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란 단지 공산주의 이념의 소지자를 지칭하는 낱말이 아니었다. '빨갱이'란 용어는 도덕적으로 파탄 난 비인간적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천하게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어떤 비난을 하더라도 감수해야만 하는 존재,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 죽음을 당하지만 항변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 본문 중.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반공주의를 이용한 빨갱이 몰이는 공고해져 갔다. 친일파 처벌 단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하여 노덕술을 검거하는데, 이승만 정권은 자신들의 지지기반이었던 친일파들을 보호하고자 반민특위를 주도하던 소장파 국회의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국회 프락치사건에 엮어 구속시킨다. 그러자 친일파들은 반민특위 청사 앞에서 "공산당과 싸우는 애국지사를 잡아간 반민특위 위원들은 공산당이다."라고 말하며 시위를 벌였고, 결국 반민특위는 해산된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동족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것도 모자라 독립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던 친일 군경이 대한민국 군경에 그대로 유입되면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일본군과 특별고등경찰의 반공 구호가 일부 수정되어 그대로 이식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일본군 군부는 방공 협정 체결을 추진할 정도로 반공주의자들이 매우 많기도 했었다. 어쨌든 국회 프락치사건으로 인한 반민특위의 실패는 민족반역자 처단을 무산시켰다.
또한 제주 4.3 사건과 여순사건도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이용한 빨갱이 몰이의 확산에 영향을 끼쳤다. 대한민국을 비판 혹은 부정하는 움직임이었기에 정부는 자신의 존속을 위해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 또한 이 사건들에 공산주의자들이 어느 정도 개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용해 '공산주의의 해악성'을 널리 선전했다. 특히 여순사건은 대한민국의 반공체제를 구축하게 하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군대 내의 반정부 봉기는 정부를 경악시켰고, 사건 진압 후 이승만은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히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라고 말할 정도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후 군대 내에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고, 여순사건 당시 봉기자들의 만행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빨갱이=사람이 아닌 존재'처럼 상정됐다. 그렇게 국가보안법도 1948년 12월 통과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빨갱이'라는 말은 권력에 방해되는 사람들에게 행했던 비도덕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소위 죽여도 되는 사람을 만드는 낙인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켜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보도연맹을 조직하고 중도~좌파 계열 정치인들을 반강제적으로 가입시켰고, 가입 숫자를 늘리기 위해 가입자들에게 고무신과 같은 생필품을 나누어주었고 농사에 필요한 비료를 우선 배급해서 좌파와는 아무 인연이 없는 주민들도 가입하도록 유도하고서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북한에 협력할 수 있다는 명분을 들어 이들을 모두 학살했다.
독재정권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세력을 향해서도 '빨갱이'를 남용했다. 당장 국회 프락치사건으로 인한 반민특위 파괴, 그리고 숙군이 정부 수립 직후에 발생했다. 이 일로 반(反) 이승만 세력과 소장파가 정계와 군대에서 대거 제거되었다. 전쟁 중에는 김구의 독립통일정부 수립노선을 따랐던 전호극 소령을 여순사건에 연루 되었다고 거짓 혐의를 덮어씌워 살해 했고, 친일파 청산과 평화통일을 신조로 삼던 최능진을 정부 수립 직후에는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처벌 했다가 6.25 전쟁 중에는 끝내 처형했다. 1959년에는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평화통일, 영세중립국가, 사회민주주의식 개혁'의 꿈을 말하던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법살인을 자행했다. 비단 이승만뿐만이 아니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정권 때는 인혁당 사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이 있었으며, 기타 묻히고 잊혀진 사건까지 포함한다면 셀 수도 없을 정도다.
정치권력 독점뿐만 아니라 민간인을 처형하거나 학살하기 위한 명분으로도 빨갱이가 사용됐다.
대표적인 예로
이승만 정권 때는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포함하여 제주 4.3 사건 당시 양민학살, 여순사건 당시 양민학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등이 있으며,
박정희 정권 때는 동백림 사건, 이수근 이중간첩 사건, 서창덕 납북어부 간첩사건, 김복재 조총련 간첩사건, 박춘환 납북어부 간첩사건, 유럽 간첩단 사건, 민청학련 사건, 울릉도 간첩단 사건, 문인 간첩단 사건, 형제 간첩단 사건,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 정규용 납북어부 간첩사건,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등이 있었고,
전두환 정권 때는 광주 학살, 부림사건,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깃발사건,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다. 독재정권 당시 위와 같은 공안사건의 담당자들은 혐의가 옅거나 억울한 사람들을 고문해서 허위자백서에 사인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고문 담당자들의 대표적인 인물로 이근안과 정형근이 있다.
과거 독재정권은 위와 같이 독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에게 행했던 비도덕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공교육과 반공 영화 및 반공 애니메이션을 통해 자신들의 독재체제를 자유민주주의로 포장하고 북한이 겉으로만 채택하고 있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독재주의로 규정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상대 개념으로 설정하였다. 그래서 반공교육의 영향을 받은 노년층들에게는 '나 때는 북한에 사람이 안 사는 줄 알았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하고, 박사모와 같은 극우단체의 주요 연령대가 되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독재정권을 반성해야 하는 이유로 인용되며,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인 반공교육의 폐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렇게 빨갱이로 정의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참혹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헌법에서조차 폐지된 연좌제도 이들에게는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당장 앞에 언급했듯이 고문과 가혹행위는 기본이었고 학살과 사법살인, 심지어 사적제재까지도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살아남거나 풀려났다고 하더라도 공안기관의 감시를 줄곧 받아야 했다. 또한 자식들과 친척들도 예외가 아니라서 이들도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고,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승진, 포상, 등용 등에 불이익을 받았고 결혼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쩌다 어른 135화(당시 강사는 심용환이다.)에서 나온 바에 따르면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려 죽은 피해자의 유족들의 삶은 정말 비참했다고 한다. 늘 군인들이 따라다니며 감시해 제대로 된 직업을 못 구한데다 자식들은 빨갱이의 자식이란 이유로 심한 왕따를 당했다고 하는데, 다른 아이들이 그 빨갱이의 자식이라 알려진 아이를 철사로 묶어놓고 돌을 던지거나 목에 철사를 감고 개처럼 끌고 다니는 등 괴롭힘의 수위가 단순한 애들 장난이라고 보기에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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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빨갱이라는 용어는 친일 세력이 본인을 정당화 하기 위한 단어
2. 친일경찰들이 본인을 잡던 독립운동가를 반대로 때려 잡을 때 쓰던 용어임
3. 군사정권이 본인들 정책에 반하는 세력을 때려 잡을 때 쓰던 용어
4. 즉, 빨갱이라는 용어를 쓰는 사람은 2가지임 (1) 친일세력 (2) 못 배운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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