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의 새벽
1961년 5월 16일 새벽, 일단의 무장 병력이 한강을 건너 서울 시내로 진입했다. 이들은 중앙청, 육군본부, 중앙방송국 등을 점령한 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 '혁명'을 알렸다. 즉 박정희를 실질적 지도자로 하는 5 · 16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은 이미 자유당 말기부터 운위되고 있었다. 1959년 9월 미 의회에 제출된 '콜론 보고서'는 이승만 정권의 동요로 인한 불안한 정세를 우려하면서 정당 정치가 실패하면 언젠가 군사 지배가 등장할 것임을 경고했다. 콜론 보고서가 예상한 대로 이승만 정권은 학생들의 4· 19혁명에 의해 붕괴되었고 뒤이어 등장한 민주당 정권의 불안한 정당 정치 역시 군부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쿠데타를 도모했던 박정희가 다시 쿠데타를 본격적으로 도모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초 3.15부정 선거 직전이었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결집된 쿠데타 세력은 3.15부정 선거 직후인 5월 8일 쿠데타를 거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4.19혁명이 발생하여 이승만 정권이 붕괴됨으로써 쿠데타 계획은 일단 무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이들은 정군(整軍) 운동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5월 2일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는 부정 선거의 책임을 물어 송요찬(宋堯讚) 참모총장의 퇴역을 요구했다. 다른 한편 김종필 등 육사 8기생들도 본격적으로 정군을 요구하고 나섰고, 이렇게 시작된 정군 운동은 육사 8기생들의 연판장 작성, 7, 9, 10기들의 하극상 사건 등으로 이어졌고, 결국 1961년 2월 김종필, 김형욱(金炯旭), 석정선(石正善) 등이 예편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사태 진전 속에서 쿠데타 세력은 1960년 9월 10일 충무로에 있던 일식집 충무장에서 쿠데타를 재차 결의하게 되었고, 이러한 결의는 이듬해 5월 16일 쿠데타로 이어졌던 것이다.
박정희는 과거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인물들을 쿠데타에 참여시켰다. 이를테면 만주군관학교 선후배들, 그와 동기생들인 육사 2기생들, 육사 중대장 시절 그가 가르쳤던 육사 5기생들, 그리고 그가 전쟁 말기 포병으로 전과하면서 형성된 포병 인맥들 등이 그들이다. 여하튼 3천여 명의 소수 병력으로 감행된 5 .16군부 쿠데타는 우여곡절 끝에 성공하게 된다.
일제 때 일본 청년장교들의 좌절된 쿠데타 시도인 2 · 26사건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 온 이래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쿠데타의 꿈은 결국 이렇게 실현되었다. 그러나 개인 박정희의 꿈은 실현되었지만, 4.19혁명을 계기로 이제 막 시작된 한국 민주주의의 꿈은 제대로 개화될 기회도 가져 보지 못한 채 꺾여 버렸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길고 험한 장정이 또다시 역사 앞에 드리워지게 되었다. 2년간의 군정을 거친 후 대통령에 입후보한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