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카시 (미국 정치가) [McCarthy, Joseph Raymond]
1908. 11. 14 미국 위스콘신 애플턴 근처~1957. 5. 2 메릴랜드 베세즈다. 미국의 상원의원.
1950년대초 미국 정부의 고위직에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체제전복을 꾀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고발을 해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매카시 선풍의 장본인이다. 그는 상원의원의 신분을 벗어난 천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상원의 동료의원들로부터 공식적으로 비난을 받았다(1954. 12. 2). 이로써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매카시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위스콘신 주의 검사였던 매카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해군에 입대하기 전 3년 동안 순회판사로 일했다(1940~42). 1946년 예비선거에서 상원의원 로버트 M. 라폴레트 2세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공화당 후보지명전에서 승리했다. 그해 가을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52년에 재선되었다.
매카시는 조용하고 평범한 상원의원이었다. 그러나 1950년 2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국무부에 침투했다는 고발을 공개적으로 함으로써 미국 전역을 들끓게 했으며 주요신문의 머리 기사로 등장했다. 얼마 후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서 증언했는데, 그는 이때 '정식등록을 한 공산주의자'가 어느 부서의 누구인지 단 한 사람의 이름도 밝히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6·25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동유럽과 중국에서의 공산주의자들의 승리에 놀란 국민의 두려움과 좌절감에 편승해 자신의 고발운동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더 많이 얻게 되었다. 매카시는 계속해서 전국적으로 호전적인 '반공운동'을 선동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매카시는 헌신적인 애국자요, 진정한 미국정신의 수호자로 보였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는 시민의 자유를 존중하는 미국의 전통을 파괴하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정적(政敵) 박해자로 보였다.
매카시는 1952년에 재선되어 상원 행정운영위원회와 이 위원회에 소속된 상설 조사위원회의 의장직을 맡았다. 그후 2년 동안 매카시는 여러 정부 부처를 조사하고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을 받은 사람들에 관한 수많은 증거자료들을 검토하면서 계속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매카시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설득력있는 소송을 제기하지는 못했지만, 현란하고 명쾌한 논조로 사람들을 비판함으로써 일부 인사들을 관직에서 몰아내기도 하고 대중으로 하여금 특정인들을 심판하게 만들었다. 공산주의자라는 죄목으로 무고한 사람을 박해하고 미국인의 공공생활에서 강요된 순응을 만들어낸 이러한 관행을 그후 매카시즘이라고 불렀다. 한편 정부기관들은 실제로 공산주의자 침투사건들을 확인하고 혐의자를 기소했다.
매카시의 무책임한 공격은 갈수록 심해져, 마침내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다른 공화당 및 민주당 지도자들까지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영향력은 1954년 미국 육군장교들과 공무원들을 체제전복 기도로 고발하는 사건을 놓고 이루어진 청문회를 텔레비전이 36일간 전국적으로 방영한 후에 줄어들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을 통하여 매카시의 야만적이고 잔혹한 질문전략이 상세하게 폭로되었는데, 이로 인해 그에 대한 신뢰는 떨어졌으며 여론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섰다. 그해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상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자, 매카시는 조사위원회 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곧이어 상원은 67 대 22로 매카시가 '상원의 전통에 위반되는' 행동을 했다는 판결을 내려 공식적으로 비난했는데, 그후 매카시는 이전의 세력과 인기를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