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탈환 이후 - 진압군의 군사재판
순천의 경우 23일 오전 약5만명의 읍민이 순천북국민학교 교정에 집결했다. 심사는 주로 외모, 고발, 개인적 감정에 의한 중상모략, 강요된 자백등 극히 자의적 기준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처벌을 받는 것이 많았다. 여수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여수,여천발전사”는 당시 서교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날 밤 8시께 난데없이 서시장에 불이나 밤새껏 타고 있는데도 아무도 불을 끄러 갈 수 없었고 27일 밤 8시께도 충무동 시민극장 근처에서 불이나 충무동, 교동, 중앙동 일대를 태우고 있는데도 대안의 불처럼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누구나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죄없이 끌려온 시민들의 고생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시민들은 썰렁한 교정에서 이틀밤을 지샌뒤 28일 오후 3시께야 풀려날 수 있었다. 군, 경은 40세 미만의 젊은 남자들은 일단 가담혐의가 있는것으로 보고 6백여명을 따로 가려냈다. 이들의 심사를 위해 “주부대”라는 수도경찰이 따로 파견돼 중앙국교에 자리잡고 있었다. 군, 경은 가담자를 색출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로부터 투서를 받는 방법을 썼다. 치졸한 방법이었다. “여순사건”땐 각급 기관장이나 우익진영의 유력인사를 제외하곤 일반 민간인의 피해는 거의 없었으나 진압군이 들어오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여수시내 중심부의 시청과 경찰서 주변에는 시체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고 경찰서 뒤뜰에는 시체가 대강 정렬돼 있거나 혹은 난잡하게 포개져 있어 그 처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 만성리로 가는 터널 뒤쪽에는 집단총살된 사람의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백두산 호랑이”로 악명을 떨치고 있던 김종원 대대장(당시 대위)은 일본도의 칼맛을 시험한다며 여수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면서 혐의자들을 참수 즉결처분하기도 했다.
아들 형제를 살해한 원수를 사형장에서 구해내 양아들로 삼은 손양원목사의 인간애가 피어난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가려진 사건 가담혐의자들은 법적인 절차에 관계없이 가혹하게 고문당하거나 즉석에서 처형당하기까지 했다. 당시 여수의 참상은 몇몇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경향신문도 “가가호호에 기중공포에 쌓인 여수”라는 제목으로 이헌구씨의 현지견문기를 소개하고 있다.(여수. 여천 발전사 331쪽)
... 이번 동행했던 영랑형이 몇번이고 나에게 “이 민족에 절망하라”고 울부짖으면서 “이 민족이 절망에서 구원되리라고 생각하는 의욕까지를 포기하라”고 나에게 강요하다시피 원통해 하는 것이었다....
이번 사태에 대하여 어딘지 모르게 대다수의 민중이 아연히 방심한 채 끝없는 침묵속에 잠겨져 있는 이 무기미한 불안상태는 또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난민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흙속을 후벼도 보고 잿더미를 파헤쳐보나 티끌하나 건질것 없고 다만 옹기종기 모여서 있는 가족들! 반란에 가담하였던 사람들이 군경의 손에 묶이어 스물 혹은 마흔씩 열을 지어 저벅저벅 사령부로 걸어가고 있다. 진압군의 진주와 함께 여순지구에는 『여순사건』으로 해제됐던 종전의 정당 사회단체들이 재조직되기 시작했다. 자위대 우익청년단체등은 강화되거나 신설되기까지 했다. 순천의 경우 『충무부대』가 신설됐는데 『학생연맹』과 청년단체출신등 모두 79명으로 구성됐다. 여수에는 폐허화된 여수재건을 위해 『여수부흥성회』가 결성됐다. 육군사령부는 49년 1월 10일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군사재판에 회부된 군인의 재판결과를 발표했다. 이러한 발표에도 불구 여순사건의 피해를 총체적으로 집계한 자료는 아직 발견할 수 없다.
이승만정부의 발표에 따르더라도 학살된 민중의 수가 6천여명에 이른 것을 비롯 2만 3천여명의 민중이 체포, 투옥됐으며 5천여호의 가옥이 소실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또 『한국전쟁사 1권』에는 여순사건 1주일 현재 여수지구에서만 관민 1천2백명이 학살당하고 중, 경상자 1천1백50명, 가옥소실파괴 1천5백38동, 이재민 발생 9천8백여명의 피해를 냈으며 여순지구의 인명피해도 4백여명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순사건』은 이러한 피해를 남기고 막을 내렸다.
『여순사건』에 대해선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겠지만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단순한 군대내부의 반란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에대해선 초대 국방장관 이범석의 국회보고에서 그러나 정부는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기보다는 현지주민들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있었다. 라고 밝혔다.
군과 경찰은 여수~순천지역을 재탈환한 뒤 맨 먼저 반군과 부역자 색출에 나섰다. 10월 28일부터 12월 중순까지 계속된 가담자 색출과 처벌로 여수등은 공포의 도시로 변하고 말았다. 진압군들은 곳곳에서 보복적인 테러, 방화, 약탈 그리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주민들은 여기에서 군용팬티를 입은 자, 머리가 짧은 자, 하얀 고무신을 신은 자들이 1차로 분류되고 2차로 군, 경, 마을유지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받았다.
