.
오히려 개성의 배산역수지역은 낙동강과 태백산맥 지역으로 지금의 경상도지역이므로, 이를 통해 상도인들을 조심하라는 왕건의 지시라는 가능성이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 http://www.ilbe.com/703124485
일베충의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냥 좌빨이 주장하는 게 다 그렇지 뭐~라며 반박은커녕 우좀식 논리의 무지함의 논리를 편다는 데 있다.
? 실제로 빨갱상도에 서식하는 일베충 댓글처럼 공주강 바깥으로 기술된 자료가 존재하는 데 그게 바로 동국통감이다. 근데 문제가 있다면 멍청브러더스 샤른호스트와 말빠이트 같은 종일세력들이 사용한 자료는 어디까지나 '국역본' 동국통감이다.
동국통감의 원본에서 해당 자료가 기술된 부분을 살펴보면 이 부분 또한 공주강외라고 분명히 나와 있으며, 이는 본문의 내용과 동일하게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동국통감뿐이 아니라 고려사 태조 26년(943) 계묘년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統合之怨, 犯?生亂. 且其曾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 或附王侯宮院, 姦巧言語, 弄權亂政, 以致災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신하 : "이것이 지난 목천지방(충남 천안)에서 일어났던 반란자들의 명단입니다."
당시 왕건은 백제 유민들이 백제 부활을 꾀했다는 이유로 크게 화가 난 상태였다.
왕건 : "어디 보자. 주제에 성을 가진 넘들이 많구나. 이넘들 성 씨를 앞으로 이렇게 고치도록 하라. 우(于)는 우(牛 소), 상(尙)은 (象 코끼리), 돈(頓)은 돈(豚 돼지), 장(張)은 장(獐 노루)로 하라.
자, 결론이 나온다. 왕건은 자신이 힘겹게 이뤄낸 왕조를 다시 백제인들에게 빼앗기기 싫었을 뿐인 것이다. 경상도인들의 논리대로라면 신라는 고구려 백제의 철천지 원수다.
만약 신라가 최초외세를 끌어들여 고구려 백제의 뒷통수만 가격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삼국통일은 고구려 백제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하게 되어 반쪽짜리 삼국통일이 아닌 완전한 통일체를 이뤄냈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오랑캐까지 끌어들여 괘씸한 짓을 한 신라 지금의 경상도지역의 반역을 상당히 경계하며 감시했을 것이다. 왕건처럼 훈요10조로 신라의 부흥을 꾀하는 무리들을 조심하라는 문서를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고 말이다.
일베충들이 사회악이라고는 하지만 초기 MB산하 일베들은 충 소리까지는 듣지 않았다. 왜냐면 엘리트출신들이 꽤 있었으니까.. 스스로 통제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닭양의 경상도 노예들이 그들과 섞이면서 수준이 하향평준화되며 일베충화되었다.
그런 지금의 일베충들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1차 자료를 해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근데 그치들이 뭐 1차 자료니 2차 자료니 구분할 수 있을까도 의문스럽지만..ㅋㅋ
걍 빨갱상도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한 마리의 빨갱상디언으로서 살다가 언젠가 아! 내가 이래서 과메기 소리를 들었던거구나!! 라고 느낄 때가 오지 않을까!!..ㅎㅎ
닭군에서 시작한 지역감정의 시작은 쥐군 닭양을 거쳐 더욱더 치졸해지고 얍삽해졌다.
닭군에게 선동세뇌 된 개돼지들같은 일부 극우세력들은 밥상머리에서 되물림을 하고 있다. 자기 아들 딸 손자 손녀들에게.... 하지만 촛불혁명 이후로 경상도 출신 대통령들의 비루함과 적폐짓으로 그들에게 표를 퍼주던 할매 할아방들은 소위 젊은 층에서 조롱하는 틀딱이 되고 말았다. 그 틀딱들의 선동세뇌 깊이는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이 안 되기에 자식이나 손자 손녀들은 조부들과 또는 부모들과 왕래 자체를 끊어버리는 일도 경상도 지역 젊은이들에게서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다고 뉴스에서 접하게 된다.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이제 종일우빨 우딱이들에게 선동당하는 사람들은 그냥 특정지역의 골수분자들 10% 이외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그 10%로도 얼마든지 나라를 이분질 삼분질 십분질 할 수 있는 인원이다.
그만큼 경상도의 개체수가 많기 때문이다.
왕건의 훈요십조!! 이는 경상도인을 지칭할 수가 있다.
경상도인은 경상도인을 지칭하지 않는 다는 걸 근거를 대며 반박해야지 무리하게 전라도가 맞다는 논리를 전개한다면 오히려 왕건의 경계대상은 바로 경상도인이라는 사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 짝을 이룬 아름다운 두 마리의 충 영남조선인들이 어떻게 발광하는 지 한번 보겠다.,
마지막으로 다시 상황을 정리해보면 왕건은 백제 부흥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후손들에게 남긴 말이고, 본인 스스로도 특별히 차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전라도 인사를 중용했다.
또 후손들은 그런 일 없을 거라고 무시했던 것이다.
그럼 이 훈요10조를 들어 헛소리를 시작한 작자가 누구일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박정희다.
친일빨갱이였던 박정희의 지역감정 조장은 그야말로 악랄했다고 한다.
전라도사람들이 경상도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는 말부터 온갖 이간질로 반드시 본인이 경상도 사람으로서 대통령이 되어야 김대중으로부터 경상도가 살아난다나 어쩐대나...
어찌 보면 경상도인들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있을 때는 그런 가치 없는 놈한테 거짓선동당하고, 그놈이 죽은 후에는 또 그 딸 닭양에게 뒷통수 쳐맞아 전국왕따존 되고....
