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의 분단 고착화 정책
4월혁명 뒤에 타올랐던 민족 통일에 대한 강한 열망은, 1961년 5.16 군사 쿠테타로 꽃도 피우기 전에
꺽이고 말았다.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내세운 박정희정권은 공산주의와 대결하여 승리할 토대를 쌓
으려면 먼저 자본주의 공업화를 이루고 통일은 뒷날로 미루자며 `신건설 후 통일`을 내세웠다. 이때
부터 남한사회는 본격적으로 군부독재권력과 독점 자본이 결합한 외세 의존적 자본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남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독점자본, 독재권력과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 사이의 대립은 곧 분단체
제를 유지하여 기득권을 누리려는 반통일 세력과 분단을 허물려는 통일세력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또
한국 사회주의라는 남북한의 서로 다른 두 체제가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경쟁하였다. 한국전쟁 이전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대립은 이제 남북한의 체제 대립으로 귀결되었다. 그에 따른 군사적
긴장과 늘어나는 군사비 부담 때문에 남북한 민중의 분단의 고통을 크게 느껴야 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박정권의 통일정책말고는 어떤 통일논의도 허용되지 않았다. 박정권은 `유엔 감시
하의 토착인구비례로 남북한 자유선거를 실시한다는 한국정부의 통일방안에는 변동이 없다`고 못박
았다. 이전의 통일방안을 뼈대로 한 박정권이 내세운 `선건설 후통일`은 결국 분단체제를 유지,강화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박정권의 통일 정책은 `선건설 후통일론`에서 `두 개의 한국정책`으로 바뀌었
다. 분단고착화 정책이란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지만, 그것이 남북한에 갖는 정치적 의미는
달랐다.
박정권은 70년대 초 나라 안팎의 정세가 급변하자 정치,이데올로기적으로 큰 위기에 빠졌다. 먼저
밖으로는 월남전의 수렁에 빠진 미국이 중국과 관계를 개선한다는 사실은, 그 동안 냉전을 구실로 정
권을 유지해온 박정권의 사상기반을 크게 위협하였다. 곧 정권유지의 버팀목이던 반공이데올로기의
명분이 크게 흔들렸다.
또 안으로는 민중에게 오로지 희생만을 강요하는 `저곡가 저임금`에 바탕을 둔 박정원의 60년대 경제
개발정책으로 생겨난 모순이 터지기 시작하였다. 1970년 전태일 노동자의 분신사건, 광주대단지 빈
민폭동 등으로 이어지는 민중의 생존권 요구투쟁과 청년학생, 양심적 지식인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이
발전하면서 박정권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빠졌다.
나라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박정권은 다시 한번 독재체제를 강화할 수 있는 획기적인 계기가 필요하
였다. 박정권이 주도한 남북대화와 `7.4남북공둥성명`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려는 돌파구였다.
7.4남국공동성명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확인 하였다. 이 밖에도 중상,비방
금지와 군사적 충돌사건 방지, 남북 사이의 다방면적인 제반 교류 실시, 남북적십자회담 성사협조, 상
설 직통전화 가설, 남북조절위원회의 구성과 운영 등을 합의하였다. 남한의 그동안 `괴뢰도당`으로
몰아왔던 북한을 사실상 하나의 정권으로 그리고 남북대화와 협상의 대상으로 받아들인 것은 국민에게
커다란 인식의 변화로 비쳤다.
그러나 뒤이어 박정권이 통일을 하려면 유신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통일에 대
한기본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것은 1973년 `두 개의 한국정책`을 내세운 6.23선언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 선언의 핵심내용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과도적 조치로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선언을 계기로 거의 20여 년 만에 남북한 당국이
직접 협상하여 마련한 공동성명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그 결과 남북한 양측은 서로를 더욱 불신하였고, 각각 유신체제와 유일지도체제를 내용으로 하는 체제
강화에 몰두 하였다.
남북한의 이러한 대립은 70년대 분단국가에 대해 `평화`를 구실로 분단고착화를 꾀하던 미국의 `현상
유지정책`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미국은 북한이 제안한 평화협정(1974.3.25)을 거부하면서 교차
승인, 유엔 동시가입, 4자(남한,북한,미국,소련)회담이라는 한반도 현상유지 방안을 내놓았다. 이 방
안은 1979년 한국을 찾은 카터 대통령과 박정권이 함께 발표한 한미공동선언에서 다시 확인되었다.
이에 대해 북한과 소련은 특히 유엔 동시가입을 `분단고착화 술책`이라고 비판하면서, 오히려 `단일
국호 유엔가입`을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