인민재판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자 1급, 소극적으로 참여한 자 2급, 애매한 자 3급등이었다.
심사결과, “여순사건(10.19사건)”이나 인민재판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자로 지목된 사람은 즉석에서 곤봉, 개머리판, 체인등으로 무참하게 타살되거나 총살당했으며 나머지는 계엄군이나 경찰에 넘겨져 재판을 받았다.
26일 진압군의 반격작전이 개시되면서 대부분의 시민들은 진압군의 지시에 따라 진남관, 중앙국교, 서국교등 3개 장소로 집결했다. 진압군의 본부는 서교에 있었다.
정문에서는 간혹 파리한 몰골의 가담자들이 잡혀들어와 교사뒤의 단죄대로 끌려가고 있었으며 그곳에서는 간혹 이들을 즉결 처분하는 기분나쁜 총소리가 “탕탕”울려퍼져 사람들의 긴장을 얼어붙게 했다.
세 곳에 모인 시민들에 대해서도 살아 남은 경찰관이나 우익진영 요인들이 돌아다니면서 소위 “심사”라는 것을 했는데 시민들 중에 가담자가 눈에 띄면 뒤따르던 군경에게 “저 사람”하고 손가락질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즉결처분장으로 끌려가는 판이니 누구나 산목숨이라 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사태가 일단락 되는 것으로 알고 한숨을 돌리고 있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이었다.
혐의자는 오동도에 재수감돼 심사를 받은 뒤 중앙국교로 끌려갔다.
이 때문에 개인감정등에 의해 생사람을 잡는 허위투서가 난무하여 무고한 민간인들이 수없이 희생을 당해야 했다.
중앙국민학교에서 진행된 가담자 색출작업도 동족이나 민족이란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무자비한 몽둥이 고문에 견디다못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쉴새없이 흘러나왔다. 군, 경은 가담사실이 드러나면 바로 교정 동쪽에 있는 버드나무 밑에서 즉결처분했다.
광주와 순천의 군법회의에 회부된 사건 가담자는 4백 58명, 이들은 11월 13일과 14일 재판을 받았는데 그중 양민으로 판명돼 석방된 사람이 1백 87명, 사형 1백 2명, 20년 징역 79명, 5년 징역 79명, 무죄 11명등이었다.
이 재판 결과만 보아도 군, 경의 가담자 색출작업이 얼마나 모진 고문에 의해 얻어낸 허위자백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또 경향신문 11월 13.14일자는 “찌그러진 남비 한개의 살림살이”라는 제목으로 최영수기자의 현지시찰기를 보도하고 있다.
비록 일제하의 탄압아래서 몸서리치도록 뼈아프게 약소민족의 비애를 느껴왔지마는 이번과 같이 잔인하고도 참혹한 구체적인 사실을 목도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다.
이 난국에 처하여 울연히 치밀어오르는 동포애와 민족정기의 기염이 생생한 맥박과 격동을 가슴깊이 체감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멸망의 길을 밟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더군다나 이 민족적위기를 가리켜 일제시대에 지긋지긋이 우리를 괴롭히던 “시국”이라는 말로 착각하며 혼동하는 인사가 있다면 이는 또한 굴욕의 시대를 자초하는 결과밖에 안 될 것이다.
일찍이 그들의 얼굴에 무슨 원한이 있었던가?
동족이라기엔 너무 멀다.
그 대열속에는 이 고을에서 밤낮으로 대하던 형제요,모녀요,부자의 피가 얽힌 겨레가 아니었던가, 부두에 나는 갈매기, 발동선의 기적소리마저 슬픈 역사의 “ 피의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이들은 한민당, 대한부인회의 지원과 협조 아래 가담자들에 대한 정보입수, 착후탐정등을 통해 군, 경 진압부대를 지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기성회 간부는 회장 문균, 부회장 정재완, 총무부장 정경수, 재정부장 박홍근, 건전부장 장기 등 지방유지들이었다.
부흥기성회의 목적은 진압군을 도와 사태를 부드럽게 수습하고 중앙당국을 움직여 가능한 한 많은 구호 물자를 타오는데 있었다.
여수긴급구호자금으로 1억8천5백만원이 배정됐고 22억5천만원이 장기저리대금으로 융자됐다. 기성부흥회는 주로 군, 관, 민,의 교량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궁지에 빠진 지방유지들을 구해 내기도 했다.
김모씨는 반군에게 2백만원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는 혐의와 그의 집에서 장총 3정이 발견돼 중앙국교에서 29일 동안 구치되어 있다 구출됐고 당시 여수금융조합장 이사였던 박모씨는 인민위원회의 재정책 업무를 맡았다는 혐의로 궁지에 빠졌다가 풀려났다.
또 다른 김모씨는 사건가담자들에게 서북청년단원의 주거를 가르쳐 준 혐의로 체포대상이 되었으나 구출되기도 했다.
발표문에 따르면 모두 2천8백17명이 재판을 받아 4백10명이 사형, 5백68명이 종신형을 받고 나머지는 유죄형 혹은 무죄 석방되었다.
이라는 표현에서도 그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즉 여순사건에서 보이는 자연 발생설은 당시 사회의 일반적 상황에 대한 독자적 반영이었던 것이다.
이승만대통령은 대구회담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