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이 연안에 있는 중국 공산당과의 합작을 거부한 것은 상기되어 있듯이 난창 폭동 때 중국 공산당에 토사구팽당한 후 중국이나 소련 공산당과 절대 연계하지 않고 독자적인 사회주의 단체를 유지하겠다는 강한 신조 때문이었다. 또한 누구에게도 지시받는 것을 싫어하고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어 스스로 명령할 수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김원봉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장제스는 돈만 대줄 뿐 크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았고, 심지어 공산주의를 추구하건 말건 크게 상관하지도 않았다.
. 장제스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잔여 병력에 대한 지원을 끊으면서 김원봉이 임시정부에 합류하도록 압박했다. 김원봉은 임시정부에 합류하지 않고 한동안 버텼다. 하지만 갑자기 돈줄이 끊기면서 완전히 벼랑 끝에 몰렸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고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고개를 숙이고 합류하게 된다. 이때 김원봉은 중국 공산당,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연안파에 이어 장제스에게 다시 한번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1941년 6월 조선민족혁명당 제6회 전당대표대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가가 의결되었고, 1942년 약 100명의 조선의용대 잔여 대원들은 정식으로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대원들은 임시정부 및 광복군에 합류하길 거부하고 연안으로 이탈했다.
1946년 2월 14일 남한 내의 사회주의 계열 단체들이 연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했다. 김원봉은 민전의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김원봉은 박헌영, 백남운, 여운형, 허헌과 함께 민전의 공동의장으로 추대되었다.
김원봉 자신이 창설하여 이끌던 사회주의계열 단체인 조선민족혁명당은 1946년 6월말,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했고, 김원봉이 위원장[21]에 올랐다. 인민공화당은 신탁통치 지지, 각지 인민위원회 조직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 토지의 무상몰수·무상분배, 노동자·농민에 대한 선전활동 강화, 민전에 대한 지지 표명을 정치노선으로 삼았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 위원회에서 '공화국 남반부 해방 지역 군면리 인민위원회 선거 중앙 선거 지도부'가 구성되었는데, 김원봉은 9명의 지도부 중 첫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이 '공화국 남반부 해방 지역 군면리 인민위원회 중앙 선거 지도부'가 하는 일은 북한이 점령한 남한 영토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행정 기관을 철폐하고 북한 통치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김원봉은 국가 검열상의 지위로 6.25 전쟁 중에 남파 간첩을 훈련하고 파견하는 것을 직접 지휘했다. 1954년 1월 26일 경향신문은 "평양에 본적을 둔 간첩 김춘옥 외 4명을 체포해 이들을 취조한 결과, 김춘옥은 '6.25 전쟁 당시 김원봉의 직접 지휘하에 대한민국의 경제 혼란, 선거 방해, 모 정당 와해를 목적으로 남파되었다'고 진술"한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6.25 전쟁 발발 이전부터 김원봉으로부터 간첩 훈련을 받았다고 진술되
1958년 11월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했다. 조선의용대 출신 김학철의 증언에 따르면 김원봉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후 청산가리를 먹고 자결했다고 한다. 김원봉의 아내인 최동선과 두 아들 김중근, 김철근도 함께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김원봉의 최후에 대해 북한 정권은 극비에 붙이고 있어서 자세한 내막은 아직도 불투명하다.
그리고 중공게릴라에 조선인 섞여 있다고 동족죽인거면 한국은 싸우지 말고 중국에 먹혀야 겠네
그리고 6,25때 남침한 중공군도 조선족들입니다. 대륙을 공산화한 마오쩌둥이 조선족부대가 쓸모 없어지자 6,25에 참전시켜 동조끼리 싸우게해서 제거한겁니다. 이런것도 모르면서 백날 신채호의 역사 어쩌구 떠드는게 웃긴겁니다.
바보인가여?
. 장제스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잔여 병력에 대한 지원을 끊으면서 김원봉이 임시정부에 합류하도록 압박했다. 김원봉은 임시정부에 합류하지 않고 한동안 버텼다. 하지만 갑자기 돈줄이 끊기면서 완전히 벼랑 끝에 몰렸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고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고개를 숙이고 합류하게 된다. 이때 김원봉은 중국 공산당,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연안파에 이어 장제스에게 다시 한번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1941년 6월 조선민족혁명당 제6회 전당대표대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가가 의결되었고, 1942년 약 100명의 조선의용대 잔여 대원들은 정식으로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대원들은 임시정부 및 광복군에 합류하길 거부하고 연안으로 이탈했다.
김원봉 자신이 창설하여 이끌던 사회주의계열 단체인 조선민족혁명당은 1946년 6월말,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했고, 김원봉이 위원장[21]에 올랐다. 인민공화당은 신탁통치 지지, 각지 인민위원회 조직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 토지의 무상몰수·무상분배, 노동자·농민에 대한 선전활동 강화, 민전에 대한 지지 표명을 정치노선으로 삼았
김원봉은 국가 검열상의 지위로 6.25 전쟁 중에 남파 간첩을 훈련하고 파견하는 것을 직접 지휘했다. 1954년 1월 26일 경향신문은 "평양에 본적을 둔 간첩 김춘옥 외 4명을 체포해 이들을 취조한 결과, 김춘옥은 '6.25 전쟁 당시 김원봉의 직접 지휘하에 대한민국의 경제 혼란, 선거 방해, 모 정당 와해를 목적으로 남파되었다'고 진술"한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6.25 전쟁 발발 이전부터 김원봉으로부터 간첩 훈련을 받았다고 진술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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