그리고 아직도 정신 못차린 틀딱이들은 반인반수를 반인반신으로 떠받드는 모습을 보니 북한인민들을 보는 느낌이랄까..
뭐 여하튼 그 친일빨갱이 닭군 하나가 대한민국 영호남을 갈라놓았으니 그 웃기지도 않은 무기가 바로 훈요십조였던 것이다.
중요한건 왕건의 의도와 관계없이 왕건을 그릇 작은 왕으로 만들어버린 닭군에게 큰 잘못이 있다. 더군다나 왕건 훈요10조를 들먹일 거면 지역감정을 조장할 때 전라충청을 함께했어야 맞다. 그런데도 전라도만 들먹인 거 보면 닭군의 정치적 의도가 뚜렷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조선시대 세종까지 작은 그릇으로 만들어버린다. 살펴보겠다.
1440년 (세종 22)년의 일이다. 세종은 전주판관 이호신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세종 : "전라도는 풍수지리적으로 지형이 나빠 민심이 흉흉하다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때릴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이호신 : "전하,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생업을 잃었는데.. 성 쌓기 작업이 끊이지 않아 백성들이 모두 지쳤습니다."
세종 : "네 말도 옳기는 하나 지금 성을 쌓는 것은 모두 다 왜적을 막고자 함이니 이걸 중단할 수도 없음이다."
이게 지역차별인가? ㅋㅋ 전라도 신하와 임금의 전형적인 국사얘기 아닌가요?^^
어떻게 하면 저게 호남차별로 변하는 신공을 발휘할 수 있는 걸까요? ㅋㅋ
전혀 지역차별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에피지만 이를 호남 차별의 근거로 거론하는 음흉한 이들이 있죠.. 바로 적폐과메기존 경상도!!
사실 조선시대에 호남차별을 들려면 1589년 정여립의 난을 꼽아야 정상 아니겠어요? ㅋㅋ
16세기 후반이 되면 나라의 정권은 서인, 동인이라는 붕당으로 나눠지게 되는데..
서인은 기호지방(경기도 + 충청도)이 중심이 되고, 동인은 영남과 호남이 중심이 됩니다.
혹자는 호남이 서쪽에 있다고 서인 아닌가? 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아니죠.
당시 호남 출신들은 대부분 동인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런 밀고가 들어옵니다.
서인 :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대요."
참고로 정여립은 호남 출신의 동인이었어요.
소식이 들어오자, 서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신나게(?) 조사를 합니다.
서인 : "이거 잘만하면 눈엣가시 같은 동인 넘들을 모조리 내칠 수 있겠는 걸."
그리고 결국 정여립은 역모죄로 몰리게 되고, 이때 정여립은 물론, 호남출신 인사(대부분 동인)들이 줄줄이 목이 날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호남지역은 반역향(반역을 꾀하는 고장)으로 찍혀 한동안 관직 진출을 못하게 되고요. 실제로는 전라도는 반역이 아닌 혁명을 단행했다고 보는 게 맞답니다.
주로 유배를 오는 죄인들은 제주와 전라도로 많이 왔는데 대부분 죄인이라 함은 썩어빠진 조정에 바른 말을 하다가 간신들의 모함이나 계략에 빠져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라도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조선 조정의 부정부패, 지금으로 말하면 적폐세력들의 부정부패 비리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됩니다.
모르면 그냥 조정에 선동되면 그만이지만 유배온 정치인들에게 들은 조정의 부정부패 사실들이 입소문을 타고 곳곳에 전파되어 깨어있는 자들 주도하에 혁명이 일어나게 되죠.
당연히 조정에서는 그들을 반역자 폭도도 몰아 처단하려 하겠지만요.
그러니까 기독교 교리가 전파되듯 퍼지고 퍼져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여립 사건 때 또한 최영경을 비롯한 경상도 유생들도 많이 당했는 데 어차피 조선시대에 반역향으로 찍히지 않은 지방은 수도권이었던 경기도 말고는 없었답니다.
경상도도 말할 것도 없는 반역지역으로 이미 찍혀있었고요..
기호지역 출신들에게 목이 날아간 건 영호남 모두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반역향 하면 유독 호남지역만 부각시키죠.. 어디서? 우리가 아는 특정지역 그곳에서 ㅎㅎ
그러면서 1728년 이인좌 난 당시 서인 노론 세력에 의해 영남 유림이 탄압받았던 사실은 싹 다 무시하죠.. 결국 뭐냐 전라도 사람들이 순해서 그래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결한다면 당연히 경상도도 분탕질을 멈추겠죠.
경상도에서 그렇게 없는 것도 만들어내고 지역감정 만들어 정치적으로 경상도 표도 닭군이 싹쓸이 하다 보니 게다가 개체수도 월등하니 닭군은 계속해서 수위를 높여 지역감정을 유도하고 닭양까지도 쏠쏠한 재미를 봤었죠. 근데 거기까지네요.
만약 경상도 애들이 서울을 그런 식으로 공격한다면 저부터 가만 안 있죠.ㅋㅋ
팩폭 들어가면서 아주 그냥 작살을 내버려야죠. 그 분탕질하는 못된 습성을요.^^
이제는 쥐군 닭양의 쌍통수 적폐짓으로 경상도가 얼굴을 못들 정도로 창피해합니다.
물론 젊은세대와 일부 어르신 양심세력들이요.
닭사모나 일베충 이런 애들은 그냥 경상도의 10% 꼴통이니 패스하기로 하고요.^^
[출처] 경상도 뒷통수에 대해...|작성자 닭꼬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돼지는 무시가 답입니다.
뇌없는 것들이니..
하여간 모략은 ~~ 대단들하다 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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