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9사건 전후의 정국
이른바 남로당의 '2·7구국투쟁'을 선두로 제주도 4·3사건, '5·10 단선반대 투쟁', l0월의 여수 제14연대 반란사건(여수·순천사건), 대구 6연대 반란사건 등의 무장반란과 대결의 흐름은 국내의 냉전적 질서를 걷잡을 수 없는 민족 비극의 최상급인 한국전쟁으로 몰아갔다.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발생한 일련의 '4.3 사건'은, 이후 남한에서 좌익에 의한 무장유격투쟁 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이 환상의 섬을 한국전쟁 이전의 한반도에서 가장 참담한 파괴와 고 통의신음 소리로 가득 차게 하였다. 사태가 진압되었을 때 당국은 사상자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라고 발표했지만, 49년말까지 추정된 1만5천~3만3천(제주도 인구의 약 10퍼센트를 상회하는)의 사망자수와 2만여 채에 달하는 파괴가옥수는 이 발표가 얼마나 터무니 없이 과장된 것이었는가를 반증해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제주도가소요에 빠져 있을 때 전남의 항구도시 여수에서는 제주도의 반도 토벌을 위해 출동하기로 되었던 국군 제14연대 사병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이 수렵된 뒤인 48년 10월 19일에 시작된 이 반란은 10월 27일까지 약 l주일간 여수를 비롯해 순천·광양·곡성·구례·보성 등지를 휩쓸었다.
반란을 일으킨 여수 l4연대는 광주 4연대(l946. 2. 15 창설)에서 차출된 l개 대대를 기간으로 1948년 5월 14일 창설된 부대였다. 이같은 살육과 테러는 동시에 반란군의 패배 뒤에 반드시 있게 될 끔씩한 보복에 대한 예고 이기도 하였다. 반란은 정부군이 장갑차·경비행기·군함 등을 동원하고 여수가 불바다가 된 후인 27일에 가서야 비로소 진정되기 시작하였다.
관민 1천2백여 명 사망, 반란군 8백여 명 사망이라는 엄청난 피해( 국방부 발표 : 실제 추정과는 거리가 있음 )를 가져 온 반란은 신생 대한민국의 기틀을 위협하는 폭풍으로 인식되었으나 실제로는 '찻잔 속의 폭풍'에 불과했다. 남한 내의 어떠한 반란도 실제로는 정부의 물리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잔류한 l천여 반란군은 김지회(金智會)·홍순석의 지휘 하에 지리산·백운산 등으로 입산 도피하였고, 이들의 입산으로 1948년 l950년간의 남한 내전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48년은 한반도가 분단되어 남북에 각각 서로 배타적 정통성을 자임하는 정권이 수립된 해였고 다른한편으로 수립된 정권의 권위에 도전하는 수많은시도와 충돌이 빈발하였다.
이승만 정권의 창출을 위한 5·l0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정치적 시위자에 대한 경찰과 경비대, 그리고 서북청년단의 가혹한 탄압은 고립된 섬의 지형적 조건. 혈연적 유대의식과 감성적 연계사슬을 통해 제주도 전역을 분노의 화산으로 만들어 버렸다.
반란은 남로당의 세포책임자인 하사관 지창수에 의해 선동된 2천 명 가량의 사병들이 '경찰타도, 제주도 출동거부, 남북통일을 위해 인민군으로 행동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여수시내로 진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20일 여수·순천을 장악한 반군은 연이어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갔고, 반란군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대중집회형식을 빌어 인민위원회가 복구되는 한편 '인민행정'이 시작되었다. 또한 이경모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수백명의 경찰·공무원·지주·한민당원·우익계 인사들이 즉석에서 살해되거나 '인민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다.
전투사령부(사령관:송호성(宋虎聲) 광복군 출신, 국방경비사령부 총사령관, 6·25때 납북, 1954년 의거자학교 교장, 1956년 재북평화통일추진협의회 중앙집행위원, 1959년 반혁명분자로 숙청)를 설치하고, 여수·순천지구에 계엄령을 내린 정부는 반란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토벌대의 일부분이 반란군에 투항하는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