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땅(actant)과 악뙤르(acteur)>
악땅과 악뙤르는 프랑스 말인데, 영화나 문학의 비평용어로 흔히 쓰인다. 악뙤르는 actor, 즉 배우를 뜻하고, 악땅은 역(役)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보면 된다.
배우는 인격체이지만 그가 맡은 역은 인격체가 아니다. 감독이 구상하는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배우는 자신의 인격과 철저히 구별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연기해야 한다. 그게 전문 배우다. 그런데 때때로 악땅과 악뙤르를 구별하지 못하는 배우가 있다.
30년 전 전라도 고흥 시외버스터미널, <경마장 가는 길> 촬영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장선우 감독은 승차권 검표원 청년을 현장에서 엑스트라로 캐스팅했다. 그리고 감독은 그에게, 버스를 타기 위해 개찰구 앞을 지나가는 승객들의 승차권을 일일이 받아 확인하지 말고, 승객들이 그의 앞을 지나갈 때마다 귀찮다는 듯이 턱짓으로 지나가라는 신호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이 엑스트라는, 어떻게 승객님들 앞에서 그런 건방진 태도를 취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감독의 지시에 완강히 반발했다. 촬영에 들어가기 위한 셋팅이 끝나고 배우와 엑스트라들이 감독의 “큐!” 사인만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검표원역을 맡은 엑스트라가 감독의 연기 지시를 거부했으니 촬영장에는 적잖은 소요가 일어났다. 그 청년은 전문 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악당과 악뙤르를 혼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빨리 이 씬 촬영을 끝내고 다음 촬영지로 이동해야하는데 느닷없이 엑스트라 하나가 감독이 지시하는 연기를 자신의 윤리관을 내세우며 거부하니 감독은 애가 탔을 것이다. 아무리 달래어도 도무지 들어먹을 것 같지 않은 그 정의감에 불타는 고집불통의 청년이 만약 서울에서 내려온 전문배우였다면 장선우 감독 성질에 쪼인트라도 깠을지 모른다. 나처럼 혼자 그림이나 그리는 사람과는 달리 수많은 인력을 통솔해야하는 감독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게 할 수도 있고, 그러다보면 성질 더럽다는 평판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지고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에는 배우의 표정과 육체, 말과 행동들이 모두 악땅이 된다.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악뙤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감독의 입에서 “컷!” 혹은 “오케이!”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배우는 철저히 자신을 분리해야한다.
그런데, 전문배우들 중에도 고흥 버스터미널의 청년처럼 악땅과 악퇴르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성추행을 연기한 배우가 성추행범이 되고, 성행각 연기를 지시한 감독은 성접대를 강요한 파렴치한이 되는 것이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미투의 한 단면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2,30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감독 중에 집이 있는 사람이 드물다는 말도 들은 바 있다. 온 국민이 부동산 투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동안에도 영화 일에만 매달려 한 세월을 살아왔으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영화가 이만큼이라도 발달한 것은 지난 30년,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감독과 스텝들과 남녀 배우들이 치열한 프로정신으로 일해 온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감사해야한다. 악땅과 악뙤르도 구별하지 못하고 칸느의 레드카펫을 꿈꾸며 영화계에 뛰어든 불나방 같은 여배우라면 애당초 시외버스터미널 검표원이나 하는 게 옳았다.
악땅과 악뙤르를 구별하지 못한 여배우들 중에는 미투 바람을 타고 성적학대를 당했다고 언론에다 대고 폭로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경찰에 고소를 하면 될 일인데 언론사를 찾아가 폭로하는 것은 감독을 매장시키려는 의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이 “문화대혁명시대”에 언론은 성행위 연기 지시를 “성접대 강요”라고 쓰고 성폭행을 당했다고 쓴다. 감독을 죽이기 위해 악땅과 악뙤르를 고의로 혼용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런 언론은, 대본에도 없는 성행위 연기를 갑자기 지시하는 것은 영화계의 나쁜 관행이라고 자못 권위에 찬 목소리로 영화계를 꾸짖는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예술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영화 대본은 건축 설계도와는 달라서 촬영현장의 상황이나 감독의 필링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영화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감독은 대본도 없이 그때그때 필링만을 쫓아 촬영하는 다이렉트 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건축설계도와는 달리 영화대본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영화는 예술인 것이다. 영화의 이런 속성도 모르고 배우를 지망했다면 그것은 배우가 잘못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 언론은 왜 김기덕 감독을 죽이고 싶어 했을까? 어쩌면 Jtbc가 선도하고 있는 미투 열풍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였을지 모른다. 그러다보니 성행위 연기 지시를 보다 자극적으로 “성접대 강요”로 몰아갔는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시대의 천재 김기덕 감독에 대한 열등의식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언론보다 더 가관인 것은 이 나라 판사들이다. 그들은 사법고시에 패스하기 위하여 6법전서나 달달 외며 청춘을 보냈기 때문에 인문학적 상식이 없다. 따라서 그들은 악땅과 악뙤르를 구별하지 못하고 판결을 내린다. 세월이 지나고 광기에 찬 페미니스트들이 지하로 숨어들면 미투 사건과 관련하여 이 나라 판사들이 얼마나 무지몽매한 판결들을 내렸는가 하는 것이 낱낱이 밝혀질 것이다.
영화배우 윤정희 선생이 말년에 어느 방송에 나와서 했던 인터뷰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평생 영화배우를 하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은, 젊은 시절, 감독이 벗으라고 하는데 벗지 않겠다고 버팅겼던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철이 없었기 때문이고, 영화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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